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털어버려요 얼룩도, 고민도 -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묵은 고민은 빨래방에서 깨끗하게 없애버려요
글 입력 2024.07.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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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달에 한 번, 가끔 교보문고에 간다. 좋아하는 에세이와 자기계발 코너, 커리어와 관련된 마케팅 홍보 코너를 둘러보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삭제된다.

 

걷다 보면 전체 베스트셀러들이 전시된 책장을 꼭 지나치게 되는데 거기서 오랜 기간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을 봤었다. 요즘 유행하는 표지 디자인 감성에 알맞게 소박하면서 귀여운 그림과 폰트 정보가 궁금해지는 타이포그래피가 좋아 이 책은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곤 했다.

 

그런 유명 베스트셀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이 뮤지컬로 다시 태어났다. 경북 출장이 있었던 날이었지만, 뮤지컬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 피로를 느끼지 못한 채 혜화역을 찾았다. 저마다 말 못 할 깊은 고민이 있는 빙굴빙굴 빨래방의 등장인물들. 그들은 모두 연남동 빨래방의 연두색 다이어리를 통해 연결된다.


게스트 하우스에 가면 읽는 재미가 쏠쏠한 방명록같이, 빨래방에도 연두색 다이어리가 있다. 털어놓을 곳이 없어 점점 무거워지는 고민을 떨쳐 내고자 익명의 연두색 다이어리에 푸념을 쓰면, 그 글을 발견한 누군가 애정 어린 조언이 담긴 답글을 단다. 정체 모를 사람이 건넨 위로에 다시 나아갈 힘을 얻게 되는 등장인물들.


진돗개와 사는 독거노인, 관객 없는 버스킹 청년, 육아 스트레스에 경력 단절로 고민인 엄마, 만년 드라마 작가 지망생, 데이트 폭력 피해자, 반짝이는 성형외과 명패 뒤에 숨겨진 기러기 아빠의 애달픔. 주요 인물의 상황들은 요즘 우리나라 현대 사회의 어두운 모습이 잘 투영돼 있었다.


뮤지컬의 메시지 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단연 할아버지였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관록과 지혜의 결과일까. 일과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엄마, 가장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는 아빠에게 자연의 섭리와 자신의 경험을 인용해 위로한다.


"흔들리는 나무가 오히려 뽑히지 않고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땅속 토양 박테리아의 항우울제와 같은 역할을 해 화분을 키우다 보면 내가 화분을 키우는 건지 식물이 나를 기르는 건지 헷갈리게 됩니다" 같은 이야기는 주변 환경에 상처받고 어떻게 나를 돌봐야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지 방황하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어 줄 이야기다.


뮤지컬을 보면서 맞지 않는 회사에 매일 같이 울며 퇴근하고 차라리 사고가 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버스에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5분 정도의 길이 당시에는 도축장 끌려가는 소의 마지막 길 같았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어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아이유의 비밀의 화원' 같은 노래만 주야장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노래 '도망가자', '비밀의 화원'과 뮤지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속 연두색 다이어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뮤지컬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곡에서 누구나 필요하다는 '자기만의 바다'도 마찬가지다. 도망간 그곳, 비밀의 화원, 다이어리 속 활자, 자기만의 바다에는 어떤 상황에도 나와 함께 해주는 당신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완벽할 수 없으니 언제든지 슬프면 울거나 기대도 된다고 말해 준다.


<누구나 목 놓아 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다가 필요하다. 연남동에는 하얀 거품 파도가 치는 눈물도 슬픔도 씻어 가는 작은 바다가 있다>는 뮤지컬 내레이션처럼, 우리에게는 마음껏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마음의 찌든 때를 벗기고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정비하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상쾌한 비누 냄새가 맡아지고 건조기에 이제 막 돌린 듯한 따끈따끈함이 느껴지는 기분이다.


뮤지컬의 재미 면에서 보았을 때는 멀티남의 역할이 컸다. 멀티남은 드라마 메인 작가, 남편, 동네 할아버지, 데이트폭력 남친, 동료 의사, 후배 의사, 배달 라이더 등 공연 속 수많은 조연을 연기한다. 성공한 반복 개그 같다랄까. 어느 순간 멀티남 배우가 나오면 공연장에서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메인 작가 역할에서는 심금을 울리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 만년 작가 지망생인 여름에게 "넌 필 거야. 네 계절에. 넌 분명 꽃이거든"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연남동 빙굴빙굴 뺄래방은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어른이 미숙함에 허덕이는 초년생에게 '네가 걱정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야. 너는 분명 할 수 있어'라고 계속해서 다독인다. 20대 중후반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던 공연이었다.

 

나와 같은 청춘들 혹은 쌓여 가는 고민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번 공연을 추천한다.

 

 

[이도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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