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쥐고 있었던 마지막 구원과 신비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글 입력 2024.07.3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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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짧은 소설임에도 독자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설을 읽으며 많은 사람이 당도한 질문은 '얼빠지게 하는 사랑의 기원은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따르는 삶은 충만할 것인가' 정도일 것이다.

 

낭만적 소설로 알려진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라진다. 이 소설은 삶의 의무와 격렬한 로맨스 사이를 헤매는 한 인간의 생생한 감정의 기록이 될 수도 있고, 낭만적 환상에 목매는 불륜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시대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쓸쓸한 자기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이러한 감상보다 먼저 '이 소설은 너무나 오래된 소설이에요'라는 대답이 먼저 나올 것 같다. 즉, 나에게 이 소설은 보편적인 사랑에 대해서 다루기보다는,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지향하는 인물이다. 로버트는 자신을 기술시대에서 사라진 마지막 카우보이를 자청하는 인물이고, 프란체스카는 아내와 어머니의 의무에 짓눌려 젊음의 열정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프란체스카는 도살당하는 동물에 대한 고려와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시골 생활에 은연중에 큰 불만을 느끼고 있다. 로버트는 동물들을 먹지 않고, 예이츠의 시를 이해한다. 로버트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지만, 남편과 자식들의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가지도 못한다.

 

현대 독자의 관점에서 시골생활을 현재와 의무의 장소로 배치하고, 로버트와의 시간을 젊음과 활기의 시간으로 배치한 것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터넷 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은 소설에서 묘사된 것 같이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이러한 현실을 자세히 묘사하기보다는 사랑과 신성한 의무의 구도를 만들어내는 소설의 묘사는 당시의 여성차별을 낭만적으로 속이는 것처럼 보였다.

 

본질적으로 프란체스카가 마주한 것은 '진정한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된 자신'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로버트와의 많은 사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란체스카는 "나흘 동안 그는 내게 인생을, 우주를 주었고, 조각난 내 부분들을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었어"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모든 것에 로버트가 답으로 제시되는 것은 오답이다. 사랑이라는 말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활기를 잃은 남편과의 관계, 무료한 일로 대체된 삶의 의지는 모두 독립된 영역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회복되어야 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에게 로버트는 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의 화신이었을 뿐이다. 사랑이라는 묘약이 그 사실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지만 모든 신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만 깃든다. 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가 단호한 태도로 그와 함께하지 않은 것은 신성한 의무나 책임이 아니라 은연중에 이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로버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타인과의 관계에 깊게 빠져들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인물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시대적 변화에 둔감하게 반응하면서, 예술과 자연의 세계에 머무르길 선택한다. 그는 자신을 마법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기술 시대의 마지막에 남은 카우보이로 자칭한다. 야성적인 남성으로 낭만적으로 묘사되지만, 그는 프란체스카 이전 자신과 관계했던 여자에게 제대로 된 이별도 전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가질 수 없는 것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로버트가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장 가까운 것들을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 그에게 닿을 수 있었던 전 아내, 내셔널 지오 그래픽의 동료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글에 있는 여자를 꿈꾸고, 절대 가질 수 없는 유부녀를 사랑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공백을 '프란체스카'라는 나흘의 낭만적이고 완벽한 여인으로 채우니, 그는 그가 사랑했던 자연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빛바래지 않는 여인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카가 그 옆에서 빨래하고 화장실에 남은 머리카락으로 짜증을 내는 현실적인 여인으로 자리 잡았을 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가 그녀를 사랑할까는 의문이다.

 

이러한 상황과 소설 내내 반복되는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묘사가 교차하니, 나에게 이 소설은 두 사람의 무의식적 이득이 환상적으로 잘 맞아떨어진 소설로 보였다. 여성 차별적 사회와 부족한 자기인식으로 자신이 마주한 문제를 정의하는 것조차 하기 어려웠던 프란체스카와 이상적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는 로버트. 서로가 가질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이 되었으니 현실적인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한 것이다.

 

로버트는 이렇게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상에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 나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은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관점은 단순한 도덕적 관점에 의한 것이 아니다. 융은 사랑이 서로의 눈에서 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인간은 신이 아니고, 사랑은 신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하는 것이다.

 

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얼빠지게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상상해보았다. 내가 프란체스카의 딸이라면, 그녀의 사랑을 비난하지도 않지만 다른 선택지 없이 낭만적 사랑을 '보존'하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의 삶에 약간의 고통을 느꼈을 것 같다. 그녀가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었지만, 사회적인 것이기도 했다. 내가 로버트의 딸이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 한편, 그들이 마지막으로 꽉 쥐고 있었던 '사랑의 신비'라는 카드를 빼앗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이 글에서 나는 몇 번이나 사랑의 신비를 파헤치려고 했지만, 그들은 정말로 그러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말, 그 원인이 어디에 있건,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신비이자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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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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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조진우
    • 잘 읽었습니다.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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