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저도 천천히 뭉근하게 나아가고 있어요 [도서/문학]

안미옥 시인의 시집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글 입력 2024.08.04 19:3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안미옥커버.jpg

 

 

 

여름이 왔어, 시를 읽자


 

시를 음독(音讀)하는 것은 내 오랜 여름 습관이다. 음독하게 되면 글을 체화하는 기분이 든다.


앞을 똑바로 보거나 숨을 깊게 들이쉬기 불편할 만큼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더위를 피하고자 빠른 걸음으로 날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항상 동반되는 어떤 것들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을 곁에 두고 지나치게 선명한 이 여름을 보내려면 뭉근하고 느릿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느린 호흡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 찬찬히 뜯어보고 입 밖으로 소리를 내며 숨겨진 말들과 눈을 맞춘다.


이번 여름에는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시집을 만났다. 안미옥 시인의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를 소개한다.

 

 

 

난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어, 이 넘어짐에 무던해져 보려고


 

안미옥 시인은 2년 전에 <온>이라는 시집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시인의 작품들을 사랑하게 된 건, 작품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그의 원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난 삶은 휘몰아치고 지나치게 강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어물쩍하게 뒤섞이고 흘러가다가, 찰나의 고열들을 깊게 간직하여 오래오래 보글거리면서 끓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 고요하게 앉아서 요동치는 마음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영 모르겠음과 어리둥절함도 담겨 있지요. 지금의 저는 최대치로 멀리 가려다가도 무릎을 툭툭 털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는 사람으로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이 자리에 처음 앉아보는 사람처럼요. 저는 여전히 “넘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순간들을 좋아합니다. 정말로 잘 넘어지고 싶고, 넘어지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게 아니라, 넘어진 것을 삶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사람으로 있고 싶어요. 무던한 용기를 갖고 싶어요. _<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소개 글


안미옥 시인은 삶에서 포착되는, 조용하게 삶의 찬란을 바라던 사색을 상기시키는 시를 적는다. 일상을 산다는 건 사실 단숨에 무언가를 잡아채는 장면보다는 느릿하게 손에 있던 것을 어루만지던 장면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지 않은가. 시인은 그런 부분을 신중하게 손으로 움푹 퍼서 활자로 엮어낸다.

 

 

 

내가 문을 연 걸까, 닫아도 네가 보여


 

 

아주 열린 문.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

나는 자꾸 녹이 슬고 뒤틀려 맞추려 해도 맞춰지지 않았던 내 방 문틀을 생각하게 돼. 아무리 닫아도 안이 훤히 보이는 방. 작은 조각의 침묵도 허락되지 않던 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주 사적인 시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아서.

네 문을 닫아보려고 했어. 가까이 가면 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비틀어진 틈으로 얼굴을 밀어 넣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게 되었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가진 것은 모두 문밖에 나와 있었고, 나는 그게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으려 했다.

···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마다 네 생각이 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일들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하더라.


안녕. 잘 지내. 여름을 잘 보내

 

여름잠 中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부분은 '집'과 집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삶을 '공간적으로' 사유해 보기를 권한다. 공간적으로 삶을 사유한다고 함은, 삶에 대해 발전이나 성숙, 성장과 같은 키워드에 집중한 시간적 사유를 잠시 멈추고 삶은 공간으로서 인식함으로써 삶은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으로 말해질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다.


시집에 수록된 김나영 문학평론가의 해설에 의하면, 한번 지어지면 움직이지 않는 집처럼 삶 또한 세월이 흐르고 특정 충격에 의하여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평생 부동한 채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언제나 누군가와 공존하고, 함께 있는 이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정리와 분리의 필요에 시달리는 것. '나'를 구성하고 표방하는 것들이 담긴 공간과 외부 세계. 전자를 시인은 삶이자 집으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문'이란 나의 공간과 외부 세계를 잇는 매개체가 된다. 아주 열린 문을 가진 '너'와 닫아보려 해도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을 가진 '나'. 꼭꼭 감추고 싶었지만 결국은 다 보여주고 말았던 나의 모습과 숨겨둔 게 있을 거라고 확신했으나 사실 모두 내어놓은 것이었던 너의 모습. 각자의 공간을 나와 다른 방법으로 세계와 구분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세상을 다르게 대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삶이라는 건 대개 그렇게 조용히 섞여가는 것이니까. 문은 문이래도 모양과 색은 너무나도 제각각이다. 그래도 '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 눈을 곧게 바라보는 어린아이


 

 

미끄럼틀을 거꾸로 오른다

내려오던 아이가 잡아준다고 손을 내밀었다

손과 발에 힘을 더 주어 내민 손까지 올라갔다


단단한 껍질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출렁여도 단단한 사람이 된다


다친 무릎 위에 딱지가 앉는다 낫는 것이라는데


내가 겪는 시간을 모르는 채로

누군가 했던 말이

숨이 찬 순간마다 떠오른다


강하다고 믿고 싶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이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선량 中

 

 

내 스스로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는 어렸던 나를 생각한다. 나는 그 아이를 생각하면 종종 슬퍼지지만, 그 애 덕분에 다시 곧게 허리를 펼 수 있다. 그 애가 살고 싶던 삶을 살아주고 싶어.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슬퍼서는 안 돼, 하고 자세를 고쳐 잡는 것이다.


<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에서 등장하는 '아이'는 내 삶 속의 '어린 나'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선량'에서 화자는 미끄럼틀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나의 손을 외려 다잡아주는 아이를 통해 자신이 그리 단단한 사람이 아님을 상기한다. 그렇지만 곧바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라며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의 약하고 병든 지점을 거듭 바로 보게 하는 역할. 은폐되어 있던 부분을 들춰내면 당장은 고통스러울지언정 도려내든 꿰매든 고쳐볼 수 있다. 때로는 순응과 응시 같은 작은 움직임마저 그 자체로 용기가 된다. 그저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용기로 써먹힐 때가 있는 것이다.

 

 

 

존재의 맹렬함이 한바탕 나를 괴롭히고 나면


 

 

무언가 쌓여 있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깊고 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서 파고 파면 무언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단정 짓고 확정하고 테두리를 견고하게 만들면서


아래로 아래로


지나온 시간은 전부 수면 아래 있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발 디딜 곳


너무 깊은 곳까지 내려가느라

수면 위에 있던 내가 아주 사라져버렸다

 

잠영 中

 

 

안미옥 시인이 작품 속에서 한 가지 더 집중하는 것은 바로 '있음'이다. 존재하는 것. 시인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즉 이해할 수 없음을 시인함으로써 어떤 존재를 받아들인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명명하지 못한 관계가 있다. 흐릿한 관계가 미련을 남긴다. 왜 '흐릿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골몰한다. 그래서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건과 관계는 일정한 값으로 답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자로 잰 후 관계를 뚝뚝 자를 수 없고, 사고 흐름의 툴을 구축할 수도 없다. 감정을 인공 지능에게 생성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짓눌린 마음을 계속 가지고 살아가는 건 너무 가혹하기에, 우리는 늘 납득 가능한 이해를 통해 내려진 결론과 결괏값이 '실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해하고자 실재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본 목적을 잊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그저 어떠한 형태로 '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본 모습 그대로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안미옥 시인은 시의 반복과 계속을 통해 과격함을 지양함을 드러낸다. 너무 빠르고, 너무 명확하고, 너무도 쉽게 이해되는 것들. 삶에는 그렇지 못한 순간들과 사람들도 많다고. 그래서 슬퍼지고 침묵하게 되겠지만 그런 걸 당연한 내 삶의 한 폭으로 받아들이자고. 그저 그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이다. 

 

여름엔 자주 숨이 모자라다. 밭은 숨을 내쉬다가 생각한다. 오늘은 시를 읽어야겠다고. 여름에는 삶의 뭉근함을 깨닫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느릿하게 흐르는 물을 훔쳐내고 과하게 뜨거워진 땅바닥을 딛고 서 있대도, 무언가를 지켜낸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


안미옥 시인의 작품들이 당신에게도 잠시 숨을 고를 한순간이 되기를 바란다.

 

 

 

아트인사이트 명함.jpg

 

 

[황지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