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알고 보면 - 무서운 그림들

글 입력 2024.08.02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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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에서 ‘알고 보면 무서운 사진’, 또는 ‘이해하면 무서운 이야기’를 종종 만날 것이다. 도서 <무서운 그림들>도 그러한 명화를 소개하는 책이리라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이 책 속의 명화들은 무서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무섭지 않은’ 그림인 것도 같다. 어쨌든 공통점은 ‘알고 보면’.

 

 

무서운 그림들_평면표지.jpg


 

<무서운 그림들>은 ‘삶과 죽음 사이’, ‘환상과 현실 사이’, ‘잔혹과 슬픔 사이’, 그리고 ‘신비와 비밀 사이’ 총 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네댓 명의 화가를 소개한다. 목차에는 화가의 이름과 함께 작품의 제목을 하나씩만 적어두었지만 이 책에서 화가 한 명당 하나의 작품만 소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의 대표작 혹은 이 책에서 조명하는 작품을 한 가지 골라 목차에 적은 것일 테고, 본문에서는 해당 작가의 작품을 여럿 보여준다. 그림 자체를 파고드는 것보다도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을 파고듦으로써 이러한 그림이 어떻게 나왔는지 이야기하는 데 열중하는 책이기에 한 화가의 작품 서너 개를 차근차근 꺼내놓는 그 형식이 적절하다. 덕분에 목차에서 메인으로 삼은 작품 외에도 다른 그림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그 다른 그림들이 더 기억에 남은 경우도 있었다.

 

 

 

아르놀트 뵈클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


 

첫 장의 첫 화가는 아르놀트 뵈클린이다. 화두를 여는 작품은 <페스트>이고 이 그림도 분명 강렬하지만,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이 더 흥미로웠다. 실제로 이 작품을 베를린 구 국립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 그림에 궁금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제목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 속에는 붓을 들고 있는 뵈클린 본인과, 뵈클린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듯 또는 그를 비웃듯이 그 뒤에 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해골 모습의 죽음이 담겨 있다. 그림 속 뵈클린의 표정은 오묘하다. 밝은 표정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공포에 떨고 있느냐 물으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게 내 감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그가 등 뒤의 해골, 그러니까 죽음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가 궁금했다.


뵈클린은 가까운 이의 죽음을 여럿 경험했다. 현대와 비교하여 역사 속 인물들 대부분이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긴 했지만, 뵈클린의 삶은 그중에서도 유난하게 보인다. 그는 자식의 죽음을 세 번이나 겪었고(저 그림을 그린 시점 기준으로 세 번일 뿐이고, 그 이후로도 더 많은 자식을 잃었다.) 이러한 그의 상황이 그림에도 드러났다. 물론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닌 이상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해석하고 이 책도 그렇게 말한다.

 


그간의 풍경화, 신화화와는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뵈클린은 눈을 부릅뜬 채 화구를 쥐고 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섬뜩한 몰골의 해골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사실은 늘 죽음의 공포와 함께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을까.

 

(p.21)

 


생각해 보면, 바이올린이 관건인 것 같다. 죽음이 그냥 뒤에 서 있기만 했다면 뵈클린이 앞을 보느라 죽음을 느끼지 못했다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이 그림 속에서 죽음은 연주를 한다. 이야기를 알고 보니 이번에는 뵈클린의 표정이 죽음의 소리가 들리는데도 필사적으로 외면하는 듯이 보인다.

 

 

 

오딜롱 르동, <흰 꽃병과 꽃>



아르놀트 뵈클린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은 그림만 먼저 알고 있던 상태에서 이야기를 뒤늦게 알게 되며 새로운 감상을 받은 경우라면, 오딜롱 르동의 <흰 꽃병과 꽃>은 반대의 경우에 가깝다.


미술에 관해 아는 게 없는 내게는 르동이라는 이름부터가 생소했고 그의 작품도 여기서 처음 보았다. 르동의 초기 그림은, 가혹하게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을 본 유치원 선생님이 충격을 받아서 학부모 상담을 신청할 것만 같은, 그런 그림이다. 검고 기이하다.


부모로부터 외면받은 르동의 어린 시절이 이런 화풍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주류인 만큼, 내가 받은 감상이 그리 독특한 것도 아닐 테다. 르동은 검은 그림을 많이 남겼지만, 점차 색을 입히며 서정적인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그림 속 특유의 어둠은 여전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다음 장을 넘겨서 나온 그림에 진심으로 놀랐다.

 


르동은 붓을 탁 내려놨다. 완성이었다. 그는 무의식 속에 방치했던 케케묵은 감정, 이를테면 사랑받고 싶던 욕망과 버려졌다는 절망 등을 화폭에 잔뜩 쏟아부었다. 르동은 그제야 검은 기억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 그리고 보니 1914년, 어느덧 생의 끝자락이었다.

 

(p.239)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르동의 그림이자 르동의 생에서도 끝 무렵에 해당하는 그림, <흰 꽃병과 꽃>에서는 어둠의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은근히 푸르스름한 빛이 돌아 오묘함이 남기는 하지만, 일단은 따뜻한 색으로 알록달록 꾸며진 화병이다. 미술 작품을 소개하는 책에서 ‘반전’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일 만큼, 내게 충격적인 그림이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과거를 극복한 것 같다. 적어도 이 그림 안에서는 그렇다.


이 화병 그림을 아무런 이야기도 알지 못하고 그냥 보았다면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많고 많은 꽃과 꽃병 그림 중 하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넘어갔을 법한 그림인데, 이 그림을 그리기까지 르동이 지나온 시간을 글 몇 줄로나마 엿보고 나니 전혀 다른 감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모르고 보기’,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고 보다가 관심이 생기면 좀 알아보고 다시 보기’ 정도를 즐기는 편이지만, 오랜만에 책 한 권으로 편하고 재밌게 ‘알고 보기’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김지수_아트인사이트컬쳐리스트.jpg

 

 

[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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