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나온 것을 그리워한다는 건 - 레이디 버드 [영화]

그레타 거윅, <레이디 버드>(2017)
글 입력 2024.08.01 12:0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새크라멘토에 사는, 빛바랜 붉은 색 머리를 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곧잘 소리를 지르는, 싸울 줄 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솔직한, 그렇기에 주저하지 않고 행동할 줄 아는, 스스로에게 이름을 부여한, 10대 소녀. 그 어느 것도 지금의 나와는 닮은 부분이 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이토록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뭘까.

 

어떤 영화는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에 빠져들고 싶게 하고, 어떤 영화는 영화의 요소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깊이 이야기하고 싶게 만든다. 그렇다면 <레이디버드>는, 영화 속 누군가가 아닌 나에 대해서 더 생각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다. 새크라멘토에 사는 10대 백인 소녀가 겪어 온 사춘기의 방황과 깨달음, 자기 호명, 관계의 불화와 재정립까지. 그 모든 것은 내가 겪어 온 어떤 이야기와는 분명 닮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이 익숙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게 참 묘하다. 좋은 것 같기도, 싫은 것 같기도.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watcha-watch-m5aV1Av-2024-08-01-00_08_58.jpg

 

 

그 모호한 선호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레이디버드>는 부정할 수 없이 푸르르고 씁쓸한 ‘성장’의 양면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성장’해본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 영화에 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마치 여성(Lady)의 머리에 붙은 새(Bird)의 몸처럼, 누구나 한번쯤은 여성도 아니고 새도 아닌, 그토록 이질적인 것들을 기워 붙인 생명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희망과 절망, 즐거움과 슬픔, 결핍과 충족,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의 격차. 그런 것들은 아마 생의 매 순간 반복될테지만, 그러한 삶의 진실을 처음 맞이하는 첫 순간은 더욱 괴로울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 사춘기라는 어린 날의 한 시기를 유난스럽게 기억하게 되는 것 아닐까. 이미 그 시기를 몽땅 다 지나온 사람이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스스로를 ‘크리스틴’이 아닌 ‘레이디버드’로 불러달라며 당차게 외치는, 영화 속 그 사춘기 소녀는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다. 국기가 걸린 푸른 벽의 저택이 아닌 기찻길 옆 구린 동네에 살더라도, 고대하던 첫사랑의 로망이 처참하게 깨져버렸대도, 멋지게 차려입고 참가했던 뮤지컬 오디션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을 맡게 되었대도 말이다. 그녀는 그 모든 실망과 실패를 겪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행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가진 인간이다.

 


[포맷변환]screencapture-watcha-watch-m5aV1Av-2024-08-01-00_09_39.jpg

 

 

청춘이 어떻다느니,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다. 청춘이라는 것은 마냥 예찬되어야만 하는 성역의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가 자꾸 청춘에 대해 떠들게 되는 것은 아마 크리스틴, 아니 레이디버드가 보여준 그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희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마치 언제나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아니 어쩌면 타인의 삶의 주인공 자리를 당당히 꿰찰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그 희망찬 오만함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청춘을 논하며 자꾸 그곳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그때의 그 곳, 그때의 그 상황이 아니라, 내가 나를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희망할 수 있었던 자기 자신을 그리워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 그 자체를 긍정하던 날들. 어느 정도의 타협이나 양보로 이 정도의 존재나 위치를 만족하는 그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낙관 말고, 나라는 사람의 모호한 그 가능성 하나만을 무모하게 신뢰할 수 있었던 그 철없던 당시를 말이다.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watcha-watch-m5aV1Av-2024-08-01-00_14_30.jpg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watcha-watch-m5aV1Av-2024-08-01-00_13_26.jpg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watcha-watch-m5aV1Av-2024-08-01-00_13_50.jpg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watcha-watch-m5aV1Av-2024-08-01-00_14_04.jpg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그 무모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 그곳에서 그때의 철없는 희망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레이디버드는 그 격동의 열여덟을 지낸 뒤 자신의 알록달록한 방을 하얗게 덧칠한다. 그리고 그렇게 갈망했던 뉴욕에 도착한다. 뉴요커가 되고자 했던 열여덟의 레이디버드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자신을 크리스틴으로 소개한다. 언젠가의 크리스틴은 레이디버드가, 그리고 레이디버드는 그렇게 다시 크리스틴이 된다.

 

그렇게 원하던 뉴요커가 된 크리스틴은 어쩐지 차분하다. 파티에서 술을 마시다 응급실에 실려 간 크리스틴은 돌연 교회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모님이 부여한 자신의 이름을 긍정하게 된다. 그녀는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는 나의 이름과 내가 지나온 어떤 것들을 생각하며 새크라멘토의 도로를 달린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혼란의 당시에는 그것들의 소중함을 전혀 알아챌 수 없다는 것이 분통하지만, 그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데에서 내 삶의 엉망이었던 순간을 새로이 긍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그리 억울하지도 않은 것 같다. 새삼스레 자꾸 내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나는 크리스틴보다 한참은 더 와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난 레이디버드이고 싶고, 크리스틴이 되기에는 한참 먼 듯싶다. 그러다가도 생각해보면 아주 옛날에 이미 레이디버드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크리스틴으로서의 인생을 살아온 것 같기도. 

 

어느 곳에 내가 있는 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다. 어쩌면 조금 더 나중에야 알게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차수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