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영상 편지를 보냅니다.

이 순간을 보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글 입력 2024.07.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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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영 어색해서 아트인사이트에 올라온 최근의 자기소개 글을 모두 정독했다. 필자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는 삶의 방식과 살아온 흔적을 훑으며 과연 내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렇게 스스로 드러낼 기준을 정하고 곱씹으며 무엇을 내 삶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 글은 내 기준에서 엄격하게 고르고 가려낸 글이다. 고운 체로 불순물을 걸러내고 여과하여 순수한 결정체만을 당신에게 선보인다.
 
 
 

과거로부터


 
나는 다소 염세적인 사람이다. '염세적'이라는 단어의 뜻은 “세상을 싫어하고 모든 일을 어둡고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어떻게 세상을 싫어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회적인 존재로 태어나 어떻게 모든 일을 어둡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의 시선에선 의아하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에 대한 기대도 낮고, 그 속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기대도 낮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방비하게 뻗어오는 사회의 흔적에서 상처를 덜 받으려면 주도적으로 갖출 수 있는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것에도 쉽게 기뻐하고 사소한 것에도 베이기 쉬운 것이 나의 마음인지라, 자아를 가진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생존 방법이 되었다.
 
이것은 스물한 살에 묻지마 폭행을 당하면서 심화한 경향도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어려워졌다. 개방된 장소에서 신체의 일부분인 등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 꺼려진다. 내 약점이 드러내지는 것을 극심하게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겁고도 개인적인 얘기를 왜 꺼내느냐 하면, 뇌에서 불안과 공포를 담당하는 편도체는 역치 이상의 자극을 받았을 경우 과활성화된다고 한다. 이후 기억을 상기시키는 자극이 올 때마다 편도체는 과하게 작동하고, 기억의 중추인 해마는 활동이 줄어들어 자극을 곧장 위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당시 사건을 기준으로 이후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잘못 설정된 사고 회로를 고치는 방법 중 하나는 다시 그 기억을 꺼내서 내 삶이 괜찮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어려운 얘기를 한 번 토해내 보았다. 내 삶은 아직 괜찮다고. 남은 날을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기에는 주어진 날들이 아직 많이 있다고.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삶에 있을 목표나 비전과 같은 거창한 이유를 찾곤 했다. 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질문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내가 세상에 나온 이유가 하나쯤은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에서부터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나라는 사람의 효용성을 입증해 내야만 살아갈 가치가 생길 것 같다는 일종의 자가 테스트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현재, 이것저것 찾아다니며 스스로에게 내린 결론은 삶에서 목적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물학을 선택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신 최재천 교수님께서는 행복은 진화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행복이라는 비정형적인 것에 결과로써 중점을 잡기보다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일상에서 생겨나는 사소한 것들로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말씀은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만 맴돌던 삶의 결론을 짓는 데에 중요한 모토가 되었다.
 
얼마 전에 읽은 시집 「조이와의 키스」에서 작품 해설을 맡은 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쁨이 오는 순간을 섬세하게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얼마든지 다르게 기록할 수 있다.” 삶에서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기쁨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시집을 읽으며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달리해 보았다. 그러자 체감되는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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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침에 기상하면 하루 계획을 세운다. 지나가는 시간을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투두 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면 어쩐지 갑갑함이 느껴진다. 사회가 청년에게 요구하는 것은 점차 많아지고, 그 속에서 거창한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무의식 속 강박은 목을 조여온다. 누가 더 힘들게 사느냐를 자랑처럼 여기는 것이 내 또래들이 겪는 평균치의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밤이 찾아와 잠을 청해보는 순간, 침대에 남아있는 신체의 기력이 무사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그만 좌절해 버리고 만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탓하며 불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낸 것으로 낙인찍곤 한다. 괜찮은 날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안 좋은 날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사소한 하루들이 한 겹의 종이처럼 쌓여가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순리이자 진리이지만, 이를 의식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무한히 쫓아오는 느낌은 여전히 피할 수 없다.

동시에 내 마음 한구석에는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비로소 정상인처럼 보인다는 편견이 존재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짜뒀던 틀 안에서 계획했던 모습 그대로를 완벽하게 보여야 했다. 무조건반사처럼 응하는 긍정과 줏대 없이 휘둘리는 의견들 속에서 어느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헷갈리곤 했다. 스스로 자문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생각을 곱씹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졌다. 생각이 생각을 좀먹고 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그 시간을 메우고자 자연스럽게 취미가 문어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뜨개질, 수영, 드럼부터 크로키, 지우개 조각, 러닝, 언어 공부, 동아리, 알바, 독서 등등. 계속해서 무엇이라도 하고 있는 몸짓의 겉면은 의도치 않게 탈을 쓰고 만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내면을 아는 나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존재한다. 도피의 결과로 '갓생'이라는 칭호를 얻는 것에 괴리감을 느낀다. 정작 나는 갓생이라는 단어를 스스로를 향한 일종의 자유 의지 탈취라고 생각하는데도 말이다.

이십 대 중반은 생각이 많을 시기이다. 이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단계라는 뜻이기도 하다. 생명이 깃들은 모든 것이 좋아 생물학이라는 전공을 택했고, 공부가 힘들진 몰라도 재미없었던 적은 없다. 길을 걷는 사소한 순간에도 무언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전공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뿌듯함이 들곤 했다.
 
그렇게 사념 없이 즐길 수 있었던 날 들을 지나 이제는 정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아직도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직업의 귀천과 그것들을 가려내기 바쁜 사회의 우열 관계, 그리고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온몸이 마비된 채 우두커니 서 있다. 선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을 아직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조금만 더 미뤄보고 싶다. 조금만 더 좋아하는 것을 해나가고 싶다.
 
 
 

그리고 내일


 
다마고치를 아는가. 조그만 화면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를 애정으로 키워나가는 게임으로 한때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나에게는 다마고치처럼 나를 잘 성장시켜 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좋은 계기로든, 혹은 피치 못해 나쁜 계기로든 관심사를 뻗어나가고 생각의 폭을 넓히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론적으로 이롭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나의 내면적인 성장으로 향할 양분이라고 생각하면 삶에서 찾아오는 시련들도 버틸 만 해진다.
 
어릴 때 티비를 보면 영상 편지라는 것이 적지 않게 나왔었다. 이 시각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을 사랑하는 타인에게. 혹은 몇 년 후의 나에게. 영상 편지는 쑥스러워하는 누군가가 속 안에 응어리져 있었던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고백하며 끝난다. 지금 이 글은 나에게 남기는 일종의 영상 편지이기도 하다.
 
사람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흐르는 물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해간다는 것이 내가 가지는 일념이고, 나를 표현하는 자기소개 글 또한 어색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5년 후, 혹은 10년 후. 그리고 더 미래에 존재할 내가 문득 이 순간이 떠올랐을 때 ‘그때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구나.’하고 대견해했으면 좋겠다. 정말 이것만으로도 바랄 것이 없다. 그런 내일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맞이할 하루하루가 행복으로 차오르는 것만 같다.
 
 
추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이들이 있어서 역경을 견딜 수 있었고 살아가는 나날들이 꽤 즐거워졌다. 나에게 인복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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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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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구운양파아몬드
    •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했다 말았다 하다가 짧게 남깁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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