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피스] 여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응아의 세계

우리의 내면을 마주하는 응아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글 입력 2024.07.2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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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여림'을 그리는 작가 응아


 

-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림을 그리고 있는 작가 응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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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님께서 그려내고 있는 '여림'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여림은 '여리다' 할 때의 여림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약한 마음과 생각을 '여림'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못난 자신이 각자 있어요. 그런데 세상은 '못난 자신을 수용해라, 성장하기 위해서는 못난 스스로를 직시해라'라는 상투적인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이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내가 봐도 못난 나인데,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저는 '만약 못난 내 자신의 모습이, 싫어할 수 없는 형상을 갖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작품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저의 그림을 보면 눈이 퉁퉁 부어있고 팔도 굉장히 짧은, 태아와 흡사한 형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모습도 눈물을 흘렸기 때문에 눈이 부어있는 것이거든요. 즉, 결국 누가 봐도 약한 모습을 갖고 있지만 싫어할 수 없는 형상을 그려내어 그 이미지 안에 우리가 갖고 있는 여림에 대입시키고, 그로 인해 스스로의 여림까지 빗대어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싫어할 수 없는 형상'이 굉장히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싫어할 수 없는 형상'이란 어떤 형상인가요?

 

저의 미학 자체가 불완전하고, 피어내지 못하였으며, 정형화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형상을 띠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연민이 담길 듯한 형상을 좋아하죠.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절대적인 미가 아닌, 측은지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연민으로서 빗대어 투영할 수 밖에 없는 형상을 그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싫어할 수 없는 형상이라고 생각해요.

 

 

- 연민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주관적인 시선이 담겨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연민을 느끼는 대상이 다르니까요. 작가님께서 표현하는 '연민'은 어떤 연민인지.

 

굉장히 긴 이야기에요. 하하.

 

첫번째로, 다른 작가님들처럼 저또한 창작을 하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특히나 약한 모습을 그려내다보니 그 과정에서 저의 약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저 스스로를 굉장히 싫어하는, 스스로의 1호 안티 팬이었어요.

 

저는 저에게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자학하고, 깊은 땅굴을 팠죠. 그런데 제가 원하는 저의 모습은 외부적인 자극 ㅡ 즉 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부터 의연한 것이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게 되니까 저의 이상과 현실에서의 괴리감이 정말 크게 다가왔어요.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에 대해 생각하며 그 괴리감 속에서 스스로를 굉장히 싫어했던 케이스였죠.

 

두번째로, 저는 타인으로부터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듣는 편이었어요. '이것이 서운하다'거나 '이로인해 내가 슬프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유년기 시절의 저는 좋은 피드백을 듣지 못했죠. 저의 의견이 수용당한 경험이 정말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저의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종이에 적어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처음에는 종이가 저의 감정을 토해내는 창구였어요.

 

그런데 어느날, 제가 어떤 친구에 대한 힘든 점이 있어서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저의 그림을 보더니 '그림이 예쁘다'고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저에게 그 그림은 친구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는데 이 친구는 그 그림을 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 것이죠.

 

그때 저는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어요. 저는 말하지 못하는 것을 그림은 말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자유를 느꼈죠.

 

또, 세번째로 저는 '내가 혼자 있을 때 왜 내 곁에는 아무도 있어주지 않을까'라는 사실에 대하여 결핍을 많이 느꼈어요. 그런데 그림을 통해 '내가 나 스스로의 곁에 함께 있어줄 수 있구나, 나의 성장한 자아가 나의 여린 자아 곁을 지켜줄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그린 그림을 통해서 저 스스로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죠.

 

이러한 세 개의 과정은 '그렇다면 나의 그림이 나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듯, 내 그림이 타인을 위로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그렇게 저는 연민과 여림을 담아내게 된 것 같아요. 나의 여린 자아를 품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여러 상징적인 요소나 자연물에 빗대어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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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님께서 어떻게 창작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적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와 더불어 외적인 이야기도 함께 듣고 싶습니다. 과거에는 대학 진학을 안하고 바로 3D 캐릭터 디자이너로 회사에 다니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회사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입사하게 되었다고요. 올해로 23세이신 작가님께서 벌써 이렇게나 많이 남겨오신 발자국들을 되짚어보고 싶습니다.

 

저의 외부적인 것들은, 사람들은 그림과는 밀접한 관계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저는 정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반갑네요. 하하.

 

저는 문화예술과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전라남도 여수에서 태어났어요. 19년 정도를 그곳의 토박이로 살았죠. 예전부터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요. 저의 인생에서 그림을 배웠던 시기는 딱한 번,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미술 방과후였거든요. 하하.

 

그렇게 그냥 그림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저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미대를 진학할지, 아니면 특성화고에 가서 취업을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죠. 그 고민이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크게 제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사례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보통 일반고교를 진학하면 미술대학 혹은 미술학과를 가기 위해 성적을 위한 입시 학원은 기본이고, 미술 입시 학원도 다녀야 하잖아요. 또,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등록비와 자취 비용 등이 정말 무수하게 많이 들어가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지원을 받기에는 부담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처음에는 조금 등 떠밀리듯이 특성화고 진학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빚을 지더라도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다 지원해줄테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라" 라고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진정 제가 어느 길로 향하는 것이 저에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특성화고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저의 그림체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저는 지금의 그림체를 설립했거든요. 그런데 일반 고등학교에 가서 입시 미술을 한다면 결국 대학 합격을 위해서만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저의 고유 그림체는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저의 그림을 지키면서 실무를 경험하자는 생각에 특성화고를 진학하게 되었죠.

 

특성화고에 진학한 이후 3년 동안 저는 정말, 정말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 덕분에 성인이 되기 전인 19살이었던 해 10월에 일찍 취직할 수 있었고, 천안에서 재직을 했죠. 그런데 회사에 들어간 이후로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저는 그 시기가 아니었다면 제가 작가로 전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 선택하고, 나아가고 있는 길에 비해 회사에 재직하는 것이 안정적이니까요. 굳이 바꿔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 같고, 그렇다면 그냥 기존의 길을 계속 선택했을 거에요.

 

그런데, 저는 첫 취업에서 굉장한 블랙기업을 만났어요. 모든 이야기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간단한 사례를 딱 하나 말씀드리자면 성인이 되기 전에 주 40시간 근무 이외의 추가 근무만 130시간을 했고, 그 마저도 야근 수당을 밀려서 5개월이나 늦게 받았어요. 하하. 그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결론적으로 저는 퇴사를 선택하게 되었죠.

 

그 때가 정말, 제가 성인이 되고 나서 겪은 암울함의 극치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까지 취업이 정답인 줄 알고 있었고, 그것만을 위해서 정말 긴 시간을 꾸역꾸역 달려왔으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시간들이 무슨 가치가 있었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되고, 저의 동기들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저만 멈춰서있는 느낌에 정말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문득 제가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의 다이어리를 보니까 정말 희망적인 글이 적혀있었어요. 그렇다면 그 글을 곱씹으며 다시 일어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저는 매년 1년 후의 저에게 스스로 편지를 써요. 제가 퇴사를 한 것이 12월 4일 정도였고,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 1월 1일이 되었어요. 1년 전의 저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죠. 

 

그런데 그 편지를 읽으니까, 과거의 저는 지금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서 고민과 걱정을 했는데, 그 편지 안에 그 해답이 전부 들어있었던 거죠. 그 편지를 통해 저의 방향성을 다시 설립할 수 있었고, 몇 개월이라도 좋으니 작가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첫 단체전시를 신청했는데 선정될 수 있었죠. 그때 물꼬가 트였다는 느낌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응아가 그려내는 여림의 세계, 여림의 아름다움


 

- 예전 그림과 현재 그림의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담겨져있었다면 지금은 그보다 희망적인 그림이 많은데, 신경의 변화 혹은 환경의 변화가 그림에 영향이 있었는지.

 

과거에 그렸던 저의 그림들은 '토해내는 그림'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를 인지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였다고 생각했죠. 저의 상태를 그림에 담아내고, 그로 인해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상태구나'라는 것을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의 '힘듦'을 인지하고 나니 스스로가 왜 힘든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어요. 사실 기분이 안좋을 때 '내가 이런 것 때문에 기분이 안좋구나'를 인지하기만 해도 기분이 많이 해소되거든요. 

 

제가 창작을 계속 해나갈수록 창작을 들여다보는 만큼 저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품을 수 있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게 저의 작품 안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처음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창작의 취지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처음에는 그저 저의 이야기를 담는 것에 급급했거든요.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해 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저도 저 스스로를 바라보고 품어줄 수가 있으니 시선이 외부로도 향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창작을 하는 과정에서 나의 창작이 어떻게 하면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와 함께 어떤 사람이 지금 어떤 공간에서 힘들어하고 있을지에 대한 것들을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스토리텔링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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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님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시는 작품을 하나 말씀하신다면?

 

하하, 애착이 가는 작품들이 정말 많이 지나가네요.

 

저의 작품 중 <당신의 가치>라는 그림이 있어요. 한 사람이 거울을 마주보고 있고 뒤에 나비가 그려진 그림이에요. 그 그림을 그리며 저는 처음으로 '나의 그림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원래, 리메이크 하기 전의 그 그림은 굉장히 슬픈 분위기의 그림이었어요. 멍도 많고 상처도 많은 그림이었죠. 그 그림을 그리던 당시의 저는 저의 감정이 너무 버거웠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한 그림이었어요. 스스로를 위로하겠다는 취지는 전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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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그림을 그리고 나니, 그림 속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내가 굉장히 슬픈 듯이 울고 있는데, 저에게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정말, 직접적인 위로를 받는 것 같았어요.

 

원래 그 그림을 그릴 때에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 원래의 나는 상처가 없는 모습이지만 내가 보는 거울 속의 나는 상처가 많은 모습이었던 것을 표현해내고 싶었어요. 저 스스로는 스스로를 굉장히 상처받고 못나고 매일 울고 있는 처량한 모습으로 비추어보는 거였죠.

 

그런데 정작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그리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 않거든요. 거울 밖의 내 뒤로 나비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는 더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는 이야기를 그림의 주제로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그림을 그렸던 순간이 제가 주체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위로를 인지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제일 애착이 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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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님의 작품 속 인물은 모두 나체로 존재해요. 실제로 작가님께서는 내면의 감정을 나체의 상처로 표현하셨다거나 그림 속 인물의 모습을 '태아'로 표현하신다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처음에는 저의 그림에 대해 '태아'라는 생각을 별로 안했는데, 제가 스스로의 창작에 대하여 단단함을 갖게 되고, 저의 그림을 '여림'으로 확실하게 정페화를 한 뒤 태아라는 모티브를 그림 안에 녹여내기 시작했어요.

 

태어날 때 우리는 온전한 나체로 태어났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후 '벗겨져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하지만 그 '벗겨진' 모습이 사실상 원본의 모습이죠.

 

저는 고등학생 때 동아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에도 제가 저의 내면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내면을 그리면서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스스로에 대한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본인을 직시하는 과정에서 옷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거죠. 굳이 옷을 차려 입지 않아도,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필수 조건이 굉장히 충족되는 온전한 상태를 저는 그리고 싶어요.

 

또, 그림적인 면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시선을 빼앗을 요소를 없앤 것도 있어요. 스스로를 직시할 수 있는 요소 외의 다른 것들은 최대한 배제한거죠. 어떤 것들이 들어가면 그림이 굉장히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제 작품의 취지와는 반하니까요. 저는 그저 사람들이 '자신의 여림'을 수용할 수 있는 창구로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옷을 벗은 상태로 그림 속 인물들을 그리고 있어요.

 

 

 

우리의 세상은 기울어지고 있다, 도서 <기울어지는 세상>


 

- 진행하셨던 펀딩에 대해서도 한 번 언급하고 싶습니다. 펀딩 도서 <기울어지는 세상>을 소개하는 문구가 특히 인상 깊었는데. '기울어진 세상을 발견한 사람만이 이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며 판매자가 구매자에 대하여 제한을 둔 설명이 도전적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펀딩을 진행하며 다양한 펀딩 페이지를 분석했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펀딩 페이지가 '이 작품은 이런 장점이 있다'고 구성되어 있었죠. 하지만 막상 저를 매료시켰던 펀딩 작품은 페이지를 내릴 수록 작품 안으로 제가 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느낌을 살리고 싶었죠.

 

그 문장 외에도 다수의 문장들이 첫 소개에 담겨있는데, 그 문장들은 전부 처음 책을 열었을 때 마주하는 동의서 안에 수록된 문장이에요. <기울어지는 세상>을 담은 책이었기에 정말 세상 그 자체를 배달하는 느낌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연도와 서명을 함으로서 이 세상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보증서를 함께 보내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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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첫번째 문장인 '기울어지는 세상을 발견한 이들만이 소장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이야기하는 '기울어지는 세상'은 두 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요. 첫번째는 이 책이고, 두번쨰는 저희 세상이죠.

 

저는 정말 천천히, 하지만 명백히 세상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그리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서는 홍수로 인해 물난리가 았지만 어떤 지역은 단수일 때가 있잖아요. 또, 저는 코로나-19가 인간이 야생동물의 바운더리를 계속 줄여나가고, 야생동물과의 거리가 가까워져서 일어난 인수공동방위권이라고 생각해요. 코로나-19 이후 원숭이 두창이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자 저는 그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죠.

 

그런데 사실 세상의 다수의 사람들이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잖아요. 한국의 날씨에 대해서도 '원래 덥다' 혹은 '원래 춥다'라는 등의 '원래'라는 단어를 활용해서 설명하죠.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잖아요. 명백히 환경 문제로 인해 한국의 날씨는 변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시그널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애써 그 시그널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죽기 전에 책을 만든다면 환경을 주제로 해서 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렇기에 이렇게 세상이 기울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 책을 소장할 수 있다는 문장으로 이 책을 시작하게 되었죠.

 

이 문장 외에도 다른 문장들을 정리하자면 '지금까지의 기울어짐에 대해서는 우리가 개입할 수 없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 이 도서는 굉장히 작은 존재에서 시작해서 점점 그 시각을 확대해나가죠. 이러한 구성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작은 존재에서 큰 존재로 확장되는 개념 자체를 깨달았던 계기는 제가 '괴리'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식당에 갈 때 일회용품을 줄 때가 있잖아요. 이것이 가게의 입장에서는 배려가 될 수 있지만 저에게는 배려가 될 수 있죠. 또, 저희 아버지와 큰아버지께서 고깃집에서 일하고 계세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본가에 내려가면 '수고했다'고 말씀해주시며 저에게 고기를 내어주세요. 그런데 그 모든 행동이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 사랑이 어떤 생명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저는 굉장히 큰 괴리를 느끼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실 이 모든 것이 아주 작은 일들이잖아요. 그냥, '고기를 내어주시는구나' 생각하고 잠깐 멈칫거리고 말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작은 점에 집중하다 보면 점차 큰 것들이 보이게 되어요. 그래서 이러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경험들을 이 책 안에 대입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 10개의 이야기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말씀해주신다면?

 

<조그마한 틈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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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었던 칼럼 중 '눈 깜짝할 새'라는 제목의 칼럼이 있는데, 새가 유리창에 충돌하는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거든요. 지금도 몇 마리의 새들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인해 죽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죠.

 

또, 제가 봤던 콘텐츠 중 생태통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콘텐츠가 있었어요. 고속도로를 만드는 것이 사람의 피부에 칼을 긋는 것과 빗스하다면, 생태토로는 그 위에 밴드를 붙여주는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지막으로, 도시에 있는 수풀 들도 인간의 편의와 시각적 미를 위해서 조경이 된 것들이잖아요. 하지만 그 안에서도 동물들은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렇게 인간의 편의로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환경문제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환경을 조성해서 삶을 살아가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그마한 틈새>는 지금 제가 환경과 관련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가장 많이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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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안에 작가님께서 굉장히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고 도전했다고 생각하는데, 언급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맞아요.

 

예를 들어 책을 넘길 때,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록 차츰차츰 이 책 안에 있는 세상은 기울어지고 있고 색도 점점 빠져요. 또, 제가 이 책 안에 QR을 넣어놨어요. 제가 직접 만든 애니메이션인데, 이 책 안의 세상은 단순히 책의 세상이 아닌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한 인칭 전환을 표현한 애니메이션이에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현재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각에 조금이나마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단순히 우리가 폭죽놀이를 하며 즐거워할 때 굉장히 많은 새들이 떨어져 죽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새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생명체였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마무리 지으며



- 2022년, 응아의 방향성을 확립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셨었어요. 그 당시의 응아는 어떤 방향성을 추구했었나요?

 

그 당시의 저는 당연히 지금보다 많이 흔들렸던 사람이었고, 특히 그 당시에는 사실상 제가 저의 그림으로 작가 생활을 수 년동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어요. 주위의 분들 중 관련 업계 종사자 분들이 계셨다면 그분들을 보며 저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제 주변에는 작가, 예술가들이 아예 안계셨거든요.

 

그런데 말씀해주신 2022년에 첫 전시를 하고, 처음 작품 판매를 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다른 작가님들, 예술가 분들을 만나게 되었죠.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나도 작가로 활동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때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의 작품이 예쁨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회사를 퇴사하고 첫전시에 참여하기까지 계속해서 한 고찰이 있었는데, 바로 제가 작가로서 돈을 벌 수 있는지였어요. 저는 저의 작품을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게 다가갈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했죠. 다른 작품들을 많이 보아야 저의 그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스스로 내릴 수 있는데, 저에게는 그러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저 스스로가 '우물 안의 개구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남동에서 전시를 했을 때, 그곳에서 지나가던 외국인 분께서 다른 작가님과 눈맞춤을 하시더니 전시장 내부로 들어오셨어요. 그리고 저의 작품을 보시더니 저의 작품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피드백을 하며 작품의 가격을 여쭤봐주셨죠. 이후 가격을 들은 뒤 전시장을 나가셨지만, 다시 오신 뒤 저의 작품이 계속 생각이 난다, 그런데 내가 지금 당장은 현찰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 일정이 전시가 끝나기 전에 있다, 그러니 내일 내가 현찰을 들고 오면 바로 판매가 가능하냐고 여쭤봐주셨어요.

 

그분과 대화를 나눈 뒤 저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어요. '나는 지금 내가 평생 행복할 것을 지금 다 끌어다 행복한 것 같다, 현실감이 없다'고 엉엉 울면서 이야기했죠. 그 친구가 저와 진짜 막역한 사이의 친구인데, 이후 그 친구의 집에 가서 펑펑 울고 있는 저를 보며 그 친구기 해준 이야기가 '아니야, 너의 행복은 지금 시작 된거야'였어요.


이러한 일화들을 겪고 나는 제가 작가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현실적인 동기들을 쌓게 된 것 같아요.

 

 

- 그렇다면 그때 추구했던 방향성으로부터 2024년의 응아는 어떻게 도착해있는 것 같나요?

 

저는 작가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해요. 첫번째가 많은 이들이 익히 알고 있는 금전적인 것이죠. 그리고 두번째가 마인드 적인 것이고요.

 

우선, 두번째인 마인드 적인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리자면 앞서 말씀 드린 첫 전시를 하고 1~2개월 사이에 저는 제 작품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막연한 확신이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닌,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뚜렷한 자신감이 생겼죠. 그 과정에서 제가 갖고 있는 장점에 대해 많은 분석을 해서 마인드적으로 세팅을 하게 되었고, 그때 월등히 성장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첫번째, 금전적인 부분은 물론 별로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진관 리터칭 알바를 하거나, 운동 대회 사진 기사 일 등 여러가지 일을 전전하며 생계 유지를 해왔어요.

 

그런데 저는 이 과정에서 하게 된 생각이 있어요. 저는 금전적인 것보다는 작가를 유지하며 마인드적인 것을 더욱 중요시 생각한다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마인드적인 부분은 작품을 인지하는 자신감도 있겠지만, 요동치는 수입에 대한 심리적인 줏대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 당시 금전적으로 부족한 과정에서 저는 저의 수입에 대한 줏대를 인지하고 생성한 것 같아요.

 

저는 일직선상에서 두 개를 다 경험해봤잖아요. 직장을 다녔을 때와 직장을 다니지 않았을 때를 말이에요. 직장에 다녔을 때 저의 경제력은 분명히 올랐지만 창작력은 떨어졌어요. 하지만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지 않은 저는 경제력이 정말 급감했지만 창작적인 부분에서는 수직상승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봤을 때 저는 돈이 없더라도 창작을 선택하고 싶었어요.

 

또, 주변 어른분들께서 이러한 부분에 대해 걱정을 하실 때이면 '저는 어리잖아요, 괜찮겠죠'라고 이야기하며 방어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방어를 했을 때의 저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 지출을 줄여도 오직 3개월만을 버틸 수 있는 생활비밖에 없었던 때이거든요. 이 모든 것을 복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제가 하게 된 생각은 '이 순간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였어요. 금전적인 것을 제가 잘 다룰 수 있게 되는 것만을 해도 저는 제가 월등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임을 알고 있었어요.

 

최근의 저는 작가로 활동을 하며 서울일러스트페어에 참여하고, 다른 작가님들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그러면서 최근의 3개월간은 직접적인 창작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간접적인 창작을 통해 생계 유지를 하고 있죠. 저는 이렇게 제가 가능한 것이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기간 동안 다져놓은 심리적인 단단함이 현재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요.

 

 

- 앞으로의 작가님의 목표는?

 

사실 저는 창작에 애착을 갖는 만큼 힘들고 싫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향후에도 계속 창작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언도 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끊임없이 여림을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면서 저와, 타인의 여림을 들여다보고 포용할 수 있도록 시선을 맞추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저는 작가라는 존재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콧대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번 서울일러스트페어에 나갔을 때도, 제 부스에 멈추고 저의 그림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제가 싸인을 다 해서 드렸어요. 그러면 그분들께서는 사실 굉장히 놀라시거든요. 그리고 저도 그 반응을 어느정도 공감해요. 제가 생각했을 때도 작가라는 존재는 유니콘같은 존재라는 느낌이 있고, 세상과는 동떨어진 속세에서 거리감있이 자신의 창작을 할 것 같은 느낌이잖아요. 하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작가는 그저 창작이라는 언어를 하나 더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작가와 팬의 관계가 '나 작가야'라는 콧대 높은 존재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해요. 그래서 저는 팬분들께 항상 말씀드려요. 만약 제가 나중에 규모가 있어져서 팬분들께 소홀해진다면 저에게 혼쭐을 내주시라고요. 하하.

 

저는 여러분에게 받은 사랑을 많이 갖고 앞으로도 여러분을 만날 수 있도록 준비를 많이 할테니,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항상 함께 합시다. 하하.

 

 

[김푸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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