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빨래를 해야겠어요, 노트를 보러가야죠 - 뮤지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글 입력 2024.07.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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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언제든 아쉽지 않은 개운한 일이 있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오는 일, 빨래를 널어서 햇빛에 바짝 말리는 일. 따뜻한 물에 몸도 옷도 깨끗해지면 느끼게 된다. 역시 근심 걱정이란 수용성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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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을 보게 된 이유는 호기심과 편안함이었다. 하고많은 빨래방 중 집과 가까운 연남동이었을지 궁금했고 자극적이지 않고 따뜻한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것이 들어가면 한 번씩 멈칫할 때가 있다. 이럴 땐 다시 평화로운 내용으로 레이더를 달래주는 수밖에 없다.


이따금 저녁에 걸으러 가는 이 연남동을 배경으로 공연에서는 6명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장 먼저 등장한 건 어머니 미라. 면세점에서 일하다가 아이를 기르면서 쉬고 있고 새로운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막막한 상황이다. 설상가상 부모님도 몸이 좋지 않으시다. 세탁기를 돌리면 시끄럽다는 이웃집 소리에 빨래방을 찾았다. 다 같이 쓰는 노트에 적은 말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


다시 빨래를 찾으러 돌아온 그녀에겐 노트에 댓글이 달려있었다. 식물을 길러보면서 기분을 전환해 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처방전처럼 댓글을 달아준 사람은 장 영감님이다. 약사를 하다가 은퇴하셔서 그런지 미라에게 필요한 이야기도 적어주고 살뜰하게도 화분도 하나 전달해 주신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든데 무슨 화분이냐 싶지만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많이 됐다. 의도치 않게 화분 키우기를 맡게 됐다. 그저 늘 파릇파릇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하 때맞춰 물이나 주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새로운 싹이 트고 뿌리가 나오더니 어느 날은 꽃대가 올라와 있었다. 그게 참 장하고 기특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어르신들이 왜 식물을 기르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기운이 생긴다. 저 녀석들이 저렇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듯이 또 하루 그렇게 살아가 보자고. 때로는 꽃이 피려다 시들기도 하고 잎이 마르기도 하고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물을 주고 햇빛과 바람을 받으면 화분에는 뿅 하고 귀여운 싹과 꽃대가 다시 올라왔다. 아마 화분도 이렇게 잘 자라기를 응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으리라. 누군가 나를 화분처럼 기특하게 여기는 존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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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연은 연애사로 고통받고 있는 대학생 연우. 남자친구와는 1년이 되었지만 연우를 존중하지도,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1년 남자친구가 그의 친구들에게 그녀를 그저 '호구'에 불과하다고 말한 걸 우연히 그의 핸드폰 카톡을 보고 알아버린 후 헤어졌다. 전남친은 남의 핸드폰을 봐서 이 지경을 만드냐면서 화를 내고 가더니 주변 지인과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식으로 말을 지어냈다. 그런 수군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휴학을 하고 말았다. 캠퍼스 커플이라서 인간관계가 겹쳐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내가 떳떳하다면 왜 그 상황을 도망치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버텨서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나? 저렇게 도망가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상황을 오해하고 마음대로 판단해버리지 않겠나. 그러나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간다. 이 진흙탕 싸움에서 버둥거리면서 버티는 것조차 힘든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것 같다면 증명을 하려 애쓸 여력도 없다.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다. 빨래를 하러 온 그녀는 노트에 묻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이 나이니 역시 나의 잘못인 것인지.


역시나 장 영감님은 무플을 방지해 주신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말을 나무 이야기로 풀어주셨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바람이 흔드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큰 나무라도 뿌리가 깊지 않으면 바람에 쓰러질 수 있고, 작은 나무라도 뿌리가 깊다면 바람에 흔들려도 결국엔 무럭무럭 자라 무성해질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무슨. 열길 잘했다. 굳이 그런 사람에게 마음과 시간을 낭비해서 무엇하겠는가?


빨래방에서 비가 쏟아지던 날 연우는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한 마리 만났고 자주 실종되는 그 녀석 덕분에 남자친구는 잘 잊을 수 있었다. 나중에 전남친은 연우를 보고 싶다고 집 앞을 찾아온 거 보면 이제 호구 같다고 했던 그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여담으로 이 고양이를 만나고 나서 다들 고양이 귀와 발을 하고서 '냥'을 외치는 넘버가 나오는데 왠지 부끄럽지만 귀엽다. 대학로이기에 볼 수 있는 이 귀여운 넘버는 꽤나 중독적이므로 두 눈과 귀를 열고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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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 빨래방은 장 영감님의 고민 해결소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연남동이라는 제목이 제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남동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는 하준이는 멋진 노래를 하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가수 지망생. 빨래방에서 어떤 노래를 선곡하면 좋을지 노트에 적어놓는다. 드라마 보조작가인 여름이 댓글로 추천해 준 곡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얼굴을 모르는 선곡 요정을 뮤즈로 삼고 만든 노래로 유명해지기까지 한다.


여름이는 여전히 보조작가인 스스로를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서 하준과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하준은 사실 버스킹을 할 때 전 재산이라며 주고 간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상이 깊을 만도 한 게, 전 재산이라고만 원을 줬다가 교통카드비가 없어서 오천 원을 거슬러가는 해프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한 것에 비해 둘은 알콩달콩 하게 잘 만난다. 하준이 노래를, 여름은 글을 쓰는데 서로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흐뭇한 사이다.


청춘이 푸르다고 한 건 청춘이 지나간 사람들의 시선은 아닌가. 사람을 만나고 가까워지는 건 어려워진 느낌이다. 우리는 우리는 스스로의 길을 찾기도 해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만 하기엔 가진 것이 마음밖에 없다. 타이밍이 어긋나기도 쉽고 사랑은 뒤로 미루게 될 수도 있다. 정답은 당연히 없는 문제다. 고민을 먼저, 나중에 연애에 집중해도 된다. 지금만 할 수 있는 연애를 하면서 사람을 배우고 알아가는 것도 좋다. 다만 역시나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머뭇거리고 있는 거라면, 서로 마음이 있는데도 만날 지를 고민하는 거라면, 꼭 피할 필요는 없다는 게 지금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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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이웃 간의 정, 청춘의 고민과 사랑을 뒤로하고 등장하는 것은 우리 장 영감님의 고민이다. 장영감은 성형외과 의사인 아들 대주와 자주 투닥거린다. 대주는 기러기 아빠라서 가족과 떨어져 있고 외국에 있는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주려고 돈을 더 벌려고 하다가 사건사고에 휘말린다. 대리로 수술을 했다가 징계도 받고, 징계로 감봉되면서 라이더를 하면서 돈을 벌어보려다가 팔을 다치고. 같은 의사 친구에게 돈을 빌려보려다가 민망해지기도 하고, 그 와중에 도움을 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이 알짜배기 땅을 왜 굴리지 않냐고 하지만 장영감에게는 이곳이 아내와의 추억과 약속이 담긴 집이었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려고 했던 집은 반려견 진돌이와 단둘이만 사는 단출한 집이 되어버렸다. 대주는 아버지를 잃을 뻔하고 나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그가 고민하는 가장의 무게는 아버지 역시 이미 느낀 것이다. 장영감이 빨래방 노트에 적어놓은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 각성한 것이다. 노트가 참 여러 사람을 구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들이든 딸이든 쉽지만은 않다. 가족끼리는 남들보다 더 날 것의 대화나 더 마음에도 없는 날 선 말을 던지고선 후회하는 일이 많다. 어떻게 우리가 남이냐고 하지만, 가끔은 우리를 남처럼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그러면 적어도 지나치게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 함부로 대하진 않을 테니까. 반대로 오히려 남을 가족처럼 생각하면, 남을 이해하는 데 도 도움이 된다. 저 사람은 우리 부모님과 연배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답답하다가도 이해가 될 수도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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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이야기는 어떻게 마무리될까. 처음 시작이 미라였듯이, 마지막도 미라가 장식한다. 그녀는 집을 구할 수 없어 파주로 떠나기로 했다가, 장영감이 쓰러졌을 때 마침 집에 들러 병원에 보내준 것을 계기로 장영감의 집을 리모델링을 해서 살기로 했다. 사실 이게 제일 꿈같은 전개지만 안될 것도 없다. 미라가 장 영감을 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장영감에게서 아버지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빨리 수술을 해서 쾌차한 것처럼, 장영감 역시 미라가 빨리 발견해서 조치를 취한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 넓은 세상에 내 집, 내 차, 내 자리 하나 가지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다. 누군가가 그걸 다 가지고 있다 해서 상대적으로 더 절망스럽지는 않다. 어차피 비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소유를 했다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는 또 다른 영역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든든할 것이란 건 말할 것도 없지만.


전래동화처럼 좋은 일을 했더니 이렇게 잘 풀릴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왜 연남동인지까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하준의 버스킹 이야기 때문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은 알면서도 따뜻한 쌍화탕 같은 공연이었다. 장영감이 손수 만들어서 달달하게 두고 갔던 그 쌍화탕처럼. 어떻게 전개될지 고민할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보면 된다. 대학로 공연에서만 볼 수 있는 멀티맨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어떻게 저렇게 다양하게 활약하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웃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안부를 전하는 것이 이렇게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우리야말로 쓸쓸히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빨래방에서 사람들이 노트에 자신의 고민을 쓰듯이 우리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렇게 따뜻하게 답을 해주는 일도 많지 않다. 세상은 우리를 지치고 성나게 하고, 혼자 시간을 보내게 하고, 사람을 믿지 않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바라는 건 역시나 그런 따뜻한 댓글이다. 아마 다들 그래서 빨래방을 찾았을 것이다. 노트에 글을 쓰러, 그리고 누군가 쓴 글에 따뜻한 댓글을 남기러.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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