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뱀파이어, 먹이와의 사랑 – 카르밀라

새로운 지도를 펼친 그들은 어디로 나아갈까
글 입력 2024.07.2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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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eyes large, dark, and lustrous; her hair was quite wonderful, …and in colour a rich very dark brown, with something of gold.”

 

그녀의 눈은 크고, 어둡고, 윤기가 흘렀다. 그녀의 머리는 꽤 아름다웠는데… 아주 짙은 갈색에 금빛이 도는 색이었다.

 

소설 <카르밀라>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오늘날 모습과 사뭇 다르다. 풍성한 금발에 검은 눈을 가진 흡혈귀라니. 검은 생머리에 빨간 눈의 흡혈귀가 익숙한 우리에겐 낯선 모습이다.

 

특이한 외형은 시작일 뿐이다. 카르밀라가 온 뒤로 순수한 소녀 로라의 목엔 푸른 멍이 생기기 시작한다. 로라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르밀라에게 매혹된다. 결국 둘은 달빛 아래서 입을 맞춘다. 흡혈귀와 퀴어를 연결한 최초의 소설, <카르밀라>가 뮤지컬로 돌아왔다. 새로운 캐릭터 ‘닉’과 함께.

 

 

뮤지컬 카르밀라_메인포스터.jpg

 

 

뮤지컬 <카르밀라>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150년 넘게 뱀파이어로 살아온 닉은 “소녀(카르밀라)의 환한 얼굴에 눈이 멀어” 카르밀라를 뱀파이어로 만든다. 카르밀라가 기운을 못 차리고 죽으려 하자 닉은 카르밀라를 로라 집으로 데려간다. 카르밀라는 닉이 로라를 해칠까 두려워, 죽음을 감수하며 로라를 도망치게 한다. 로라는 그런 카르밀라를 지키려 뱀파이어가 된다.

 

사랑의 주체와 대상은 모두 여성이다. 극에선 ‘우정’이라 명시되지만 관객들은 셋의 관계를 쉽게 사랑으로 해석한다. 카르밀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름답다”고 말하는 로라, 긴장한 채로 손을 맞잡고 춤추는 둘, 피가 나는 손가락을 물거나 목을 깨무는 장면은 전형적인 멜로 연출이다.

 

 

카르밀라_공연사진 (1).jpg

 

 

극에서 퀴어와 뱀파이어의 유사성은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이들을 이들답게 만드는 특징은 ‘악’으로 규정돼 인간 세상에서 배척된다. ‘본능에 따라’ 넘버에서 카르밀라는 “인간들은 언제나 신을 앞세워 자신들과 다른 것은 배척해왔지”라며 “선과 악 그것 역시도 전능하신 신의 허상”이라 비웃는다. 뱀파이어가 핵심 정체성인지라 퀴어로서의 고민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다. ‘같은 여성을 좋아하는 흡혈귀’보단 ‘인간을 좋아하는 흡혈귀’로서의 내적 갈등이 주를 이루는 식이다.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극이지만, <카르밀라>에는 또 다른 테마가 있다. 바로 시간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먹어야 하고 인간은 흡혈되면 죽는다. 유한한 인간은 뱀파이어가 평생 쌓아온 힘, 경험, 매력을 당해낼 수 없다. 불공평한 관계다. 포식자-먹이 관계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건 시간의 흐름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간다.

 

뱀파이어도 외형은 그대로일지언정 시간을 멈추거나 빠르게 돌릴 수 없다. 천천히, 지난한 고통을 견뎌야 한다. 인간은 죽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뱀파이어는 벗어나지 못한다.

 

 

카르밀라_공연사진 (2).jpg

 

 

유한과 무한, 이 두 가지 시간 선은 무대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대를 감싸 안 듯 가로지르는 계단은 무한의 시간 선을, 계단 아래 공간은 유한의 시간 선을 상징한다. 닉과 카르밀라는 주로 계단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단 아래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듯 지켜본다. 카르밀라가 처음 등장해 위압감을 보여주는 곳도 계단 위다. 반면 로라와 카르밀라가 교류하는 곳은 계단 아래 공간이다. 계단 위에서나 언급될 법한 ‘영원’은 오히려 계단 아래, 인간 세상에서 많이 언급된다. ‘맹세해’ 넘버에서 카르밀라가 “이 시간도 결국 다 지나가”라고 말하면 로라는 “먼 훗날 눈부신 기억 되겠지”라고 답한다.

 

결말에서 로라는 카르밀라를 살리기 위해 뱀파이어가 된다.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닉과 카르밀라처럼 파국으로 치달을까? 아닐 것이다. 닉이 카르밀라를 뱀파이어로 만든 데엔 인간적인 구석이 없었다. 오직 재미를 쫓아 카르밀라를 유혹해 인간과 짐승의 피를 빨아 먹는 운명에 끌어들였다. 로라 아버지를 죽여놓곤 “걱정 마, 너(로라)도 곧 아빠 곁으로 보내줄게”라고 말하는 인물에게 어떤 인간성을 기대하겠냐만.

 

반면 카르밀라와 로라의 관계는 지극히 인간적인 지점에서 시작됐다. 카르밀라는 어린 로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빠를 잃은 로라를 살리기 위해 닉에게 무릎을 꿇고 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라는 카르밀라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뱀파이어가 된다. 모습은 뱀파이어일지언정 그들의 행보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계단 위 무한의 시간 선이 아닌 계단 아래 문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은 맞잡은 손을 보여주다가 굳게 닫힌다. 꽉 닫힌 엔딩을 상징하듯이.

 

새로운 지도를 펼친 그들은 어디로 나아갈까. 이것만은 확실하다.

 

둘을 비추는 태양이 그들에게 손짓하고 있다는 것.

 

둘이 함께 하는 날들은 눈부시게 빛나리라는 것.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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