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시를 통해 더 나은 삶을 상상하기 – 황인찬 시인 Part.1

글 입력 2024.07.2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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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고 쓰는 일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을까?


시는 유독 특별한 장르이다. 언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독특함을 다루는 예술이라서 그런지, 짧으면서도 곱씹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이 있고 즉각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어떤 때는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쉽게 녹여낸다. 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시적인 순간들. 시와 삶의 균형을 맞춰나가는 시인의 이야기와 작업 방식 그리고 ‘전국민 시인화’를 꿈꾸는 시인의 소망과 일상까지.


궁금증과 질문을 한가득 안고, 많은 작품과 아름다운 시로 사랑받는 시인 황인찬을 만났다.




[시인 황인찬을 만나다]



황인찬 프로필 메인.jpg

 

 

1.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시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황인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2. 요즘 자주하는 생각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주거 문제가 참 심각하다.(농담) 요즘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어요. 가벼운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자면, 오피스텔은 바깥 공기가 바로바로 실내로 안 통해서 답답하고 삶이 질이 좀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환기가 잘 되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식물도 많이 키우시니까(웃음), 환기가 더 중요하죠?


맞아요. 습도랑 바람이랑 이런 거. 사실 다 식물 때문에 그런 것도 있거든요. 식물 때문에 공기가 잘 들어오고 바람 잘 통하는 게 중요해요. 안 그러면 서큘레이터 계속 틀어줘야 하는데, 지금 하루종일 돌리고 있거든요. 


키우다보면 애정이 가고, 신경 쓰게 되는 부분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이게 식물을 위한 집인지, 나를 위한 집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친구들이 오면 이제 한마디씩 하죠.(웃음) 물을 주는 것도 매일 30분씩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어느 날은 2시간 이상을 써야하는 날이 생겨요. 가능하면 매일 조금씩 보려고 하는 편이고, 오늘도 이제 들어가서 봐야 돼요. 생물 쪽 취미는 종이 다양하잖아요. 인간은 하나지만 식물은 종이 너무 다양하고 조금씩 다르게 예뻐서, 보다보면 자꾸 늘어나는 것 같아요.


최근에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애정을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이 또 보답을 바라는 존재라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어주지 않으면 섭섭하기도 하더라고요. 


그런데 식물은 자라요. 잎이 새로 나오고, 알아서 번식되기도 하고. 고수들은 씨를 받아서 다시 심거나 새로운 종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러다보니 사실 보답은 잘 커가는 모습을 보는 그 자체죠. 그게 생각보다 뿌듯해요. 


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식물 있으세요? 


어떤 식물 하나가 제일 좋다고 딱 잘라 말할게 딱 있지는 않은데, 그래도 고르자면 알로카시아 종류 중에 ‘프라이덱’이라고 있어요. 예쁜데 은근 까탈스러워서 항상 고생을 하면서 키우는 편이라 계속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애들이에요.(웃음)



3.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 시집/ 시 한 편을 골라주세요.


스스로는 무언가가 나를 대표한다는 생각이 잘 안 들거든요. 시인들은 소설가랑 좀 다른데, 시인들은 시를 내고나면 좀 남이 돼요. 그렇게까지 이 시가 나고, 내 거고 이런 생각이 잘 안 드는 편이에요. 쓰고나면 작품이랑 나랑은 이제 떨어지는 무언가가 되어서, 한 편 끝났으니 넌 이제 안녕. 이런 느낌에 더 가깝거든요. 그래서 자기 작품에 대한 애착 같은 게 좀 덜 생기는 편이에요. 시는 워낙 많이 쓰다보니까 까먹는 경우도 있고. 가장 많이 하는 답변은 가장 최근에 쓴 시가 대표작이라는 게 가장 대표적인 답변일 것 같아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대표성을 가졌다고 말해주시는 건 첫 시집이겠죠. 근데 또 한편으로 제 입장에서 첫 시집은 너무 부끄럽거든요. 첫 시집이니까 20대 초반에 쓰인 글들이고, 등단 전에 썼던 시가 거의 반 정도 되는데, 옛날 SNS를 볼 때 느껴지는 민망함 같은 거 있잖아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 시절 저의 어떤 미숙함이나, 그 당시의 생각 이런 것들이 참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그때랑 지금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세요? 


그렇죠. 그때는 20대 초반이고 이제 제가 30대 후반이라고 말해야하는 나이가 됐으니까, 그 시절의 저하고 지금의 제가 같은 인물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도 멀리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다른 인터뷰에서 부끄러움이 기쁨과 슬픔보다 더 큰 감정인 것 같다는 말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이 유효하신가요?


네. 단순히 크다기보다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기뻐서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거나, 슬퍼서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다’가 우리 삶에 더 크게 작용을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저한테는 이 ‘부끄러움’이라는 게 훨씬 큰 동인이거든요. 부끄럽지 않으려고. 혹은 부끄럽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첫 시집이 부끄럽다는 이야기랑은 조금 다른 느낌의 부끄러움이지만. 한편으로는 내 과거로부터 계속 멀어져야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감정이기도 하니까 어떤 맥락에서는 연결되어 있기도 하겠네요. 


수치심이 작품을 하도록 추동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고 자주 언급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글을 쓴다는 건 그걸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남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이 문학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내밀하고 약한 영역을 어떻게 남들한테 드러내는 게 가능한가 이런 생각도 들어요.


근데 정말로 어지간한 것들은, 쓰면 괜찮아져요. 내가 이걸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고, 내 언어로 바꿀 수 있게 되면, 내 안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는 거거든요. 그러면 생각보다 많이 괜찮아져요. 


말씀하신 것처럼 글쓰기 작업은 결국 자기 이야기, 자기 고백을 하는 일을 하는 건데, 그 고백의 과정이 결국 내가 그걸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가공을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말해버리고 나면 훨씬 괜찮아지게 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수치심을 바라보고 마주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이 수치심을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저는 글쓰기를 하면서 많이 안정됐어요. 확실히.

 

 

시를 통해 저를 이해할 수 있었고, 시를 통해 저를 벗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시를 이해하는 만큼 삶의 부정합성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시를 사랑하는 만큼 저 자신을 미워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또한 그러하시시리라 믿습니다. 

 

황인찬,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작가의 말 중에서

 


방금의 대화는 내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영역이었다면,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술적인 완숙도가 떨어지거나 정확하지 못한 표현에 대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잖아요. 시인님께서도 당연히 습작생의 시절을 거치셨을 테니까. 그런 부끄러움은 어떻게 대하면 좋은가요?


그렇죠. 그런데 그건 사실 시를 잘 쓰고 나면 괜찮아지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내가 감쪽같이 정리하고 표현해냈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여분이나 결여가 발생할 수밖에 없잖아요. 쓰기의 행위라는 게 결국은 현상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일이기라기보다는 현상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 일에 가깝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계속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거죠. 


나 이거 좀 잘 썼는데? 이런 생각 스스로 하실 때도 있나요?(웃음) 찢었다. 뭐 이런 거요.


잘 썼다고 감탄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내가 이걸 어떻게 생각했지 같은 것들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언어의 장면이나 말이 튀어나왔을 때, 평소의 저였다면 떠올릴 수 없었을 생각 같은 것들이, 시를 고민하고 문장들과 겨루고 싸우면서 불쑥 튀어나오게 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 내가 이걸 어떻게 해냈지? 하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와 잘 썼다 이런 것보다는(웃음) 그런 것들을 쥐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죠.



4. 시인님이 생각하시는 시, 시적인 순간은 어떤 건가요?


시라는 걸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버전의 답변이 가능한 질문이잖아요. 


시적인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면, 저한테는 어떤 놀라움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시적인 순간’인거거든요. 내가 알던 것을 모르게 된다거나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발견된다거나 그런 순간들. 그 발견을 했을 때 내 인식이 혹은 내가 보고 있는 세계가 바뀌는 것만 같다는 그런 감각을 느낄 때 그게 저한테는 시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맥락에서 시라고 하는 걸 이야기해보자면 결국 시라고 하는 건, 저한테는 그 놀라움을 마주하도록 만드는 도구죠. 의심을 하는 도구고, 계속 새로워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도구이고. 저한테 시 혹은 시 쓰기라고 하는 건 그렇다고 생각해요. 


쓰기일 때도 마찬가지고 읽기일 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어떤 경이로움을 만나는 순간, 깜짝 놀라게 되는 순간, 어리둥절해지는 순간, 그런 것들이 시적인 순간이죠. 그리고 그런 것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 저에게는 시에요. 그리고 그 순간에 도달함으로써 저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읽고 쓰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수치심과도 연결되어 있나요? 시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순수한 놀라움에 대한 경탄-예를 들면 자연물이나 현상에 대한 경탄-일수도 있고, 내가 수치스럽게 여겼던 무언가를 새로운 인식으로 만들어냈을 때 느껴지는 경탄일수도 있는 거잖아요. 


저한테는 약간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치심은 시작하게 되는 동인이거지, 그게 시를 쓰면서 자꾸만 염두에 두게 되는 무언가는 아닌 것 같아요. 시를 쓸 때는 생각을 잘 안 하거든요. 시를 쓰는 것은 저한테는 어떤 목적이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일이라기보다는 최대한 자유롭게 움직이려고 하는 일에 가까워서 그 순간에는 생각을 잘 안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문학이라는 양식 자체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수치심이라고 하는 것도 적절한 양식을 갖추면 괜찮아지는 것이지만, 그게 목적이라기보다는 문학을 하면서 생기는 부가효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저는 그게 목적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나 글을 왜 쓰냐하고 물으면 그건 내가 나를 견디기 위해서인 것은 맞다. 그러나 부끄러움으로부터 어떻게 되기 위해서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거죠. 


다른 인터뷰에서 시의 목적이나 메시지나 이런 부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오히려 시의 영역이라는 말씀들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럼에도 시를 쓰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일종의 지향점이라든지. 


있죠. 한 편의 시를 쓰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않지만 분명히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계속 할 수밖에 없거든요. 시를 쓸 때는 생각하지 않아도, 시에서 벗어나서는 내가 지금까지 썼던 시들 그리고 앞으로 써야 될 시들에 대한 생각들을 당연히 하게 되죠. 


시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할 것인지. 어쨌든 시는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일인데, 이 커뮤니케이션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아까 질문드렸던, 최근에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느냐는 질문이랑도 맞닿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재의 영역에서 어떤 시상이나 이미지 같은 것들이 있기도 하나요?


최근에 뭘 갖고 있다고 하면 사실 없어요. 뭔가를 항상 마음속에 쥐고 난 이 소재로 이 이야기를 할 거야 이런 게 아니라, 시를 쓰려고 시에 들어갔을 때 그저 제가 쓸 수 있는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적절한 시의 형태를 찾아 움직이는 거고. 쓰고 나왔을 때 돌아보면서 그런가 하게 되는 거거든요. 


요즘에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인 연작을 쓰고 있는데, 그 이야기로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는 그 연작을 더는 못 쓰겠다고 생각할 때까지 써봐야 그때서야 조금 명료해지거든요. 아마 그때쯤 알게 되겠죠. 저번 시즌 냈을 때는 사진이라는 걸 계속 생각하면서 썼었어요.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말씀이시죠?


네. 사진을 생각하면서 한동안 썼지만 그것도 지나고 나서야 그랬다보다 생각하게 되는 거라서,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 연작도 이게 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될 것 같아요. 



5. 7월을 맞아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책을 내주셨어요. 소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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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부끄러운 책이에요. (웃음)


이게 처음에는 여름여름한 책을 만드려고 기획한 책이었어요. 7월에 여름 이미지가 한가득인 여름여름한 책을 내자. 그런데 사실은 제가 산문 쓰는걸 좋아하거나 잘하지는 않거든요. 이번에도 쓰려고 봤더니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거죠. 여름이든지 무엇이든지에 대해서. 제가 시 외에는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더라고요. 내가 시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시인이었나 싶어서 그게 좀 부끄럽기도 했고. 결국 여름 맛이 살짝 들어간,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 되어버렸는데 그래도 시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어주시지 않을까 생각해요.


시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니, 오히려 시인 같아서 더 멋진데요? (웃음)




[시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기]



1. 등단을 하신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그동안 삶과 시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변한 부분이 있을까요?


확실히 달라졌죠. 습작하던 시기에는 시가 너무 크고 중요하고 무겁게 느껴졌거든요. 멀게 느껴지기도 하고. 얼른 시인이 되고 싶고, 시인으로 살고 싶고, 잘 쓰고 싶고 그랬는데, 점점 그게 시인으로서도 시에게도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시를 너무 무겁고 높게 여기는 일은 시를 오히려 부자유하게 만드는 일에 가까워요. 지금은 시가 그저 제 삶과 함께 가는 일인 거고, 어떤 의미에서는 시를 목적으로 삼지 말자고도 생각해요. 예전에는 시가 크게 느껴져서 시 자체가 목적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는 없고 삶을 잘 살아가게 하는 동반자이고 하나의 수단이다. 내가 삶을 느끼고 감각하고 잘 살아가게 만드는 수단이라서 그렇게 시를 무겁게 두지는 말자. 이런 생각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시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좋아하고 그런 것은 맞지만 시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조금 가벼운 마음을 가지면 시가 더 잘 써지기도 하나요? 


잘 써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웃음) 시가 목적일 때는 내가 시 자체를 생각하면서 시를 위한 시를 쓰면 됐거든요. 더 좋은 시, 더 아름다운 시, 시다운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은데 지금은 꼭 그런 감각은 아니에요. 그럼 뭘 생각해야 하냐면, 나는 시를 왜 쓰지 이걸 고민해요. 이걸 생각하는 일이 훨씬 피곤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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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출판사 카드뉴스

 

 

2. 가능하다면 내주셨던 시집을 기점으로 변화해온, 시와 삶에 대한 느낌이나 단상들을 간단히 짚어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우리가 시를 통해 대화할 수 있을까, 함께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을까, 혹은 상상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고, 시가 그것들에 작은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게 저의 변화인 것 같아요. 아직도 제가 어디까지 와있고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그럼 이번에 내신 가장 최근 책으로 이야기해볼까요?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을 쓰고 나신 후의 시인님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아까 잠깐 이야기했었지만 이 책 나오고 나서 부끄러웠다고 했잖아요. 시밖에 모르는 사람인 것 같다고. 내 삶에서 시 아닌 것들의 비중을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다른 것들을 늘려야 내 삶을 다양하고 넉넉하게 만들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이 책을 내면서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시 말고 시 바깥의 시 아닌 것들하고도 같이 잘 살아가봐야겠다. 



3.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순간은 어떤게 있을까요?


시를 쓰면 시인이죠. 언어와 말을 잘 배치하고 형식화하면 그게 시라서, 누구든지 시를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죠. 저의 가장 은밀한 소망은 전국민의 시인화. 모두가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의 가장 은밀하고 원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누구나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에요. 


어디서나 항상 시 홍보대사라고 말씀해주시잖아요. 많이 읽고 즐기자는 이야기는 자주 해주셨는데, 쓰자는 말도 하신 적이 있었나요? (웃음)


말은 안 했어요. 왜냐면 시를 읽고 좋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쓰고 싶게 돼요. 그런데 자꾸 쓰자고 하면 싫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게 좀 중요한 것 같아요. 



4. 다른 활동들이 적극적인 말하기라면, 시는 개인적인 독백에 가깝다고 말해주신 적이 있어요. 개인적인 표현들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읽힐만한 가치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게 내 이야기라는 착각을 좀 버려야 해요. 시는 고백이고 목소리인데 그렇다고 해서 자연인 황인찬이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에 대한 엄밀한 구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시를 쓸 때 말하는 내가 있고 뒷통수에서 감시하는 내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정도의 거리감이 있어야 해요. 작가 자신이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작가 자신과 가까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글을 쓰는 건 거리감을 확보하는 일이거든요. 표현하자면 나의 뒷통수를 보고 연기하는 느낌이 시 쓰기와 어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5. 미래를 바라보고 견인하며 써나가는 시가 있고, 과거를 되돌아보며 쓰는 시가 있다고 생각해요. 시인님은 이번 책에서 후자에 가깝다고 말씀해주신 것 같아요. 시가 희망이나 미래를 말해야한다는 부담은 없으신가요?


시가 그래야만 하는 당위나 필연은 없죠.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감각을 자극하는 하나의 예술양식일 뿐이에요. 그런데 동시에 시는 하나의 소통방식이라고 했잖아요. 저 개인으로서는 내가 시를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 소통이 우리에게 유의미한 소통이 되기를 바라고, 내가 갖고 있는 내 삶에 대한 생각들이 우리가 함께하는 고민들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이 정도의 감각인거고, 시를 통해 세상을 구하겠다 이런 것들을 문학에 바라기에는 어려운 것 같아요. 때론 훌륭한 누군가가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시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시 또한 우리가 소통을 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가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가는 대화가 된다면, 더 바람직하고 더 하고 싶은 대화가 될 수는 있겠죠.


그런 맥락에서는 그런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 시를 통해서 제시되면 좋겠다. 시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저 자신도 저의 글쓰기가 저만의 고백만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는 수단이자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쓰고는 있죠. 



6. AI가 작품을 만드는 경우도 있고, 창작자들도 어느 정도 활용해나가는 추세가 많은데 신기술이 접목된 문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재밌는 일이죠. 도구가 늘어나는 일에 가깝거든요. AI가 나온다고 해서 예술 영역이 대체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지금 AI가 바둑을 인간보다 잘 둬요. 그런데 바둑이 없어지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사람은 바둑을 하면서 즐기기 때문이거든요.


자동차가 있어도 여전히 달리기를 하고 마라톤을 하잖아요. 기계가 훨씬 더 잘할 수는 있지만 기술이 생긴다고 해서 예술이 위협당한다고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날 수도 있겠다. 더 재밌는 일이 많이 늘어날 수는 있겠다. 생각하고 있죠. 재밌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7. 시를 쓰고 싶다면 기술적으로 많이 배우는 게 중요한가요 혹은 양식의 제약 없이 우선 본인이 느끼는 시상 위주로 자연스럽게 많이 표현해보는 게 더 중요할까요? 예술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탁드려요.


일단 쓰는 게 재밌어야죠. 재미가 생기다보니까 잘하는데서 재미를 느끼게 되는 거거든요. 일단은 그냥 쓰면 되고, 시작해보는 게 중요하다. 전국민이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많이 표현해보고 즐겁게 많이 써보면 좋을 것 같아요. 



8. 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 것 같으세요? 대학교 1학년때 소설이 잘 써졌다든지, 졸업하고 아예 다른 삶을 살았다든지, 그런 미래를 생각해본 적도 있으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너무 빨리 데뷔해버리는 바람에 쭉 그쪽 길로 가버려서. 근데 시인이 안 됐으면 어느 시점에 안 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원래 포기가 진짜 빠른 편이라서 아마 30대까지 안 썼으면 안 썼거나 오래 쉬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 같아요. 글쎄요. 제가 무슨 일을 하게 되었을까 모르겠어요. 아마 책이나 책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문화예술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을지 막연하게 생각해요. 


제가 시밖에 모르는 재미없는 인간이 된 것도 너무 빨리 등단해버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다른 거 생각 안 하고 시를 빨리 써야한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삶에 대한 많은 옵션이 없었죠. 그래서 잘 상상이 안 되긴 해요. 그래도 책을 좋아한다는 거는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까. 



9. 스스로 생각하는 황인찬 시인의 작품세계, 혹은 시론에 대해 간략히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없으려고 하는 게 저의 태도인 것 같아요. 시론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도 뭐가 자꾸 생겨요. 시는 이래야하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게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새로운 시, 전에 안 써본 시, 스스로가 새롭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시를 계속 쓰면 좋겠다.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나의 시론은 이런 것이오. 라고 말하는 현대시는 거의 없을 것이고, 다만 시와 삶을 내가 어떤 식으로 배치하고 바라볼 것인가. 그런 생각들을 할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시가 계속 새로울 수 있다면 좋겠다.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만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 같아요.


저에게 시는 삶과 더불어 함께 가는 거라, 나머지는 제 삶과 맞춰서 함께 움직이지 않을까요?

 


시를 통해 시의적절함을 헤아리는 일은 

어쩌면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시라는 것은 때가 어긋났기에 

가능해지는 일이니까요. 

 

시대착오적인 것, 때에 어울리지 않는 것,

그리하여 어딘가 어색하고 낯선 것, 

그것은 비단 시만의 성격이 아니라

우리 삶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황인찬, <잠시 작게 고백하는 사람> 본문 중에서


 

10.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인터뷰를 여기까지 읽으러 들어오시는 분들이라면 이미 동료라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갑시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다들 서로 고생하고 있고, 포기하지 말자. 동료들한테 할 말은 그것뿐이죠. 당신 고생하는 거 나도 알고 있고 같이 열심히 합시다. 



Part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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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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