[Opinion] 태양왕 없는 시대의 배우들 [미술/전시]

연기의 균형점은 배우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글 입력 2024.07.22 13: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조각은, 장식일 때 아름다운가, 영혼을 깎아 넣었을 때 아름다운가.

 

연기는, 보여주기 위한 기술이 중요한가, 고뇌한 흔적이 중요한가.

 

 

[꾸미기][크기변환]마를리 (3).jpg

 

 

화려한 프랑스 조각을 한 눈에 즐기고 싶다면 루브르에 가 볼 만한 공간이 있다. 한낮에는 햇살에 빛나고 밤이 되면 조명이 비추는 대리석 정원, ‘마를리 안뜰’과 ‘퓌제 안뜰’이다. 이곳은 절대왕정 시대로 모두를 초대한다. 화려한 조각의 기교와 역동성은 넓은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 마치 공간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 같다.

 

마를리 그리고 퓌제 안뜰에는 루이 14세 그리고 15세가 의뢰한 작품들이 즐비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안뜰은 당대의 화려한 미감과 현시대 사람들의 여유로운 시간이 공존한다. 이곳엔 조각을 스케치하는 미술학도, 서로의 무릎에 누워있는 연인, 즐거운 아이들이 함께하며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기도, 흐르는 것 같기도 한 이중성의 공간이다.

 

절대 왕정 시기의 프랑스 조각들은 화려한 매력을 갖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해석의 여지와 주관성보다는 완벽에 가까운 기술을 통해 직관적 아름다움에 집중한다. 주제 역시 개인의 삶 혹은 경험에서 비롯된 주제 및 인물 - 이를테면 로댕의 연인이었던 클로델 - 보다는 신화에 국한된다.

 

 

[꾸미기][크기변환]마를리의 말.jpg

Fame of Riding Pegasus (Antonie Coysevox)

 

 

루이 14세가 가장 총애했던 조각가인 앙투안 코와제보는 태양왕을 찬양하기 위해 그리스와 로마 신화 속 페가수스 위에 로마 신화 속 무역의 신을 기수로 앉혀 풍요로운 시대의 승리를 축복한다. 마를리 안뜰의 이 조각은 말의 근육에 드러난 강력한 힘을 통해 바로크 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리창 천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우뚝 선 이 조각상은 부서지는 햇살을 받으며 절대왕정 시대의 영광을 뽐낸다.

 


[꾸미기][크기변환]밀로.jpg

Milo of Cronton(Pierre Puget)

 

 

한편, 퓌제 안뜰에는 태양왕 시대의 또 다른 조각가 피에르 퓌제의 대표적 작품인 크로톤의 밀로가 있다. 이 조각은 그리스와 로마 신화 속 인간인 밀로가 신에 대항, 그리고 그 자존심이 꺾인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맨손으로 나무줄기를 쪼개려던 운동선수 밀로는 결국 밀림의 왕 사자에게 목숨을 잃는다.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이 강하게 뒤틀린 근육과 고통에 과장된 얼굴 표현은 환한 공간 속에서 어딘가 부조화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두 조각은 모두 성 혹은 정원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의 조각가들은 개인적인 주제에 집중했지만, 절대 왕정 시기의 조각들은 일반적으로 신화를 통해 왕실 숭배 혹은 정원을 돋보이게 한 장식의 용도로 만들어졌다. 조각은 이처럼 장식일 때 아름다운가? 혹은 이후 시대 조각가처럼 개인적 이야기를 깎아 넣었을 때 아름다운가?

 

결국은 보여줘야만 하는 예술들은 이 담론을 공유한다. 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여주기 위한 기술이 중요한가? 혹은 수많은 대사의 표현법을 고민한 흔적이 중요한가?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갑자기 존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혹은 뛰지 않았지만 뛰면서 등장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기술적인 호흡이 필요하다. 동시에 배우들은 고뇌한다. 대사 한마디에 인물의 목적, 전후 상황, 성격을 고려한다. 이를테면 사랑한다는 한마디를 위해 여러 개의 선택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단 한 번뿐인 연기의 순간에서 최선의 선택지 단 하나만을 선택한다.

 

그 어떤 예술에도 단일한 정답이 없듯 조각도 그럴 것이다. 조각은 장식의 책임과 개인의 이야기 사이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배우 역시 그렇다. 기술과 개인의 고뇌 간의 균형이 필요하다. 여기서 균형은 5:5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8:2가, 6:4가 균형점일 수 있다.

 

위 조각가들의 균형점은 시대의 흐름이 결정해 주었다. 절대 왕정 시대의 조각가들은 장식으로서의 조각을 균형점 삼았다. 하지만 현시대 배우들의 균형점은 시대가 정해주지 않는다. 찬양할 왕실도 신화도 없다. 그래서 스스로 시대를 결정하는 조각가가 돼야 한다.

 

같은 예술가,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 시대에서 균형점을 발견할 것.

 

그것이 찬양할 신화가 없는 시대에 배우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지침서일지도 모른다.

 

 

[김은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0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