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어서오세요, 가장 가까운 무대에 : 희곡 가게 '인스크립트'의 박세인 대표

글 입력 2024.08.1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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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가장 가까운 무대에

희곡 가게 '인스크립트'의 박세인 대표

 

 

공연은 순간의 예술이기에, 공연의 말들은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 발화되고 흩어지고 만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말이고,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이다. 어쩌면 희곡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미 흩어진 말들, 앞으로 흩어질 말들을 책이라는 물성 속에 붙잡아 두는 것. 그래서 이미 발화된, 앞으로 발화될 말들을 글로써 읽게 하고 곱씹게 만드는 것, 그것이 희곡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희곡 가게'를 표방하는 희곡 전문 서점 인스크립트의 존재가 고마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희곡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이곳에서는 희곡 읽기 모임, 작업자의 전시, 낭독 공연 등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공연의 수많은 말과 글을 편하고 다채롭게 만날 수 있는 장(場)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이 아담한 서점은 가장 가깝고도 광활한 '무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연극 배우이자 책방의 운영자인 인스크립트의 박세인 대표를 만나 이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말과 글에 관해 물었다.

 

 

▷인터뷰 키워드

 

희곡, 서점, 공연, 인스크립트, 공간, 

사회과학, 예술, 서쪽, 연극, 

관객, 극작가, 느낌, 혼자, 

전권, 소개, 음료, 대본, 접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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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자체가 웅장하고 멋있기보다는

작은 극장처럼 들어왔을 때

다른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길 바랐어요."

 

 

먼저 '인스크립트'라는 공간을 직접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으레 하는 말씀을 드리게 될 것 같긴 한데, 거기에 조금 더 덧붙여 볼게요(웃음). 인스크립트는 희곡과 연극·영화 전문 서점이고, 대본뿐만 아니라 창작에 관련된 책들을 같이 소개하고 있어요. 또 그 외에 문학, 사회과학, 예술이라는 세 카테고리의 책들을 다루고 있고요. 보시다시피 조그마한 공간이고, 연희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학로같이 공연이 많이 올라가는 곳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죠.

 

 

책과 함께 음료를 파는 것이 눈에 띄는데요. 손님들이 음료를 마시면서 책을 읽고 가는 그림을 염두에 두셨던 건가요?

 

인스크립트를 '희곡 가게'라고 말씀드리곤 하는데요. 가볍게 둘러보는 가게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조금 더 편안하게 즐기는 문화를 제안해 보고 싶어서 음료를 함께 팔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공을 많이 들였고, 다른 운영자인 주영 대표가 레시피를 개발했죠. 가끔 SNS를 보면 책 이야기보다 토마토에이드 이야기가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웃음).

 

 

저도 마셔 봐서 아는데, 토마토에이드는 정말 그럴 만해요(웃음). 이런 분위기가 인스크립트만의 특색인 것 같아요.

 

사실 여럿이 와서 음료를 즐기려면 공간에 여유가 더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부족해서 아쉽기는 해요. 그런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단골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멋있어요. 여담이지만 저도 마감하고 손님 테이블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합니다. 카운터에 있으면 책이 잘 안 읽히는데 손님 테이블에서는 온전히 책 읽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주영 대표가 돈 내고 쓰라고 그래요(웃음).

 

 

인스크립트는 국내 유일의 희곡 전문 서점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혹시 모티브로 삼았던 서점이 있나요?


특정 한 서점을 모티브로 둔 건 아니에요. 저희도 희곡 서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서점을 열어 보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러면서 다른 서점들을 찾아봤는데, 전 세계적으로 희곡만 다루는 서점이 많진 않더라고요. 스크립트를 다룬다는 점에서 뉴욕의 드라마북샵에 영감을 받긴 했는데, 저희와 톤이 닮은 것 같지는 않았어요.


저는 인스크립트가 접근이 쉬운 공간이 되길 원했어요. 공연, 희곡이라고 하면 어떤 분들한테는 어려운 느낌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곳을 방문하고 싶게끔 예쁘고 대중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죠. 주로 헌책방을 찾아보면서 직접 인테리어를 했는데, 이게 다 두 운영자가 싸워서 나온 결과물이에요(웃음). 저는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 되기를 원했고, 주영 대표는 100년 된 서점 느낌이면 좋겠다고 했는데, 계속 싸우면서 얘기하다 보니까 조화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자면, 인테리어할 때 모티브가 된 이미지들이 인스크립트 인스타그램 초반 게시물에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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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크립트를 인테리어할 때 모티브로 삼은 3개 이미지. 

ⓒ인스크립트 인스타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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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크립트 전경. 

ⓒ인스크립트 인스타그램 갈무리

 

 

진짜요?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있는데도 몰랐어요.


맨 처음에 올린 거라 아마 많이 못 보셨을 거예요. 이 3개 이미지가 저희 인테리어의 출발점이거든요. 이렇게 자연적인 분위기에, 희곡이나 연극·영화에 관련된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풍경을 꿈꿨어요. 사실 이 서점을 열게 된 것도 큰 서점에서는 희곡이 귀퉁이에 있고, 찾기도 어려워서 이 책들을 대접할 수 있는 곳으로 모셔 보자는 취지였거든요. 공간 자체가 웅장하고 멋있기보다는 작은 극장처럼 들어왔을 때 다른 공간이라는 느낌을 주길 바랐어요.


식상한 얘기지만 작은 책도 펼치면 완전 다른 세계인 것처럼 여기도 작지만 그렇게 꾸며놓을 수 있다면 공간의 크기에 비해 조금 더 다른 감각을, 경험을 선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이 채우고 싶었어요,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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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찾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들여오게 되는 것 같아요."

 

 

대표님께서 다른 곳에 기고하셨던 글을 읽었는데, ‘사양산업의 대표주자로 얘기되는 책과 안 그래도 찾는 사람이 몇 없는 희곡의 결합’이라는 표현이 와닿더라고요. 희곡 서점을 연다는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서점업에 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처음에는 응원과 함께 걱정도 많이 받았어요. "안 그래도 연극을 하는데 게다가 서점을 왜?"(웃음) 저는 이곳이 경제적으로 많은 것이 굴러와서 돌아가는 시장은 아니지만, 없는 만큼 반드시 니즈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게 맞다는 걸 확인해 가고 있어요. 책 자체가 큰 수익성으로 오고 있지는 않으나, (이런 시도가) 이 씬에 필요했다는 걸 충분히 확인하고 있거든요. 힘든 부분도 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찾아와 주시고 응원해 주셨어요.  

 

책 덕분에 이득을 보는 것도 있어요. 책이라는 물성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모이고 여기서 모임이나 공연 같은 무정형의 활동들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책을 다루지 않는 공간이었다면 더 어려웠을 거예요.

 

 

책의 물성이 있기에, 오히려 이곳에서 물성이 없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거네요.


그렇죠. 또 손에 안 잡히는 공연도 희곡으로 작게나마 소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접근성에도 더 도움이 되겠다 싶었어요. 사실 대단한 각오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없는데 저희는 필요했거든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컸어요. 그래서 업계분들도 출간된 희곡이 필요할 때 많이 찾아와 주시고, 관객분들도 보셨던 공연을 (희곡으로) 갖고 싶어서 오셨다가 또 다른 텍스트를 궁금해하시고…. 이런 연쇄 작용이 일어나고 있어서 반가워요.

 

 

연극, 뮤지컬 공연은 주로 서울 동북쪽을 위주로 활성화되어 있잖아요. 개인적으로는 서쪽에서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인스크립트의 위치가 반갑기도 했어요.


그걸 약간 노렸습니다(웃음). 동쪽도 고민을 안 해 봤던 건 아닌데 왠지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는 청개구리 심보라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로 같은 곳은 공연 인프라가 잘 되어 있어서 접근성이 좋고 공연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이 찾으시잖아요. 반면에 서쪽은 공연보다는 문학이나 음악이 발달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공연 쪽 네트워크는 부족하지만, 다른 문화 인프라의 덕을 볼 수 있는 이곳에서 해 보고 싶었죠. 서쪽에 사시는 분들께 접근성 좋은 곳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저는 공연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과 보는 사람의 입장을 항상 같이 생각하게 되는데요. 만약 공연이 많이 올라가는 곳에 인스크립트가 있었다면 접근성은 좋았겠지만, 휴식 공간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저희끼리는 "대학로에 있었다면 장사가 훨씬 더 잘 됐을까?"라고 우스갯소리도 하는데, 공간의 느낌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저희는 연희동 덕을 많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동네에 왔다가 우연히 들어오시는 분들도 꽤 있고, 그분들한테 이런 장르를 소개해 드리기도 하고…. (지금의 위치 덕분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배우 활동과 서점 운영을 같이 하시잖아요. 같은 배우이자 대표이신 주영 대표님과 번갈아서 작품 활동을 하시는 건지 궁금했어요.


보통 그렇게 하고, 되도록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직전 공연을 함께했거든요? 그래서 힘들었어요(웃음). 같이 해서 재미있고 좋았는데, 지쳐있을 때와 서점을 떠나 있을 때의 패턴이 똑같다 보니까 보완해 주는 것이 덜해서 조금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핑퐁 핑퐁 잘 조율하면서 해 보려고 합니다. 다행히 공연 중에는 다른 배우분이 가게를 지켜 주셔서 영업을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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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크립트에서는 희곡 말고도 다양한 책을 취급하는데요. 혹시 책을 들여오는 기준이 있을까요?


픽션으로는 공연 예술과 영상 예술 책들을 주로 다루고, 그 외에는 문학, 사회과학, 예술을 다루고 있어요. 희곡은 최대한 많이 구비하려고 하는데, 특히 한국 현대 희곡은 되도록이면 다 가지고 있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들이 있지만요. 연극, 영화와 관련된 책들은 최대한 구비해서 많이 소개해 드리려고 노력해요.

 

그 외 책들은 고심해서 들여놓게 되는데요. 다른 분야의 책들을 들여놓는 이유는 첫 번째로, 공연 대본을 찾으러 오셨다가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코너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것들이 보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또 공연 예술이나 영상 예술이 사회와 완전히 떨어져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서 사회과학 책들을 들여오는 것도 있어요. 계속 찾으시는 분들이 있기도 하고 저도 공연 할 때 많이 참고하는 편이거든요. 나중에 서점이 조금 더 넓은 곳으로 간다면 미술, 음악 같은 예술 분야를 더 채워 넣고 싶어요. 결국은 찾는 분들을 생각하면서 책을 들여오게 되는 것 같아요.

 

 

희곡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다른 분야의 책도 소개하고 있어서 더 좋더라고요.

 

조금 더 큐레이션 해서 다른 코너를 만들고 싶기도 해요. 지금은 딱 하나 있는데, '말 시리즈'라고 말에 관한 코너입니다. 연극 자체가 언어와 몸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저의 사적인 흥미와 취향으로 꾸려 보았습니다(웃음).


 

지만지의 핑크색 표지로 꽉 찬 책장도 인스크립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인 것 같아요.

 

확실히 지만지 덕분에 '핑크 쇼크'가 있는 것 같아요. 비주얼이 강력하니까. 지만지 코너는 이 서점을 출발할 때 제가 상상했던 것 중 하나였어요. 전권을 다 들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게 된 거죠. 한국에서 지만지 전권을 다 들인 서점은 광화문 교보문고와 인스크립트, 두 군데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희곡 전문 서점이 아니고서는 전권을 들이기 쉽지 않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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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만나는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래저래 프로젝트를 벌여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인스크립트에서 진행 중인 여러 프로그램도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 크게는 '낭독서 모임'이 있고요. 그다음으로는 전시인 '이달의 작업자 프로젝트'가 격월로 열리고, 비주기적으로 '낭독 공연'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서점의 프로그램으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낭독서 모임인데요. '낭독서'란 건 사실 없는 말이고, ‘낭독’이랑 ‘독서’를 합쳐서 한번 만들어 본 거예요. 저희가 가장 많이 소개하는 게 희곡인 만큼 희곡을 즐기거나 읽는 방식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함께 읽는 모임을 떠올렸던 거죠. 

 

 

낭독서 모임은 여럿이서 희곡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점에서 더 특별한 것 같아요.

 

이미 많은 서점에서 다양한 독서 모임을 진행하고 있어서, 독서 모임 자체는 익숙한 것이기는 해요. 그런데 희곡은 탄생부터 말할 것을 전제로 쓰여 있는 장르이고, 여러 명이 읽기에도 좋잖아요. 재밌는 게 희곡을 읽기 쉽다는 분들과 희곡을 읽을 때 책장이 안 넘어간다는 분들로 타입이 나뉘어요. 심지어 연극을 전공한 두 운영자도 달라요. 주영 대표는 희곡을 읽는 게 훨씬 편하고 쉽다는데, 저는 희곡을 넘기는 게 아직도 어려워요. 소설을 읽는 게 쉽지, 희곡의 말만으로 쫓아가는 건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이랑 모여서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돼도 시간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야 하잖아요. 그렇게 따라갔다가 나중에 다시 봤을 때 이해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자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해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셔서 깜짝 놀랐고, 저도 배우로서 호스트로서 되게 재밌는 시간이에요. 공부도 많이 되고요.

 

 

아무래도 배우들과 함께 대본을 읽을 때랑은 다른 느낌이겠죠?


배우들이랑 낭독을 위한 낭독 모임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 공연을 위한 자리일 때가 많아요. 그때는 공연화를 생각하거나, 내 캐릭터를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집중되어 있다면 낭독서 모임에서는 쓴 사람보다 읽는 사람의 감상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제가 배우로서 혼자 하는 단계들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한데, 희곡이 말하고자 하는 바보다는 이 희곡이 지금 나의 어떤 점을 건드리는가, 내 삶의 어떤 부분을 끄집어내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마음대로 읽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해요. 깊게 들어가서 하나하나 쌓으며 공연을 만드는 매력도 분명 있지만, 조금 더 가볍게 읽었을 때 접근성이 훨씬 좋아지고 읽는 것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실제 공연 할 때 ‘테이블 작업’이라고 해서 텍스트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있는데, 공연 일을 하지 않는 분들과 그런 과정을 같이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인스크립트 낭독서 모임에 참여해 본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저도 재밌었어요. 나와 성격이 다른 캐릭터를 맡으면 내 자아와 캐릭터 사이에서 텍스트를 걷는 듯한 느낌으로 읽게 되더라고요.


좋은 표현인데요? 그게 낭독의 매력인 것 같아요. 공연이나 영화는 결국 시간에 달려 있잖아요. 낭독서 모임도 잘 모르겠는 부분이 있어도 어쨌든 내 말로 표현하고 시간을 보내야 해요. 근데 그 시간을 통과함으로써 얻는 것들이 있고, 혼자 읽을 땐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것들을 배워 가기도 해서 (많은 분이) 그런 자리를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육성의 즐거움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말을, 그것도 다른 사람이 가짜로 말하는 걸 듣는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이런 재미들을 예상하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까 이런 점들이 있구나 발견하는 게 많아요. 저희끼리 하는 작은 공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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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업자 프로젝트'는 공연, 영상 예술 쪽에 있는 다양한 분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전시인 거죠?


공연 예술, 영상 예술의 곁에 있는 많은 작업자분을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프로젝트인데요. 일차적으로는 극작가분들, 배우분들을 모셨고, 그분들의 결과물을 보여 주기보다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세상에 그런 결과물을 내놓았는지에 주목해 보려고 했어요. 공연에 관심 없는 분들도 지나가다가 들러서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격월로 진행하고 있고 첫 번째로 김정 배우님, 두 번째로 김연재 극작가님을 모셨고, 이제 8월 전시를 앞두고 있습니다(8월의 작업자는 김은성 극작가). 되도록이면 작업자분과 함께하는 행사를 달마다 하나씩 하려고 기획하고 있어요.

 

 

인스크립트에서 진행되는 '낭독 공연'은 이 공간을 무대로 삼아 공연을 올리는 거죠?

 

네, 낭독 공연은 비주기적으로 열려요. 포르투갈 민속 음악인 '파두' 공연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 건데, 작은 공간에서 악기를 치면서 공연하는 게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연극도 더 간편한 공연을 제안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희곡을 즐기는 방법을 제안하려 한다는 점에서 낭독서 모임과 출발이 비슷해요. 이 작은 공간에서, 텍스트가 있다면 그걸 확인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거든요. 낭독 공연은 텍스트와 공연의 딱 중간에 있는 느낌이에요.

 

인스크립트 자체 공연은 이미 출간된 책으로 기획하는데, 지난해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라는 희곡으로 공연을 올렸어요. 다른 팀에서 하는 대관 공연도 있고요. 여기가 공연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공연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꽤 계시더라고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책에 둘러싸여서 공연을 하고, 보는 것이 특이한 경험이고, 물론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복닥복닥하게 공연 보는 걸 좋아해 주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배우들이 정말 눈앞에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자체 공연에서 배우로 올랐을 때 엄청 떨렸어요. 너무 가까이에 관객분들이 계시니까 큰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보다 더 떨리더라고요.

 

 

정말 이곳은 서점이면서 무대인 거네요.


그런 것 같아요. 낭독서 모임 때도 저희가 만들어내는 게 무대에 가깝다고 생각하거든요. 올해 12월에는 1인극도 올릴 예정이에요. 아직 명명이 제대로 되진 않았는데, 6월에 1인극을 올릴 분들을 모집해서 지금 개발하는 과정에 있어요. 저는 출연은 하지 않고 기획 일을 하고 있는데, 작업자분들의 주제를 들으면 흥미롭더라고요. 

 

저는 인스크립트가 관객분들에게 희곡이나 공연, 영화를 소개하는 공간인 동시에, 창작자분들이 쇼케이스를 많이 할 수 있는 공간도 되길 바라요. 관객을 만나는 가까운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래저래 프로젝트를 벌여 보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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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을 더 많이 소개하고,

희곡을 더 많이 즐기고,

그런 방법들을 제안해 나가는 공간이길 바랍니다.

천천히 오래오래."

 

 

인스크립트에서는 매달 두세 권 정도 도서를 추천해 주는데요. 선정 기준이 궁금했어요.


도서 소개는 길잡이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희곡이 너무 많고, 모르는 채로 왔다가 어떤 걸 먼저 집어야 할지 궁금해하시기도 하니까, 추려서 제안해 드리려고 한 거죠.

 

일단 희곡을 집중 조명해서 한 달에 1권쯤 소개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희곡 하나, 영화 관련 도서 하나, 그리고 나머지는 달마다 열어 뒀어요. 기준이라면 계절을 타는 저의 기분?(웃음) 이 시기에 소개하고 싶은 책? 그래서 항상 계획을 해 놨다가도 직전이 되어서 마음을 바꿀 때가 많아요. 세 권도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다가 다음 달에 다섯 권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 추천해 주고 싶은 희곡이 있을까요?


언제나 어려운데요. 저는 <넘버>라는 카릴 처칠의 희곡을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SF 희곡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었던 책인데, 복제 인간이 가능해진 시대의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요. 카릴 처칠이 페미니즘 성격을 띤 희곡을 많이 썼는데, 이 작품에는 아버지와 아들만 나와서 흥미로워요. 읽어 보면 왜 그랬는지 계속 궁금해할 수도 있고,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 문장 부호가 삭제돼 있어서 난해할 수도 있는데, 다 읽고 나면 '극작가가 이렇게나 많이 열어놨구나.' 하며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얘긴데, 희곡을 읽다 보면 극작가님들에게 궁금함과 경외심이 들곤 해요. 아무래도 저는 출발이 배우이니까 발견하고 채워 나가는 입장이거든요. (제가 극작가라면) 극을 내놓을 때 여기서는 이렇게 하라고 설명하고 싶을 것 같은데, 희곡을 읽다 보면 초탈한 느낌을 많이 받아요. '이제 여기를 채워 주세요.' 하는?(웃음) 물론 심리를 묘사하는 극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그냥 맡겨버리잖아요. 희곡 서점을 하면서 극작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것을 내놓을까, 어떻게 채워지길 바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공연이라는 것의, 극작이라는 것의 그런 점이 참 재미있어요.

 


그게 또 희곡만의 매력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희곡이 안 읽힌다는 분들한테 가끔 이런 얘기를 드리고는 해요. 남의 얘기를 엿듣는다고 생각하고 읽어 보시라고요. 이건 제가 한 말은 아니고 주영 대표가 한 말인데요. 남의 얘기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희곡을 읽는 게 훨씬 수월해지고 호기심이 자극돼서 더 재밌게 읽게 되는 면이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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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크립트가 문을 연 지 갓 1년이 넘었습니다. 지난 1년의 운영을 돌아봤을 때 발견하신 것이 있을까요?


저는 방문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항상 놀라요. 적극적으로 자신의 '최애'를 찾아 떠나는 것이 늘 놀랍죠. 이 서점 자체도 발걸음하는 것이 쉽지 않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취향에 맞아야 들어오실 수 있고, 상업 공간이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면도 있고, 무엇보다 작고….(웃음) 그런데 여기를 들어오셨다는 것 자체가 뭔가에 끌려서 행동하시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지점이 재미있어요.


저는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계속 생각하다가, 관객으로서의 정체성을 떠올렸을 때 편안해진 감이 있거든요. '내가 언젠가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 되더라도 나는 계속 관객일 수 있기 때문에 괜찮다.' 그런 마음에 서점을 시작한 것도 있어요. 사실 저에게는 배우로서의 정체성보다 관객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소중해요. 그래서 업계에 계신 분들이 이 공간을 마음껏 즐기시고, 좋아하시고, 아끼시는 모습에도 많이 놀랐고, 그런 것들이 교차되는 걸 볼 때 재미있어요.

 

 

창작자로서의 정체성과 관객으로서 정체성이 교차되는 것이요?

 

네, 그냥 좋아만 하던 분이 연기도 해 보고, 또 원래 연기하던 분이 관객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어떤 것들을 찾는 모습이요. 그리고 그런 분들을 직접 만나는 것에 기쁨을 느껴요. 항상 무대에서만 관객분들을 뵈었는데, 여기 있으면 직접 관객들을 만나는 느낌도 들거든요. 여기 있는 책 중에서 인터넷 서점으로 살 수 있는 게 꽤 많은데도 직접 오셔서 구매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도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소개할 수 있는 걸 여기서 소개하는 이유가 있고. 어떻게 보면 '했다 치고'가 통하지 않는 일인 것 같아요. 책이라는 물성 자체가 그렇지만, 장사도 문 안 열었는데 열었다 치고 넘어갈 수 없고, 낭독서 모임도 내가 얘기했다 치고 넘어갈 수 없잖아요. 이런 '직접'의 힘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얘기하다가 생각난 게 있는데, 아이스크림집 사장님이 쓰신 <좋은 기분>이라는 책이에요. 원래 스태프를 구할 때 썼던 접객 가이드가 출판까지 된 건데, 이 책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 직접 맞이한다는 의미로 '접객'이란 단어를 쓰거든요. 저는 그 단어가 너무 좋아요. 가게를 꾸려나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저에게 중요한 건 많은 사랑, 인기보다는 만나는 한 분 한 분인 것 같아요. 그게 이 작은 가게에서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대표님께서는 앞으로 인스크립트가 어떤 공간이 되길 바라시나요?

 

바람이 있다면 계속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경계는 무대와 일상 사이일 수도 있고, 말과 글 사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이런 애매모호한 것을 참 좋아합니다(웃음). 두 가지 다 취하려는 욕심 같기도 한데, 그럴 때 씬이 풍요로워지고 재밌어질 것 같아요. 제가 도서계나 공연계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런 경계를 오가는 경험을 하고 돌아가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희곡을 더 많이 소개하고, 희곡을 더 많이 즐기고, 그런 방법들을 제안해 나가는 공간이길 바랍니다. 천천히 오래오래.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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