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허울뿐인 세상에서 태평성대를 꿈꿨던 이들 - 등등곡

글 입력 2024.07.25 15:5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등등곡_포스터.jpg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서울에서 양반 가문의 자제들이 무리 지어 귀신 탈을 쓰거나 무당 옷을 입고 춤을 추며 부른 노래인 ‘등등곡’을 소재로 한 뮤지컬 <등등곡>이 8월 11일까지 대학로 TOM 1관에서 공연한다. 조선 시대를 바탕으로 하지만, 현실의 우리에게도 메시지로 울림을 주는 극이었다.

 

 

[크기변환]GR8aw9Ga4AAN4dm.jpeg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섞은 ‘팩션(faction)’



1591년은 1592년 발발했던 임진왜란의 바로 직전 해이다. 당시 조선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었다. 백성은 높은 세금과 부역으로 인해 삶이 힘들었고, 전쟁 직전 불안감이 커지던 시기였다.


<등등곡>에 나오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1589년부터 시작되었던 기축옥사(기축사화)이다. ‘정여립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동인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1589년부터 1591년까지 많은 동인들이 희생되었던 사건이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정치와 당쟁의 폐해를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은 모두 유수의 양반가 자제들이자 서인이다. 특히, 진명과 경신은 동인들을 죽여 공을 세운 서인들의 자제였다. 이들은 탈을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며 뛰노는 놀이 ‘등등곡’을 함께 하는 ‘등등회’에 함께 속해 있었는데, 기축옥사 당시 동인들의 주축이었다는 ‘길삼봉’이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들린다. 길삼봉은 소문은 무성하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 존재인데, 이 소문이 시작된 이후 등등회에도 묘한 갈등이 일어난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뮤지컬을 만들어 뮤지컬 배경의 탄탄함을 더하고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구현했다. 특히 정진명 캐릭터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을 지은 정철의 아들로 나오는데, 국어 교과서에 한 번쯤 들을 수밖에 없는 실존 인물이 언급되며 사실감을 더한다. 다섯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소극장 뮤지컬에서 배경의 웅장함을 더했다.

 

 

[크기변환]GR8aYKXbwAAcTUM.jpeg

 

 

 

사람이 사람 같지 않던 시대


 

<등등곡>의 스토리 라인은 이해하기 쉽다. 같은 서인들로 구성된 등등회 중에, 사실 그 서인에 의해 집안을 잃은 인물이 숨어 있었고, 복수를 꿈꾼다. 그리고 계획이 진행되며, 등등회는 조각나고, 분리되며, 각자의 욕망을 따라가는데, 그 깨어짐과 부서짐 사이에서 드러나는 각각의 사연들이 모두 애처롭고 이해가 간다.


<등등곡>이 좋았던 것은, 여러 메시지를 주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하나의 기조를 지켰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큰 스토리 라인을 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다소 낯설 수 있는 역사적 맥락과 단어들 사이에서, 어찌 보면 단순한 스토리를 끌어 나가며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사람이 사람 같지 않던 시대’라는 메시지가 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메시지는 첫 넘버부터 전달한다.

 

 

사람이 사람 같지 않다네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랴

살아있을 때 맘껏 즐겨라

 

- M1. 등등곡 中

 

 

첫 넘버에서는 모든 배우들이 탈을 쓰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데, 도깨비 같기도 사람 같기도 한 탈의 모습과 배우들의 파워풀한 움직임은 상당히 파급력이 있다. 스산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며 이 시대를 살던 젊은 선비들의 기개를 느끼게 하지만, 세상을 비관하며 오히려 힘을 빼고 놀자는 대비되는 메시지로 인해 묘한 슬픔과 비합리적인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처럼 살다 죽는 그런 세상

진정 난 갈 수 없는가

 

- M16. 그래도 가겠다 中

 


이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와닿는 부분이 있다.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청년실업 좀비 세대, 소상공인 줄도산 우려….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서, 오히려 ‘YOLO(You Only Live Once)’와 같은 정신이 유행하고, ‘N포 세대’처럼 결혼, 출산 등 포기가 당연해진 시대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사회가 너무 힘드니 오히려 해탈하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의 꿈은 400년을 넘어 우리의 마음도 울린다.


 

[크기변환]GR8arv7a4AAY_vU_.jpeg

 

 

 

나라의 주인은 백성,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의 것


 

그러나 이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곧 백성이다. 영운, 초, 그리고 윤과 진명까지. 이들은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한다. 알량한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정, 양심, 믿음. 내 마음의 소리를 믿고 양심을 따라 행하고, 내가 행하는 이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


 

주인 없는 하늘을 네 것이라 말하랴

흘러가는 강물에 어찌 이름 새기랴

만물의 주인 없음을 사람들만 몰랐더라

 

- M5. 길삼봉이 돌아왔다 中

 


<등등곡>은 넘버가 좋다. 멜로디도 좋은데, 이를 받쳐주는 가사도 맛깔나다. ‘만물의 주인 없음을 사람들만 몰랐더라’. ‘만물의 주인 없음’이라는 표현도 좋고, 사람들‘만’ 몰랐다는 표현으로 사소하지만 포인트를 살리는 조사의 표현도 좋다. 이를 시원시원하게 불러주는 배우의 기개와 성량도 좋다.


 

“나와 뜻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길삼봉이니라”

 

- M14. 길삼봉이 돌아왔다 Rep. 전 영운의 대사

 

 

이에 어울리는,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는 대사. 드라마 <각시탈>에서 모두가 각시탈을 쓴 장면을 봤을 때처럼, 공명정대한 태평성대를 꿈꾸는 이들 모두가 길삼봉이라는 말은 감정을 고취시킨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길삼봉이 누군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서로가 길삼봉이 되어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졌던 이들의 이야기는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크기변환]GR8a379aMAAviyW.jpeg

 

 

 

‘성즉군왕패즉역적’ 이라지만


 

영화 <서울의 봄>에는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는 대사가 나온다. 성즉군왕패즉역적(成則君王敗則逆賊). 성공하면 군주가 되고, 실패하면 반역자가 된다는 것. 이는 권력에 대한 허망함이 느껴지며, 역사적 해석에 대한 공정성과 정당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끔 한다.


 

권력은 허깨비와 같으니 허깨비를 쫓다 도깨비가 되지 말라 일러라.

 

사람은, 허깨비도 도깨비도 아닌 사람이다.

 

살아 있으니 사람이다.

 

그러니 부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라 이르라.

 

- 영운의 대사


 

영운이 도망간 임금의 호위무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대사이다. 허울뿐인 허깨비를 쫓고 있는 권력자가 아닌 태평성대를 원하는 꿈은 과거에 이루어졌던가? 그 꿈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조선 시대를 통해 현대를 비추었던, 탈춤과 넘버가 신명나기도 서글프기도 했던 뮤지컬 <등등곡>이다.

 

 

 

주영지_PRESS.jpg

 

 

[주영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0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