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모든 게 내 탓이 될 줄도 모르고

글 입력 2024.08.0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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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함을 몰라버린 탓에 결국 잘 자라던 아이 하나가 영영 시들고 말았다. 낭창하게 뻗은 줄기가 천장까지 솟을 기세로 자랐었는데 삽시간에 초록별로 떠나버렸다. 분명 새잎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수없이 났고, 꽃대가 올라오고 나서는 창가에 두지도 못할 정도로 높이가 자랐었다. 정말 활력이 가득한 애였는데. 그랬는데.


사건은 꿈틀거리는 흙 때문이었다. 근 반년 사이, 해충과의 전쟁에서 장렬히 패배하고 만 나는 다른 화분 하나도 깨끗이 비워야만 했다. 집에 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잎 사이에 거미줄 같은 실오리 몇 가닥을 보았고, 급하게 효과가 좋다는 독일제 해충제까지 사 뿌렸건만 그 생명력 좋은 충蟲들은 쉬이 죽지 않았다. 이런 놈들은 왜 이리도 명줄이 끈질기단 말인가. 벌레라면 기겁부터 하고 보는 나는 이 점프력 좋은 자식들이 싹 다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해충제 포장 스티커에 적힌 설명보다 많이 뿌려댔다. 그러면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움직이던 놈들도 끔뻑 죽는 듯했다. 그러고도 며칠 뒤면 흙이 곧잘 꿈틀거렸다는 것이 골자지만.


그렇게 몇 차례의 전쟁을 치렀을까. 시든 잎을 떼어내고, 잎을 앞뒤로 닦아주고, 겉흙을 얇게 걷어주고, 해충제를 뿌리고. 진즉에 말라비틀어졌던 마지막 잎새까지 다 떨어지고 나서야 포기했다. 짧은 가지들과 흙만 든 화분을 차마 바로 버리지 못하고 창가 높은 곳에 놓아두고 며칠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새잎이 올라온 것을 보았고, 물을 주고, 영양제를 꽂아주었고. 그렇게 이파리가 한창 나다가, 또 잎마름이 생기고 며칠 지나지 않아 결국 생기를 잃었다. 어떻게든 살려보려던 질긴 노력은 무용해졌고.


고조한 식물을 한참이나 붙들고 있었음을 뒤늦게서야 깨닫곤 어느 저녁, 흙까지 바싹 마른 그 화분을 뒤집었다. 흙을 쏟아낸 화분을 물로 헹구고, 풍성했던 뿌리에 비해 몇 없던 줄기는 집 앞 공원 소나무 아래에 놓아두고 왔다. 공원에는 그깟 벌레에 만만하게 지지 않는 익충들과 강한 나무들만이 가득할 텐데. 괜히 초설에게 미안해졌다. 너도 야생에서 자랐으면 더 강했겠지. 분홍색 잎에 반해 집에 들였던 내 오색마삭줄.


그렇게 초록별로 붉고 하얗고 푸르기도 했던 아이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명랑하게 자라던 또 다른 아이의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다. 급하게 검색해 보니 되려 너무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랬다. 하엽과 목질화는 자라는 뿌리에 비해 화분이 작은 것이니 분갈이를 해주면 된댔다. 냉큼 달려가 화분을 뒤집어보니 뿌리 몇 줄기가 화분 밖으로 빼꼼하기 직전이었다. 기분이 환해지는 듯했다.

 

 

[크기변환]바질 꽃.jpg

 

 

분명 화분을 갈아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역시 생명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던 찰나 흙이 꿈틀거렸고, 그길로 일어나 새 흙과 큰 화분을 새로 사 왔다. 그리고 분갈이를 하던 중 뿌리 안쪽 드문드문 하얀 것이 곰팡이가 있는 듯도 해 조심히 흙을 털어냈다. 탈탈 털어내다 보니 벌레를 극도로 싫어하는 만큼 모든 걸 다 털어버리고 싶었고, 종내 뿌리가 잡고 있는 흙의 상당량까지 털어버리는 잔인한 짓, 아니... 잔목木한 짓을 해버린 게다. 벌레로부터 내 파릇한 바질을 지켜내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털었던 것 같은데, 벌레는 얘도 싫고 나도 싫으니까 해야 하는 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과잉보호가 되어버렸다.


꽃대도 왕창 올라와 상반신만큼 높아졌고, 이파리도 수없이 나는 것을 보아하니 영락없이 생명력이 강하겠구나 싶어 마음 편히 털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수북하게 자란 뿌리에 비해 줄기와 잎은 자꾸만 떨어지고 야위어갔다. 진하던 바질 향도 사라졌다. 더 큰 화분이 아니라 다른 게 필요했던 걸까. 영양제도 분명 줬었는데. 과습은 절대 아닌데, 통풍이 안 됐던 걸까. 아니면 에어컨 바람을 직격으로 맞았나. 의심되는 요인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 원인을 알아낸다고 한들 소용없다. 이미 초록별로 떠난 걸 어찌하란 말인가. 내 잘못이었다. 내가 문제다.


원인이 오롯이 내게만 있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보통은 너와 나의 세계가 맞물리고 저이와의 세계가 섞이고 아무개의 세계가 또 새어 들어와 문제가 생기고, 순백의 피해자이고 싶은 사람들은 끝없는 합리화와 타인에의 책임 전가를 본인도 모르는 새에 저지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원인은 하나에만 있지 않다. 네 성격이 그런 건 네 환경이 그런 탓이고, 네 환경은 너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니까, 사실 네 성격이 아무리 그랬어도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커지진 않았을 텐데, 애초에 네 환경이 그랬어도 그렇게 자라지 않았을 수도 있긴 하고, 근데 그럼 쟤는 왜 안 말렸니, 그 사람은 뭐했다니, 모를 수도 있긴 한데 알 수도 있었잖아, 이게 네 일이 아니면 누구 일인데, 걔 상황은 알겠는데 일이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도 있었던 거잖아, 따위의 연쇄된 전가와 돌고 도는 원망. 그리고 실제로 원인은 수많은 사람과 사건에 걸쳐있기에, 누구 한 명 무엇 하나가 잘못되어서 결국 일이 틀어졌다는 식의 판단은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바질과 초설을 초록별로 보낸 건 오로지 내 탓이다. 명백하게도. 환경도 내가 만들었고, 물도 영양제도 내가 줬다. 내가 주지 못한 건 햇빛과 더 꾸준했어야 했던 관심 정도가 있겠다. 햇빛 하나론 이렇게 순식간에 마를 수 없다. 하물며 요즘은 식물등燈도 잘 나와 햇빛이 없는 곳에서도 식물을 키울 수 있다. 그러니 날씨에 책임을 전가한다 쳐도 조명을 구입하지 않은 내 탓이 된다. 적당히 쳐다보지도 않다가 제때 적당한 시선을 주지도 않아서 이렇게 된 거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이 비겁하고 찌질한 천성은 어찌해야 죽일 수 있을까. 잘 자라는 애들도 더러 있지만, 이 애들도 언제 갑자기 야윌지 모르는 일이라 아침마다 괜히 화분들을 들었다 내놓고 이파리가 억센지 만져본다. 화분 사이를 뛰어다니는 해충이 다른 애들에게도 옮겨갔을까 발만 동동이다. 속수무책으로 둘이나 보내놓고 또 당할 수는 없다. 요즘은 마른장마에 쨍하던 색들도 많이 바랬다. 하늘이 야속할 때야 많지만 겨우 이 조그만 화분들 때문에 이만치 야속해야 할까.

 

 

[크기변환]물꽂이.jpg

 

 

사실 무언가를 책임지는 데에는 인이 박였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먹여 살려야 할 내가 있으니까. 스스로를 둘러메고 달려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을 어깨에 올리고 허리에 매달아왔을 텐데, 이상하게 이 6개의 화분이 내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새삼 기분이 이상하다. 얘네는 정말 알아서 자라지 못하는 존재인 건가. 보살펴주는 사람이 진짜 필요할까. 현관에 들어서던 날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것이 건강해 보여서,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물을 찾아 마시고 백날 해가 들지 않아도 잘 버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필요했었다. 그러니까 너희도 필요하겠지. 마찬가지겠지. 어떤 형태의 삶이든 그건 다 같겠지.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게 만들 만큼 푸르렀을지라도.

 

보살피고 가꾸고 내년에도 꽃을 피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파르스름한 생명들을 살릴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아찔하지만 어떻게든 해보아야겠다. 그렇게 내년에 풍성한 새잎과 빛깔 좋은 꽃잎을 보여주면, 또 다음 해를 기약하며 화분을 갈고 물을 주고 그래야지. 날이 좋으면 해가 잘 드는 곳에 놓아주고, 겉흙이 마르면 물을 주고, 마른 잎들은 과감히 떼어내고, 은근한 관심이라는 핑계로 방치하는 일 따위 더는 없게, 그렇게 꾸준히. 화분 사이를 넘나드는 벌레에 대한 필승법도 더 찾아봐야지.

 

 

[크기변환]배롱.jpg

 

 

한여름 협죽도와 배롱나무만 어여삐 볼 게 아니라 자그마한 방 안 붉고 노랗고 흰 꽃잎과 파란 잎부터 눈에 담아야겠다. 화분을 놓아둔 창가 앞에 앉으면 짙은 향이 물씬 풍기는데, 그럴 때면 내가 조용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와닿는다. 그 내음이 해가 갈수록 짙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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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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