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우리는 순간을 애정하고 있잖아요

나를 이루고 있는, 저의 '반려 단어'를 소개합니다
글 입력 2024.07.3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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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살과 29.9살 사이


 

스물다섯을 목전에 둔 겨울이었다. 한 수업에서 '나 자신'을 인터뷰하는 과제를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서른을 앞둔 미래의 나를 인터뷰했다. 그때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오기야 하겠지만, 왠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열아홉 끝자락,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뀔 때는 어른이 된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경험을 마주하고 겪어내느라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 차리고 보니, 막 학기 수업을 듣는 예비 취준생이 되어 있었고, 그즈음(아마도 서른을 앞둔 학교 선배의 '착잡하다'는 심경을 듣고 난 이후였다)부터는 막연히 '2'에서 '3'으로,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순간을 자주 상상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냐' '정신 차리니까 한 주가, 한 달이, 아니 계절이 지나있네' 등등. 자연스레 지금까지도 과거의 또렷한 순간들을 복기하며 회상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과거의 나날에는 지금보다 더 매 순간 소중하게 살았다고 착각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 말을 마치 재채기처럼 하고 다녔다. '또 이 말을 했네'라고 스스로 느낄 때마다 이어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서 더 나이가 들면,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갈까. 나의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시간의 속절없음은 어떤 감각일까, 내가 지금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보다 얼마나 빠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벌써 5년 가까이 지난, 예전의 과제가 떠올랐다. 그 과제는 미래의 나를 인터뷰하는 과제였는데, 나는 '서른을 목전에 둔 나'를 인터뷰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먼지가 잔뜩 쌓인 노트북 속 폴더를 타고 들어가 과제를 꺼내 보았다.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미래의 내가 어떤 사람이기를 바랐을까. 그 시기의 중간을 넘어가고 있는 지금, 나라는 사람은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글을 들여다보았다.

 

그 글에는 지금도 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단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단어들은 아마도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일 것이다.

 

 

 

'루틴'과 '순간'


 

(*'4'는 24살의 인터뷰어, '9'는 29살의 인터뷰이이다. 최대한 과제에 썼던 글 그대로 가져왔다.)

 

4: 저희는 순간을 애정하고 있잖아요. 요즘은 어떤 순간을 좋아하시나요?

 

9: 나만의 루틴을 지키는 순간들, 이 순간이 좋아. 천성이 게으른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지난 시간 동안 그래도 최소한의 일상 속 습관을 만들어서 지키자고 생각한 걸 잘 지켜왔어. 다이어리에 오늘도 한 일에 동그라미를 치는 순간이 좋아. 아침밥을 간단하지만 건강하게 챙겨 먹기, 30분 이상 걷기, 오늘의 좋았던 일 하나 생각하기, 자기 전에 요가 하기, 이 정도의 목록을 만들어두고 말야.

 

4: 적어도 지금의 제가 하는 것들은 별로 없네요(머쓱). 하지만 저도 이제야 일상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하루를 잘 흘려보내는 사람이거든요.

 

9: 맞아, 그랬었지. 그런 하루들이 모여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어느 순간 그 하루를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 그때부터 바뀌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나.

 

*


근 10년 동안 아침밥을 챙겨 먹은 적이 없는데, 왜 과거의 나는 서른 살의 내가 아침밥을 챙겨 먹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걸까. 혹시 모를 일이다. 서른의 나는 (살기 위해) 아침을 챙겨 먹는 사람이 되어있을 수도. 그 외에 언급한 것들은 매일 같이는 아니지만, 나름 내 삶에 자리 잡은 루틴들이다.

 

저 당시에는 저녁을 먹고 종종 엄마와 동네 하천길을 걸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한강이 가까운 동네에 산다. 엄마와 걷는 대신 동네 친구와 이따금 걷거나 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다이어리 하단에 '오늘의 반짝이는 순간'을 적기 시작했다. 그 습관을 들인 이후로 꼭 다이어리에 적지 않더라도, 하루에 좋았던 순간을 한 번쯤은 떠올린다.

 

이 외에도 작은 루틴들이 삶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삶에 '루틴'이라는 단어를 들여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냥 되는 대로 살면 되지, 뭐. 이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내 삶에서 루틴이 사라지면, 가장 먼저 내 몸이 무너지고 그다음에 바로 내 마음이 무너진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사라졌을 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내 안의 부정적인 마음이 몸과 동기화되었을 때 내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해 오던 루틴을 멈추게 되고, 정신 차리고 보면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나에 대한 자책으로 손쉽게 이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부정적인 마음이 몸 안에 스멀스멀 퍼지기 전에 일단 몸을 일으켜서 평소에 하던 일을 하나라도 하려고 해본다. 정말 사소한 것도 좋다. 하물며 자기 전 양치라도. 그러면 어느새,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걷던 감각은 사라지고 조금 더 단단한 땅을 밟는 느낌이 든다. 그 땅 위에 있는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는 시야를 가지게 된다. 그 또렷한 시야를 느낀 이후로는 나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애쓰는 순간을 애정하고 있다.

 


[크기변환] 반려 단어_2.jpg

사물에 햇빛이 비치는 순간

 

 

오늘도 하루의 끝에서 하루 중 가장 좋았던 일을 생각해 본다. 요즘 좋아하는 순간은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장면을 카메라로 확대해서 보는 순간이다.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나뭇가지, 좋아하는 사람의 그림자 혹은 그의 일부, 아파트의 이름을 가리는 꽃나무, 옥상에서 우아하게 떨어지듯 나는 새, 건물 안으로 들어온 햇빛의 조각 같은 것들. 일상에서 잠시 시선을 빼앗길 때 그것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들여다보며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진을 찍어 순간을 기록하기보다는 눈에 담는 행위가 훨씬 더 가치 있다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일이 그 순간을 오롯이 즐기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사진첩을 열어 보았는데 그곳에는 내가 무심코 길을 걷다가 아름답다고 여겼던 크고 작은 사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오롯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시간은 분명 내 몸과 마음 어딘가에 쌓여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너무나 쉽게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그 대상에게 가졌던 감정을 곱씹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때부터는 사진으로 시선의 끝을 기록하는 일과 (여전히 어색하지만) 누군가의 사진 속에 담기는 일이 일상에서 가장 마음을 쏟는 일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사진의 밝기를 서서히 낮추는 순간을 좋아한다. 명도가 서서히 낮아지면서 화면의 물체에 어둠이 드리워 형체가 흐릿해지거나 혹은 반대로 형체가 또렷해지기도 하는, 시시각각 변하는 순간을 바라보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 좋다.

 

아름다운 걸 눈에 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었던 나는, 카메라 너머로 보는 사각형 프레임 안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에 빠져 있다.

 

 

 

'엉망진창'이라는 단어를 사랑하게 되었어


 

9: 원래 나라는 사람이 농담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지. 지금도 여전히 조금 더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요즘은 그래서 '엉망진창'이라는 단어를 좋아해.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 '엉망진창'이어도 괜찮아, 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곧잘 엉망진창인 내 모습도 좋아하려고 노력 중이야.

 

*

 

'엉망진창' '얼렁뚱땅'과 같은 단어가 주는 유쾌함이 있다. 일상이 너무 심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하루하루 커지는 요즘이다. 한 살씩 나이 들어갈수록 책임져야 할 일이 늘어나기 마련이므로, 내 삶에서 심각한 일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일이든 인간관계든 그 외의 무엇이든 척척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을 때는 '엉망진창' '얼렁뚱땅' 이런 단어들과 먼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난 뒤부터는 이 단어들이 귀엽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단어를 삶 속에 들이고 나서 조금은 덜 심각하고, 실수에 유연하고, 내가 가진 밝고 긍정적인 점을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엔 타인과 세상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가장 엄격해지게 되었다. 타인과 쉽게 나를 비교하기도 했고, 누구도 내게 들이민 적 없으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런 내 모습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아마 그렇겠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잘 해내지 못하고 어딘가 부딪히고 쉽게 걸려 넘어질 뻔하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머릿속에 있는 말을 쉽게 정리해서 내뱉지 못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면을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혹은 대놓고 보여주게 되어도 슬쩍 민망한 듯 웃어 보이며 넘길 수 있게 되었다.

 

 

[크기변환] 반려 단어_3.jpg

요즘 '얼렁뚱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사진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


 

4: 그럼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끝으로 이 인터뷰를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

 

9: 스물넷 끝자락의 나에게 너의 '천하태평함'을 잃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어떤 식으로든 풀릴 거라고, 모든 순간을 맞이하는 마음이 쉽게 요동치지 않는 우리의 평온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4: 어떤 모습이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잘살고 있겠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기를 바라요. 분명 어떤 방향으로든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기에 그렇게 큰 걱정은 없습니다. :)

 

*

 

24.9살의 내가 막연하게 상상했던 모습을 조금씩 이뤄냈다는 사실은 새삼 신기하다. 물리적으로 크게 변한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집에서 나와 독립했고 둘째, 오랜 시간 꿈꾸었던 일을 하고 있다.

 

졸업을 앞둔 24.9살의 나는 '과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비교적 명확했지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랜 시간 살던 동네를 떠나 타향살이를 해야 했다. 가족을 떠나 혼자서 꾸려가야 할 삶이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지 않았고, 막연하게나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 시절의 나는 어떤 믿음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하고 있는 노력들이 지금 눈앞에 당장 내가 바라는 결과물로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분명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 덕분에 24.9살에서 약 4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내가 꿈꾸던 모습의 일부를 이루었고 또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혹은 사회가 멋대로, 씌운 코르셋을 점차 벗어던지고 있다. 이제는 타인과 세상이 아닌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여전히 애정하는 사람들과 쉽게 미래를 약속하면서 이제는 그 약속을 조금씩은 정말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천하태평'한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마음의 공간을 남겨두려 애쓰는 사람이 되었고, 그 여유 공간 덕분에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정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쉽게 외부의 충격에 흔들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생기고 있는 요즘, 이런 나를 돌아보며 분명 조금씩 되고 싶은 '나'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다져가고 있다.

 

***

 

어느 시점까지는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내 자신이 더 나아질 것이라 믿었었다. 이제는 나아지는 것보단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어들은 내가 앞으로 삶을 영차영차 살아가면서 잃지 않기를 바라는 단어이기도 하면서, 내가 나아가는 데 기꺼이 뒷받침해 줄 단어일 것이다.

 

서른 살의 '나'가 되는 순간이 와도 이 단어들이 내 삶에 큰 부분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도 여전히 지나가다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에 발걸음을 멈췄으면, 내 삶에 조금 더 나를 챙기는 루틴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나의 빈틈으로 작은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작은 실수에 서로가 관대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확신을 가진 채 스스로에게 "잘 나아가고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었음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또 어떤 단어들을 새로이 삶 속에 들이게 될까?

 

 

[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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