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내 인생의 찬란한 트리거가 되어줄래? - 빵야

글 입력 2024.08.0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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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2024 빵야 포스터.jpg

 

 

내가 기쁜 이야기를 하나 만들면 세상에 기쁜 일 하나가 생겨나요.

 

내가 슬픈 이야기를 하나 만들면 세상에 슬픈 일 하나가 사라져요.

 

 

극이 막을 여는 극초반, 작가인 나나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기쁜 이야기 하나를 더 창조했으니, 세상의 기쁨을 하나 늘렸고,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 그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어루만져주었으니, 세상의 슬픔을 하나 치유해 준 것이다. 이 대사를 보는 순간 이 극이 어떤 극으로 흘러갈지 설레어 심장이 쿵쾅댔다. <빵야>는 기쁨을 가져다줄 작품이었을까, 슬픔을 위로해 줄 작품이었을까?

 

 

[크기변환]2024 연극 빵야 보도자료 배포사진_5_제공_엠비제트컴퍼니.jpg

 

 

 

방아쇠가 손 앞에 놓인 순간


 

<빵야> 희곡집의 영어 제목은 ‘TRIGGER(트리거)’다. 실제로 작가 역시 이 작품의 제목을 처음에는 ‘트리거’로 정하고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트리거 사격에서, 소총 또는 권총의 총알을 발사하게 하는 장치다. 총이 ‘빵야’하고 나갈 수 있게 만드는 방아쇠.


작가에게 방아쇠 역할을 하는 것은 뭘까? 새로운 이야기의 중심이 될 소재가 마음속에 들어온 순간일 것이다. 새로운 작품의 초석이 될 새로운 소재. 그 소재는 내가 찾는 것이지만 사실 완전히 나의 자의적 행동은 아니다. 작가가 작품을 다 쓰고 ‘캐릭터가 마음대로 움직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소재가 내 마음에 풍덩 빠지는 것 역시 소재의 마음이다.

 

 

너!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왔어?

어디서 어떻게 살다가 나한테 왔어?

고마워, 나한테 와줘서.

 

 

나나는 빵야를 본 첫눈에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게 되고, 마음속에 빵야가 풍덩 빠져버린다. 빵야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45년 만들어진 일본군의 주력 소총인 99식 소총이었다. 1945년까지 무려 300만 정이 생산되었고, 시리얼넘버가 7만 7천 번대인 빵야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이자 우리나라가 독립한 해인 1945년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가 독립할 즈음 만들어진 일본식 소총이, 우리나라 안에서 그렇게 많이 쓰일 일이 뭐가 있었을까.


 

[크기변환]2024 연극 빵야 보도자료 배포사진_1_제공_엠비제트컴퍼니.jpg

 

 

 

‘트리거 덩어리’의 위로 방식


 

빵야는, 인천의 공장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어린 학생의 손에 문양이 새겨지고, 군수 열차에 실려 만주로 운송되어 조선인이면서 같은 조선인을 짓밟던 일본 관동군 장교의 총이 되었다가, 그저 음악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서해 작은 마을의 소년이었던 일등병 길남의 총이 되었다가, 장군인 아버지를 잃고 자신이 장군이 된 중국 팔로군 전사 선녀의 총이 되었다가, 그저 밥 한 끼 배불리 먹는 게 꿈이었던 국방경비대 이등병 양무근의 총이 되었다.


공산당으로부터 죽은 아버지를 묻지도 못하고 피눈물을 삼켜 그릇된 복수 의식을 가진 서북청년단원 신출의 총이 되었다가, 고운 손으로 함께 피아노를 치던 이웃에서 적이 되어버린 원교와 아미의 총이 되었다가, 지게꾼이었던 보아라 부대원 동식의 총이 되었다가, 어릴 때부터 전쟁터에서 살았던 빨치산 소년돌격대장 설화의 총이 되었다.


흔히들 트리거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특히, 영화를 비롯한 작품이 시작될 때 ‘트리거 워닝’이라는 문구가 뜰 때가 있다. 해당 콘텐츠에 트라우마를 유발하거나 자극할 수 있는 소재를 담고 있기에 주의하라는 뜻으로 서두에 띄우는 경고문이다. 과거의 경험을 재경험하도록 만드는 자극 그 자체를 트리거라고 칭할 때도 많다.


‘빵야’는 어쩌면 존재 자체로 트리거 덩어리이다. 수많은 한국 역사를 지내며, 누군가의 친구와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존재. 빵야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역사를 드러내어 불특정 다수를 슬프게 할 수 있는 총, 빵야, 트리거 그 자체. 많은 이들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존재.


그러나 연극 <빵야>에서는 그 총 자체인 ‘빵야’의 트라우마를 살피는 방식으로 극이 진행된다. 남들이 보면 트리거 덩어리인 존재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트리거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과거 현대사에 대한 아픔을 오히려 객체화하여 한 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을 겪었을 소총의 아픔과 고단함과 슬픔에 공감하고 그 소총을 위로하는 일은 결국 그 일을 함께 나누고 있는 후세대인 우리를 스스로 위로하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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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여, ‘우리’


 

빵야의 세 번째 주인이었던 중국 팔로군 전사 선녀의 이야기에서, 선녀의 아버지는 고향에 있던 선녀바위 전설을 들려준다. 월출산 아래 선녀골, 그 바위에 1년에 한 번 선녀들이 내려와 날이 샐 때까지 밤새 바위를 밟는다고, 바위가 다 닳아 없어져야 좋은 세상이 온다고 말한다. 왜 그 선녀들은 1년에 하루밖에 안 오냐며, 그 큰 바위가 언제 다 닳겠냐는 말에 아버지는 대답한다.


 

그래도 선녀들은 와.

오고 또 와.

밟고 또 밟다 보면 바위는 닳아.

오래 걸려도 천년만년 수억 년이 걸려도 언젠가는 닳아.

언젠가는 닳아 없어져.

한 번은 밟아.

한 번은 밟고 가야 돼. 이 세상 왔다 가는 도리야.

 

 

죽음 앞에서 딸에게 해 준 마지막 이야기인 아버지의 선녀바위 설화. 죽은 아버지를 묻을 때 선녀는 구멍 난 군화 사이로 삐져나온 아버지의 발가락을 보았다. 다 닳아 없어진 발가락의 지문. 언젠가 선녀는 자신의 발가락 지문 역시 아버지처럼 다 닳아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래서 자기 죽음 앞에서도 두렵지 않았다. 바위를 밟고 비빈 자신의 지문을 믿었고, 바위를 밟고 비빌 수많은 지문을 믿을 수 있었기에.

 

 

나는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나는 빵야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과거의 비극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대해, 내가 그런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다. 이 극이 너무 좋다고 글을 쓰는 나, 그러나 모든 역사를 통달하여 잘 알지 못하고 역사에 대해 무지함이 존재하는 나, 이런 나는 이 극이 좋다고 남에게 말할 자격이 있나.


1945년 8월에 살았던 사람들이 말했던 좋은 세상이 오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말에, 광복 78주년을 앞둔 2024년 8월의 내가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소비하는 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고민을 하며,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여 나도 한국 역사의 큰 줄기 속 ‘우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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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트리거가 될 순간


 

 

내가 널 불러낸 이유를 알았어.

나는 나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나는 나를 쏴 죽일 거야.

다시 태어날 거야.

나는 나부터 쏴 죽일 거야.

네가 나의 트리거가 돼야 해. 알았어?

 

 

나나가 빵야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순간, 빵야의 세월을 공부하고 놓칠 수 없다고 각오한 순간, 같이 이야기의 죽음까지 갈 다짐을 한 순간, 나나는 극 제목을 ‘트리거’로 정하며 빵야에게 이렇게 말한다. 트리거가 되는 이야기를 쓸 거라고. 나나의 작품 인생에서도 첫 발사를 할 수 있는 방아쇠가 될 수 있는 이야기이자, 작가 인생에서도 새로 태어날 수 있는 방아쇠가 될 수 있도록.


<빵야>의 1막을 보며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았다.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으면서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너무 궁금해, 콩닥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2막을 기다리며 객석에 앉아 있던 기억이 선명하다. 휘몰아치는 전개, 숨 쉴 틈 없는 대사의 티키타카, 뛰어난 배우들의 기량, 꽉꽉 채운 연출, 과거임을 알면서도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는 이야기.


극을 다 본 후 다시 희곡을 읽으니, 나나와 빵야 모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나는 작가 인생의 죽음을 각오하고 시작했고, 빵야는 단 하나의 소원을 약속하며 시작했다. 빵야가 좋은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뻔하지 않다는 점이다. 목숨을 걸었다고 성공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목숨을 걸고 실패해도, 또 살면 그만이다.


극의 극 후반부, 빵야는 나나가 극초반에 이야기했던 대사를 조금 다르게 말한다.

 

 

저 말은 좀 건방져.

내가 작가라면 이렇게 말할 거야.

내가 이야기 하나를 힘들게 쓰면 힘든 사람 하나가 잠시 쉬게 될지도 몰라요.

내가 이야기 하나를 아프게 쓰면 아픈 사람 하나가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라요.

 

 

힘들고 아팠던 두 존재인 빵야와 나나는 함께 모험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그들이 치유되는 모습을 보며 극을 보는 나도 위로를 받았고,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며 위로를 주는 방식을 통해, 내가 속한 한국 역사에 위로하는 동시에 역사에 위로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긍정적인 트리거가 될 극, <빵야>. 총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좌절과 상처를 치유 받을 수 있는 경험을 모두가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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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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