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난 전쟁과 자본, 권력, 통제를 거부한다 - 리얼 뱅크시 전

은둔 예술가 뱅크시의 숭고한 저항
글 입력 2024.07.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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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르르르르르르르륵’


2018년 10월,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림 한 점이 경매 낙찰 순간 선형으로 갈려나간다. 순식간에 그림 절반이 갈라진다. 15억원의 가치를 지녔다고 ‘방금 막’ 평가받은 그림의 최후가 이럴 것이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막을 수 없었다.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찰떡같이 들어맞는 현장이다.


액자 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숨겨져 있던 파쇄기가 작동한 탓이다. 자애로운 파쇄기는 그림의 딱 절반만 갈라놓고 영면한다. 경매 현장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머리에 손을 짚고 절규하는 사람, 눈썹이 이마 끝까지 올라갈 정도로 놀란 사람, 대 SNS 시대에 걸맞게 이 진귀한 광경을 놓칠 수 없다며 스마트폰을 든 사람까지.


무엇보다 이 그림을 제작한 작가의 충격과 공포가 더 컸을 터.(낙찰자의 허탈함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작가가 경매에 올라간 자신의 작품이 낙찰 즉시 훼손되는 모습을 보고 제정신일 수 있으랴.


서로서로 눈치만 주고받는 현장. 급하게 투입된 경매장 관계자들이 액자를 들고 경매장을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 순간,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다. 고함과 분노가 휘몰아쳐도 모자란 현장에 환호와 박수라니? 이건 무슨 일일까.

 

 

 

파괴된 작품, 파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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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뱅크시 당했다" - 알렉스 브랜식, 소더비 유럽 현대미술 책임자

 

 

작품 이름은 <풍선과 소녀>. 작가는 은둔의 예술가로 알려진 뱅크시.


뱅크시는 영국 출신의 그래피티 예술가로 그의 얼굴은 알려져 있지 않다. 관련 정보도 극소수다.


그가 철저히 자신을 숨기는 것과 별개로 작품 하나하나의 의미는 직접적인 편이다. 마치 대비가 극명한 흑백 작품을 보는 것 같다. 뱅크시 본인이 어두컴컴한 그림자 뒤에 숨어있다면 자신의 그래피티 작품은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에 대놓고 전시한다. 안 그래도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그의 작품은 이런 특성 때문에 주제가 몇 배 이상 강조된다.


뱅크시 본인과 작품의 관계도 그런데 작품 자체의 성질 또한 이와 유사하다. 대비가 극명한 두 요소를 하나의 공간에 들여놓는데 그 묘한 이질감이 작품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낸다. 너무나 선명해 눈부실 정도다.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으로 자본에 찌든 현대 사회를 비판한다.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고 폭력과 전쟁에 대항한다. 뱅크시의 작품은 이러한 ‘메시지’를 항상 담고 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풍선과 소녀> 파쇄 사건을 바라본다면 경매장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파쇄기의 주인이 바로 뱅크시였으니 말이다.


소더비 유럽 현대미술 책임자인 알렉스 브랜식은 이 사건을 두고 “현대 미술 시장의 거래 관행을 조롱하고 예술의 파괴와 자율의 속성을 보여주려 한 기획”이라고 얘기한다. 한마디로 뱅크시가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거다. 그것도 자기 작품을 걸고.


사건이 있고 난 직후 뱅크시는 자신의 SNS를 통해 “파괴의 욕구는 곧 창조의 욕구”라고 말했다. 자신이 제작한 작품을 자신이 파괴하는 행위로, 그것도 평범한 장소가 아닌 경매장에서 그는 또 한 번의 예술을 실현했다. 예술계의 역사에 진한 스프레이 페인팅을 남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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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컨트롤이 검증한 전시, <리얼 뱅크시>



‘그라운드 서울’은 역사 속 뱅크시의 잔흔 130점을 긁어모아 오는 10월 20일까지 <리얼 뱅크시> 전을 개최한다. 작품은 모두 뱅크시가 직접 설립한 ‘패스트 컨트롤’이 검증했다고 한다.


뱅크시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풍선과 소녀>를 비롯해 <꽃을 던지는 사람>, <디즈멀랜드>, <잭앤질>, <펄프 픽션> 등의 인기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 첫 섹션에서 우리는 전쟁과 난민을 주제로 그린 뱅크시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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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은 하나같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방탄복을 입고 뛰어 노는 어린 아이들, 폭탄을 꽉 껴안고 있는 소녀, 웃음으로 위장한 날개 달린 군인, 리본 쓴 헬리콥터.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다. 하나같이 안 어울리는 것들끼리 붙여놨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이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분명 지구 어딘가에는 갑자기 날아드는 총알에 대비하기 위해 방탄복을 입고 뛰어 놀아야 할 정도로 위험에 처한 어린 아이들이 있다. 불발탄을 바위처럼 여기며 동고동락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고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군인도 있다. 하늘의 수호자인 헬리콥터가 재앙을 퍼붓는 기계 병기가 되기도 한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그 일이 없던 건 아니라는 크나큰 진실을 또 한 번 마주한다. 제 삶을 잃고 탐욕과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떠올린다. 뱅크시의 작품은 그렇게 내 눈앞의 장막을 거칠게 걷어버린다. '제발 저 앞을 봐!'라고 외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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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2 작품들은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든 자본주의를 다룬다. 소비사회에 중독된, 필요를 위해 소비하는 게 아닌 쾌락을 위해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아낸다. 공급과 소비의 논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더불어 뱅크시는 예술작품이 자본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걸 경계했다. 작가의 명성이 돈을 부르고 이 돈이 또 작가의 이름값을 높이는 무한 궤도에 격렬히 저항했다. 앞에서 살펴본 <풍선과 소녀>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섹션 2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건 GDP 프로젝트다. 우리가 아는 ‘국내 총생산’의 그 GDP(Gross Domestic Product)가 맞다. 주로 경제 규모와 성장률을 다룰 때 쓰는 단어를 뱅크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뱅크시식 정의에 따르면 GDP는 ‘영국에서 나온 재활용 자원들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한 후 그 모든 수익을 난민을 위해 쓰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국내 총생산) 후 재분배’인 셈이다. 뱅크시가 아니면 누가 이런 프로젝트를 떠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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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 3는 권력과 통제에 저항하는 작품들을 전시한다. 뱅크시는 전시에서 권력과 더불어 권력이 장악한 미디어를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힘을 얻은 거대 권력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과거의 권력가들이 순수한 무력과 강력한 통제로 이를 실현했다면 오늘날의 권력가들은 현대판 무력인 법과 ‘선(善)’을 강조한 질서로 목표를 이룬다. 약자를 지키기 위해 사용돼야 할 법과 질서를 무기 삼아 불편한 진실을 불법과 무질서라 규정하고 싹을 잘라버린다.


권력가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대중의 눈과 입이 돼 주는 미디어를 장악한 뒤 국민을 감시한다.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언론은 부패 권력과 결탁해 위가 아닌 아래로 총구를 겨냥한다. 통상 이런 사례는 독재 국가에서 주로 발생했지만 이젠 멀리서 발견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뱅크시가 보았다면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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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섹션 4에서 뱅크시는 앞서 살펴본 모든 섹션들의 사례가 악화되지 않기 위해선 지금 당장 움직이는 게 필요하다고 외친다.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을 판 돈을 여러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게임 체인저>를 판 돈으로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지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지중해풍경>을 팔아 그 수익을 장애인 재활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민간인 드론 공격>으로 20만5000파운드를 모금해 무기 거래 반대 운동과 인권단체인 리프리브에 나눠 전달하는 한편 <디즈멀랜드> 수익금은 난민피난처 설계처에 기부했다. 이 외에 뱅크시는 <무기를 골라라> 판매금 20만 파운드를 러시아 예술단체 보이나에 기부했고 <깃발> 판매금 16만5000파운드를 시각장애인 지원 단체 사이트세이버스에 기부했다.


뱅크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군, 이라며 전시장 밖을 나가려던 순간, 뜻밖의 장면을 보았다. ‘EXIT THROUGH THE GIFT SHOP(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이라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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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는 뱅크시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영화로 예술과 자본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현대의 전시관이 출구 직전에 선물가게를 만들어 놓는 모습을 비판한다. 상업화를 거부하는 뱅크시의 가치관이 드러난 영화인데, 아이러니하게 이번 전시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출구 직전에 선물가게가 있는 모습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뱅크시의 인증을 받은 작품만 들이고 전시 기획은 뱅크시가 직접 하지 않았기에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싶다. 예술계도 살고 관람객도 좋은 설계인 건 맞지만 이번 전시에서만큼은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어쩌면 나의 바람이 조금 과했던 걸까.

 

 

[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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