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 까마귀 클럽

글 입력 2024.08.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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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연극_까마귀 클럽_예술공간 혜화.jpg

 

 

중학교 시절, 아주 짧게 연극부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친구 따라 가입한 거긴 하지만, 그때는 다니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나를 포함한 학생부 전체가 단막극을 도맡기도 했으니 거기에 영향이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나는 그다지 연기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무대 위에 오른 친구들의 새롭고 어색한 모습을 구경하는데 더 흥미가 있었다. 선생님이 직접 쓰신 대본의 허술함에 키득대는 것은 물론이고.


연극부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무대 위에 오르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무대에서도 여전히 쭈뼛대거나 행동이 더 작아지는 친구도 있었다. 대본의 대사만 읊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애드리브를 넣거나 대사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말투로 소화해 내는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이 정해준 동선을 성실하게 따라가는 친구도 있었고, 그 동선을 기꺼이 무시하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돌아가며 동일한 장면을 연기했는데, 모두 같은 배역임에도 마치 다 다른 사람 같았다. 크고 작은 발성들 사이로 배역은 무수히 많은 얼굴을 바꿔 끼웠다. 그는 소심하게 눌러왔던 화를 기어코 터뜨려 조목조목 상대의 말을 받아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악에 받쳐 무대가 떨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부원들의 연기 실력은 천차만별이었으나, 화를 내는 연기는 모두가 기가 막히게 잘했다.

 

 

 

태초의 감정, '분노'


 

분노를 터뜨리는 배역은 그 당시 우리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춘기 여자아이였다. 심지어 자신에게 쏘아붙이는 엄마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었으니 아이들의 연기력이 폭발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나이와 그때가 으레 보호자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시점이란 특수성을 제외하고 상황만을 따져보았을 때, 사과의 책임 없이 마음껏 분노할 수 있는 자리를 누가 마다한단 말인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듯한 감정이 있다. 아주 어린 갓난아이도 눈을 휘며 웃을 줄 알고,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를 줄 안다. 그게 정말 이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분출해 낸 감정인지, 애초에 어른만큼 다양한 감정을 아기가 알고나 있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작은 아이도 편안함과 불편함만은 확실히 아는 것 같았다. 다만, 자기의 처지를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도 요령도 모르니 가장 확실한 구조신호로 도움을 요청할 뿐. 아이가 나이가 들고 키가 커지면 자신이 느낀 불편함을 말로 표현하거나 그로부터 스스로를 직접 구출하고자 할 터였다. 어떤 때는 욕설과 무력으로 자신을 무장해 탈출을 꾀할 것이다. 우리가 '분노'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말이다. 지금은 자기 몸을 뒤집는 방법조차 모르지만, 관절을 움직이는 방법을 익히고 그에 걸맞은 근육이 붙는다면 주먹을 그러쥐고 상대에게 휘두를 수 있는 잠재력이 아기에겐 있다. 불편함을 아는 이는 분노를 아는 이다.


하지만, 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초의 감정, 분노(화)를 잘 낼 수 있는 건 별개의 문제다. 이원석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까마귀 클럽>은 네 명의 화를 잘 못 내는 인물이 나온다. 이 극의 주인공이기도 한 '지원초이'는 소심한 성격 탓에 어릴 적부터 화를 잘 내지 못했다. 화가 날 일이 생기면 바보같이 배시시 웃어넘기며 체념할 뿐, 자신을 함부로 대하거나 모질게 구는 친구와 고객들에게 무어라 한마디를 하지 못한다. 또한, 지원초이의 직업은 '텔레마케터'다. 선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그는 화를 잘 내기란 어려운 입장이다. 표출하지 못한 분노는 그의 속을 맴돌고, 결국 스스로를 겨냥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지원초이는 항상 위축되어 있고 매사에 비관적이다. 그는 이런 자신을 답답하게 여긴다. 그러던 차에 지원초이는 함께 화를 '잘' 내는 방법을 연구하는 스터디 모임 '까마귀 클럽'의 모집글을 발견한다.

 

이 까마귀 클럽은 막 가입한 지원초이를 포함해 '별', '워리', '프로틴' 총 4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임의 회장인 '별'은 하루에도 수십 건의 민원을 처리하는 3년차 공무원이다. 지원초이와 마찬가지로 감정노동 종사자이며, "상대해 주지 않고 참는 게 낫다"는 선배의 조언이 격언이 되는 현장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간다. '워리'와 '프로틴'은 이 모임의 초기 멤버이다. 워리와 프로틴은 동성애자 커플이며, 그들이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물인 만큼 스스로를 감추고 억누르는 것이 일상일 것임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프로틴은 악성 학부모와 교장선생님 앞에서 명백히 '을'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교사다. 따라서 이들 모두는 타고난 성격과 정체성과 더불어 경제적으로도 '을'에 위치한, 좀처럼 화를 잘 내기가 난감한 인물이다. 이들은 비슷한 처지의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언젠가 분명한 분노를 내지를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화를 내면 우리가 '우리'일 수가 없다"


 

그러나, 까마귀 클럽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모순에 봉착한다. 워리는 이 모임의 회장인 별을 싫어한다. 지원초이, 프로틴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그는 별을 향한 지원초이의 옹호를 히스테릭한 웃음으로 맞받아친다. 더군다나 그는 별의 실명 '조한영'을 직접 입에 올려 스터디원끼리 서로의 개인사를 궁금해하거나 캐물어선 안 된다는 모임의 규칙을 단번에 무시한다. 한편, 별의 입장도 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원초이의 해맑은 "공무원이라니 대단하시다"라는 말에 표정이 굳지만, 성실히 예의 바른 어투로 그를 응대한다. 무분별한 개입으로 모임의 진행을 가로막는 워리를 제지하지만, 별의 얼굴은 여전히 경직된 미소가 단단히 박혀있다. 별도 워리만큼 본심을 숨기고 감정을 억누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워리는 과장된 몸짓과 쾌활한 목소리로, 별은 딱딱하게 굳은 만들어진 미소로 분노를 삭인다.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서 프로틴은 묵묵히 침묵을 지킨다. 화를 잘 내기 위해 만든 모임인데 모순되게도 구성원들 모두가 화를 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화를 참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극중에서 워리는 이런 말을 한다. "화를 내면 우리가 '우리'일 수가 없다."


워리의 이 말을 증명하듯, 모임 까마귀 클럽은 지원초이가 화를 잘 내는 법을 터득함과 함께 분해된다. 지원초이는 이날 화내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미리 써온 대본뿐만 아니라 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까지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확하게 상대를 바라보며 중간중간 진심 어린 반말과 함께 (가상의 고객을 연기하는) 자신 앞의 별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그리고 별은 그러한 지원초이의 훌륭한 분노에 지지 않고 응답해 주었다. 각본 없는 '진짜 분노'로 말이다. 지원초이의 분노에 상처받은 별은 지원초이를 겨냥하며 욕설을 퍼붓는다. 그렇게 이 모임은 끝이 나고, 지원초이는 다시는 까마귀 클럽을 찾지 않는다.


당연한 수순이다. 스터디 모임 까마귀 클럽의 목적은 '화를 잘 내는 것'이다. 이 모임의 회장 별은 울면서 벌벌 떠는 프로틴의 분노를 '나약한 감정'이라 묘사한다. 모임에선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같이 상대를 배려하는 말이 금지된다. 스터디원들은 별의 침착한 표정과 태도의 분노를 보며 '이건 진짜 화를 내는 것 같지 않다'며 피드백을 준다. 이 모임이 원하는 분노는 그야말로 완전히 날것의 분노다. 이걸 추구하는 모임이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사람의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을 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크리스마스의 기적', 민원인과 인간 조한영


 

연극 <까마귀 클럽>은 이 달갑지 않은 생짜의 분노를 관객에게 직접 경험시켜 준다. 이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극중 인물이 모임에서 분노를 연습할 때 드러난다. 이때 불빛은 대부분 꺼지고 인물이 서 있는 일부에만 조명이 집중된다. 이로써 관객은 옆사람 얼굴조차 보기 힘든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 유일한 얼굴인 배우를 바라보며, 마치 이 공간에 배우와 나 단둘이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인물은 실제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상대역에게 말을 거는 중이나, 조명이 꺼져있는 탓에 상대 배역의 존재는 어둠 속에 가려진다. 따라서 인물의 대사는 상대역이 아니라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백'의 효과를 지니게 된다. 심지어 인물은 무대 앞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꼿꼿이 서 있기에 이러한 성격은 더욱 두드러진다.


관객이 배우의 화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듯한 경험은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정점을 찍는다. 별이 분노하는 장면은 단연코 이 극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일 것이다. 김신혜 배우의 열연으로 더욱 고조되는 이 장면은 사실상 별이 지원초이에게 분노하는 것이지만, 이 장면 역시 배우가 관객석을 바라보며 진행된다. 별의 삿대질 역시 관객을 향한다. 일말의 필터링도 없는 쌍욕의 향연을 관객은 온전히 받아내야 한다. 관객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배우의 두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타인의 분노를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한 채 경청해야 한다. 관객은 이에 맞받아칠 수 없다. 연극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소리를 내는 일은 모두의 감상과 연극의 원활한 진행을 방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답이다. 여기서 관객은 상대가 손님, 고객, 상사란 이유로 자릴 피하지 못하고 돌처럼 서서 버텨야만 했던 지원초이, 별, 프로틴의 경험을 하게 된다. 관객 모두는 크리스마스 날 차량번호판을 즉각 반환해 주지 않았다고 민원인에게 뺨을 맞았던 그날의 조한영이 된다.


김신혜 배우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끝으로 지원초이의 까마귀 클럽 활동과 연극 <까마귀 클럽>은 함께 막을 내린다. 극의 마지막 별의 대처가 압권이다. 지원초이를 향해 겸연쩍게 미소 지으며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지원초이님께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말과 함께 스터디 규칙을 어긴 벌금인 현찰 15만원을 그에게 내민다. 마치 자신의 뺨을 때리고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박카스 한 상자를 내밀었던 크리스마스 날의 민원인처럼 말이다.


분노의 불길을 막을 순 없다. 그러나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사람이 남는다. 박카스 한 병으로 씻어낼 수도, 지폐 세 장으로 닦아낼 수도 없는 잿더미의 사람이. 노력형 분노 스터디 까마귀 클럽은 불길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만, 어느 누구도 재에서 다시금 싹을 틔울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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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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