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람에게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들어있다 - 무서운 그림들

인간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무서운 그림들
글 입력 2024.07.30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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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성하는, 미술


 

유년 시절 숫기가 없는 나를 걱정하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국영수 학원 대신 춤과 미술, 난타, 요가 등 스스로를 표현할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곳들을 다니며 자라났다. 그중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큰 부분을 만들어낸 건, 덧붙일 말 없이 미술이다.

 

그림에 대해 생각하면, 창문으로 엷게 들어오던 햇빛, 물통에 가득 담긴 물의 조그만 찰랑거림, 크고 투박하던 검은색 유광 팔레트, 제각기 다른 농도로 물과 섞인 팔레트 위 물감들, 스케치북의 질감과 미술 학원 벽 한편에 집게로 걸려있던 누군가가 그린 그림들.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한데 뒤섞여 조용하고 맑았던 내 유년 시절의 좋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림은 나를 표현하는 방법 중 가장 비밀스러운 방법이다. 언어라는 걸 사용하지 않고 구도와 채색, 명암 등의 기법으로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표현하고 그것으로 외부와 소통할 수 있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떠한 작품을 오래오래 찬찬히 뜯어보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 되었다. 누군가 아주 은밀하게, 나 이런 말을 하고 싶어. 그런데 음성과 활자로는 표현하고 싶지 않아, 했던 것들을 알아차려 주고 싶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활자로서 눈에 보이는 메시지가 없기 때문에, 그림들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화가가 하고 싶던 말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들은 부지기수. 힐끗 쳐다본 겉모습으로 미움을 받거나 아예 단순한 심미적 대상만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작품들을 한데 모아 오해를 풀어주고자 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원율 기자의 <무서운 그림들>이다. 이 책에 모인 100여 개의 작품 중 딱 한 가지만 소개해 볼까 한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감정들에 대해


 

[크기변환]흰색교향곡 스캔.jpg

 

 

제임스 휘슬러의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여자, 조안나 히퍼넌과 휘슬러는 사랑에 빠진다. 휘슬러는 히퍼넌이 하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을 특히 사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사랑이 담긴 총 세 작의 작품을 그린다.

 

‘흰색 교향곡’이라는 공통의 이름을 단 이 작품들은 작품명에 걸맞게 연백색의 물감들이 주를 이룬다. 어느 미술관에서 우연히 마주쳤다면 해사하게 아름다운 젊은 사랑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을 이 작품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조용히 숨어있던 불행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연백색을 띠고 있다.

 

연백색 물감을 구하기 힘들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휘슬러는 히퍼넌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위해 연백색 안료를 직접 만들었다. 당시 연백색 안료를 만들려면 납과 분뇨를 섞어 오랜 시간 가까이해야 했는데, 그 시점부터 휘슬러는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다. 납을 너무 가까이하던 탓이었다.

 

설상가상 휘슬러의 어머니는 히퍼넌을 싫어했다. 어머니가 런던으로 귀향하자 휘슬러는 히퍼넌을 집에서 쫓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납의 영향으로 점차 불안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히퍼넌이 외도했다고 의심하고 그녀를 거듭 몰아세웠다. 연백색의 사랑이 점점 검게 변해갔다.

 

 

몸에 납을 쌓고 산 휘슬러는 평생을 불안증과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죽기 10여 년 전부터는 그의 몸과 정신 모두 온전치 않았다. 납 범벅이 된 그의 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말년을 맞은 그는 사실상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휘슬러는 1903년, 예순아홉 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최종 사인은 심장 마비였다.

 

p.51

 

 

결국 히퍼넌과 휘슬러는 결별하지만, 서로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놓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자신의 그림 판매권을 넘겨주기도 하고, 그가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히퍼넌이 10년 동안 양육하기도 한다.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사랑. 나를 망가트리는 걸 알면서도 하게 되는 사랑은 그들에게 연하고 희게 질린 색이었을까.

 

 

 

사람에게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들어있다


 

예술에는 당연히 심미인 특성이 담겨 있지만, 사람에게는 아름답지 않은 것도 들어있다.

 

이원율 기자의 <무서운 그림들>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그림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아름답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그림. 혹은 노골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그림들도 있다.

   

 

태양 옆에는 늘 구름이 따라붙고, 꽃이 피면 반드시 지고, 풍요로운 가을이 지나면 언제나 냉혹한 겨울이 온다. 이처럼 번성 후에는 틀림없이 위기가 따라온다. 하지만, 이 순간이 곧 몰락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순간만 견디면 태양도, 꽃도, 가을도 늘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베더는 앳된 청년일 때 이러한 세상의 진리에 통달했다.

 

p.107

 

 

베더의 깨달음처럼, 삶이란 순환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이 번갈아 우리를 찾아온다. 그렇기에 보기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해서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한 절망과 분노,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함, 욕심과 추악함 그런 것들도 모두 우리 영혼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책 속에서 다루는 화가 중 한 명인 일리야 레핀은 예쁜 그림, 아름다운 의미가 있는 그림만 의미가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과 삶에 대한 사색에 잠기게 하는 그림들. 어쩌면 저자는 그림들의 오해를 풀어 이런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삶과 인간에 관한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가 담긴 그림들, <무서운 그림들>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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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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