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낭비하는 시절

글 입력 2024.07.2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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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늘은 진짜 온댔는데. 일기 예보를 믿은 내가 되려 바보라도 되는 것처럼 울먹이기만 하는 하늘을 보면 조금 짜증이 났다. 나랑 밀당하자는 건가. 새로 산 장화를 개시하지도 못하고 여름을 보내게 되는 걸까, 싶던 즈음 마침내 장마가 시작되었다. 사는 지역에 따라 장마 기간이 명명백백하게 분간되는 이번 장마는 아무래도 예의 그것과는 다른 듯하다. 정말 북극이 녹아 세계의 중심이 옮겨갈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여름에 태어났음에도 더위를 잘 타는 것은 물론 땀도 많아 여름을 싫어할 법도 한데, 영 반대다. 외려 여름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맡을 수 있는 악취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남의 젖은 우산이 내 다리에 닿고 신발에 물이 떨어지는 건 최악이다.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해 보려는 것처럼 여름은 별걸 다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준다. 그저께에는 출근길 집 앞에서 젖은 채 죽어있는 쥐도 보았다. 더워서 죽은 건지 지하도에 물이 들어 차 죽은 건지 알 수 없지만, 하여간 4월이나 9월이었으면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난여름을 그리워하고 다음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는, 아마도 낭비할 수 있는 시절이라는 이유* 하나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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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다음’보다 ‘지금’만을 생각하며 움직이는 때가 유독 많다. 계산하고 계획할 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이고 생각은 짧아지는 순간들.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급하게 들어간 카페에서 빗소리가 잦아들고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네 눈을 마주하고, 돗자리를 펴고 내일은 없다는 듯이 밤하늘만을 바라보며 한참을 이야기하다 이른 박명을 보고 나서야 꿈에서 깨듯 슬슬 돗자리를 접는 그런 찰나들. 굳이 마시지 않아도 될 커피를 또 마시고 잘 시간을 노는 데에 낭비하고. 흥청망청 있는 대로 체력을 쓰고 돈을 쓰고 시간을 쓰는 이 시간들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그런데, 낭만은 낭비를 해야 한다면서요.


수박을 먹고 드러누워 흐르는 땀을 애써 참아보는 대낮도 있고, 차에서 내린 뒤 눈에 들어온 푸르름과 슬리퍼를 신은 친구들의 발소리, 어렴풋한 계곡 물소리에 기지개를 켜보는 또 다른 낮도 있다. 열을 올리지 않고 몸을 식히는 것이 우선인 순간들. 분명 세계는 똑같이 돌아가고 있건만 잠시간 시곗바늘이 우리는 비껴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 평소라면 쓸데없는 행동을 절약하느라 애쓰고 있을 시간에 허튼짓만 반복하게 된다. 트렁크에 놓고 온 짐이 있어서 또 걸음을 옮기고,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이야기를 계속하고, 냉장고에 둬도 될 수박을 굳이 물속에 담가두려 힘을 쓰고. 이보다 더 소모적일 수 없는, 그런 모든 것이 태연히 허용되는 철.


사실, 나는 꽤 부지런해지기도 한다. 여름이 지나가기 무섭게 다음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만큼,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물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걸어 다닌다. 듣고 싶었던 강의를 듣고, 운동을 하고, 보다 많은 이들과 여행하고, 전시를 본 뒤 혼자 하릴없이 걷기도 하고. 땀이 송골송골 맺혀도 쓱 닦아내면 그만이다. 다른 계절은 무안하리만치 ‘이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산다. 그러고 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끝없이 늘어지고. 편한 운동화 하나에 의지해 도란도란 떠들며 서울 시내를 밤새 쏘다니고, 다리가 아파져 오면 잠시 앉아 목을 축이고, 또다시 걷다가 괜찮아 보이는 술집이 있으면 들어가고, 그렇게 또 새벽 내내 떠들고. 그렇게 보낸 긴 낮과 짧은 밤이 한둘이 아니라 더욱 이 시절을 사랑하는 걸지도. 열심히 살다가 낭비하는 맛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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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기억하는 열대야는 아무래도 나의 섬, 제주에서 가족과 보냈던 밤이다. 이모와 사촌 동생, 엄마와 두 언니와 함께였다. ‘마당발’이라는 신발 가게에서 남색과 빨간색이 섞인 샌들을 샀던 날. 발뒤꿈치 아래 1cm의 뒷굽(?)이 있는 샌들이었는데, 당시엔 그만큼 어른스러운 신발을 신은 또래는 본 적이 없어서 괜히 기분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무진장하게. 그러고 우리는 복작복작 떠들며 바닷가 공연장에서 열리는 여름밤 콘서트에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대 위 가수들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들의 노래도 당연히 알지 못했지만 그 공연을 지켜보는 엄마와 언니의 즐거운 모습이 좋았다. 그녀들의 모습을 구경하다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사촌 동생과 관중석을 돌아다녔다. 관중의 대부분은 우리처럼 어른 몇몇과 아이들 몇몇으로 이뤄진 식구였기에,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모르는 아이들을 마주쳤다. 그러면 걔네랑 뭉쳐서 또 다른 자리로 나아갔다. 뭐가 됐든 재밌게 놀았다는 말이다. 콘서트가 끝나자 우리는 자리를 옮겨 바닷가 앞에 돗자리를 펴고 치킨을 먹었다. 다른 음식에 소주도 있었던 듯한데, 돌이켜보면 이모와 엄마는 정말 끝장나는 열대야를 보낸 게다.


이젠 가족과 함께하는 열대야를 기대하긴 아무래도 어렵다. 시간이 지난 만큼 더위를 견디는 방식과 체력도 다 바뀌어버린 탓이다. 나는 이제 엄마와 이모처럼 무더위에도 소주에 간단한 안주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녀들은 이제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더위는 무조건 피하고 싶은 것으로, 얼른 지나가길 바라는 기후 현상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엔 한결같지 않은 것뿐이라 속상한 날이 늘어만 간다. 한결같지 않아서 좋은 것도 많음을 모르겠느냐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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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기차랬다. 역마다 내리는 사람과 새로 타는 사람이 있는 기차. 내린 사람은 내린 사람대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고, 빈자리는 다른 역에서 탄 다른 사람이 채울 수도 있고. 그렇게 지나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어릴 적 여름을 함께 보낸 건 콘서트를 같이 보았던 그녀들과, 더운 것도 모르고 모든 아파트의 놀이터를 같이 전전했던 친구들, 여름 방학 캠프를 같이 갔던 선생님들(이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한여름에 학생들을 데리고 놀러 갈 생각을 하셨다니.)이지만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의 여름은 다른 사람들과 보내왔다. 펜션에서 노래를 방방 틀어놓고 무아지경으로 흔들며 놀았던 동아리 친구들, 사랑이 뭐냐며 바카디를 더블 샷으로 먹고 울던 또 다른 친구와, 밤은 짧으니 걸어야 하듯이** 새벽을 같이 걸었던 너와, 포구에 걸터앉아 대낮부터 회에 낮술을 걸쳤던 너희. 무작정 내일로 티켓을 끊고 하늘을 날았던 7월이 있는 반면 가만히 앉아 모기에게 피를 내어주며 맥주나 마시던 또 다른 7월도 있다. 앞으로의 여름도 또 다른 누군가와 이렇게 흥청망청 보내겠지.


보통 기억은 토막 나고 삶은 마디로 구분된다. 이번 마디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일지, 올여름은 어떤 토막으로 새겨질지 알 수 없으며 내 기차에서 아무도 내리지 않았으면 싶지만 이것 역시 어쩔 수 없겠지. 내 마음도 어쩔 수 없고 흘러가는 이 세계도 어쩔 수 없어서 가끔씩 이렇게 우는 소리를 쓴다.


한창 지나고 있는 이번 열대야는 훗날 돌이켰을 때 어떤 여름으로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스럽다. 내게 새겨진 첫 열대야가 무덥고 재밌어서 여름에 빠지게 된 것처럼 27번째 열대야도 그랬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선 72번째 열대야도 재밌었으면 정말 좋겠다. 더위 먹어서 병 든 척도 해보고, 만약 손주 손녀가 있다면 달디 달고 달디 단 수박을 썰어다가 잔뜩 먹이고, 가만히 있으면 시원해진다며 달달거리는 선풍기를 켜줘야지. 너무 덥다고 군말하면 ‘너 지금 덥다고 움직여서 그렇다’며 꽁꽁 언 페트병을 꺼내주고. 그리고 나는 안방에서 혼자 에어컨을 잔뜩 쐬는 거다. 벌써 즐겁다. 이런 미래가 아니더라도 있는 힘껏 가진 걸 다 쓰면서 매 여름을 보내야지. 마냥 웃으면서, 내 앞의 너와 나밖에 없다는 듯이, 그렇게 실컷 낭비하면서.

 

 

* Youtube <침착맨> 방송 中 '김풍상담소'에서의 발언

** 영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유아사 마사아키 作 (원작 :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도미히코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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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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