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못다 읽은 책 읽기 [도서/문학]

그 책은 바로 샤를 페팽의 <만남이라는 모험>
글 입력 2024.08.0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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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무척이나 청개구리. 죽을만큼 하고 싶다가도 누군가 나에게 먼지 한 톨만한 압박이라도 들이밀면 얼굴을 훽! 돌리고는 정을 떼어버렸다. 여섯 살 즈음부터 시작했던 구몬 학습지도, 글자를 또박 또박 예쁘게 써 숙제를 ‘채워나가는 것'이 꽤나 만족스러운 과업이었다만, 매일매일 해내기를 기대하는 엄마와 선생님의 압박이 어린 나로 하여금 종이 쪼가리들을 책장에 쑤셔 넣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여섯 살로부터 훌쩍 멀어졌지만 마음속에 숨겨둔 청개구리가 한 마리 있다. 스무 살이 된 이후로 부모님도 선생님도 딱히 나를 압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청개구리는 오직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만 반응하고 있다. 가령 ‘아 이거 해야 하는데…’라는 과업이 있다면, 절대 하지 않는다. ‘오늘부터 다이어트니까 간식 같은 것 절대로 먹지 않을 거야.’라는 경우에는 절대 과자를 먹는다. 책도 그렇다. 나의 경우,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이 책이고 책과 함께 있는 시간이지만, 산더미처럼 쌓여 자신을 읽어달라고 나를 압박하는 책 앞에서는 누구보다 차가운 여자가 된다. ‘안돼. 돌아가.’ 하며. 특히나 귀찮게 구는 것은 읽다 만 책이다. 두꺼운 몸체 사이에 책갈피가 꽂혀서는 지금 당장 읽지 않으면 저를 까먹게 될 거라고 징징대는 듯하니까. 내 안의 청개구리는 말한다. 안돼. 돌아가.

 

그렇게 쌓이고 쌓인 책이 열댓 권. 무시하고 이를 지나다닌 지가 어연 반 년이 된 것도 같다. 어느 날 문득 바라본 나의 책장. 두툼하게 쌓여있는 책들은 내가 좋아하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나의 청개구리가 반응하기 전에 ‘읽어야 한다.’라는 생각 없이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만남이라는 모험>. 샤를 페팽 지음. 한창 새로운 만남이 많이 오고 갔던 신년에 구매한 책인 것 같다. 표지는 마치 빠르게 달리는 버스에서 내다본 창밖이다. 그 속에 위치한 “미지의 타인과 낯선 무언가가 하나의 의미가 될 때.”라는 문구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었다. 언제쯤 읽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남아있을 것이 틀림없는 약간 번진 연필 자국부터 찾아본다.

 

*

 

[플라톤이 말했듯이 우리가 철학을 하려면, 그리고 타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려면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 물론 우리로 하여금 타자성의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사랑과 우정뿐만은 아니다. 책에 대한 사랑, 우리의 시야를 열어줄 수 있는 작품들에 대한 사랑, 작가를 향해 품고 있는 그 특별한 사랑 역시 타자성을 경험하도록 해준다. ] - 98P 

 

우리가 타인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려면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 위에 그려진 별 두 개. 다시 읽어도 무언가 진리처럼 느껴지는 문장이다. 타인과의 만남은 미지의 가능성인 것처럼, 한 타인은 어느날 갑자기 나의 삶에 찾아와 나의 일상을 통째로 흔들 수 있고, 혹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채 사라질 수도 있다. 

 

곧장 사랑했던 아이가 좋아한다던 영화를 보고있는 어린 날의 ‘타자성의 경험’을 떠올린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좋아하게 되었던 그 시절의 경험 말이다. 여기서 ‘타자성의 경험’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것은,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릴 때 나의 눈에도 항상 눈물이 고였다는 것, 그 아이가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는 나 또한 마음 가득 행복한 여자였다는 것. 나는 이렇게 내 삶을 통째로 흔드는 한 타인을 사랑하며 내가 아닌 것들에게 정성을 들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고, 남의 감정을 파악하는 부드러운 섬세함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씨네필 뺨치게 영화를 사랑하게 된 사실도 빼놓지 않겠다. 다정함과 섬세함, 이는 내가 타인을 만나 발견한 나의 새로운 차원이며, 지금까지도 나를 이루는 요소임이 분명하다. 이 타자성의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는 다정한 친구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열정적인 애인이 되었으므로.  

 

마이클 잭슨의 유명한 노래 중에도 당신이 나타났기에 내가 걷는 길과 말하는 방식, 느끼는 것들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You Rock My World’라는 노래가 있지 않은가. 제목과 가사 그대로 사랑하는 나의 타자는 고요하게 존재하던 내 세상을 이리저리 흔들고 뒤섞는다는 만국 공통의 진리.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이며, 나는 타인의 눈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 

 

*

 

책장을 쉴 새 없이 넘기다 보니 문득 언젠가 읽었던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거리 거닐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차례 읽은 탓에 쉽게 잊히지 않는 그런 구절이다.

 

[헌책은 길들지 않은, 부랑하는 책이다. 오합지졸의 책들이 엄청난 무리를 이루어 모여 있기에, 서재의 길든 책들에게는 없는 매력이 있다. 더욱이 이처럼 아무렇게나 잡다하게 모인 무리에서 우리는 운이 좋으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벗이 될 완벽한 이방인과 스칠 수 있다.]

 

완벽한 이방인. 우리가 '만남이라는 모험'을 통해 만나길 고대하는 대상을 표현하기에 적확한 표현이다. 샤를 페팽은 버지니아 울프가 언급한 '완벽한 이방인'과 같은 존재와 마주치기 위해서, 현실의 존재들을 향해 곤두선 '주의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내면을 완전히 개방하여 확고한 생각을 갖지 않고 특정한 기준을 세우지도 않으며,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 일종의 '개방성'도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이 때, 샤를 페팽이 말하는 '주의력'을, 한 곳에만 의식을 모으는 '집중력'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집중력과는 달리, 마치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의 등굣길처럼 앞을 거대하게 가로막는 한 그루의 나무나 발에 차이는 돌멩이에 앞에서 자신을 망각한 채 멈춰서는 것이 샤를 페팽이 말하는 '주의력'이다. 

 

예를 들어 햇빛을 맞으며 혼자 무작정 걷다 마주친 공원, 미술관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작품 한 점, 셔플 재생 중 들려온 음악 하나도 우리에게 '주의력'이 있다면 그 자체로 '만남'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만남은 외부에서 다시 내부로 돌아와 우리의 마음 속 특정한 곳을 자극해 변화를 도모할 수 있고, 이 내부의 변화는 다시 외부로 돌아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즉, 만남이란 변화의 선순환. 작가가 <결론>에서 언급하는 말처럼 말이다. "하나의 만남을 통해 타인을 발견하는 것, 아니 그보다 더 발전해서 영속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은 세상과의 만남을 뜻하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자신과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고 하나의 우정이 피어날 때 우리는 꽃과 나무, 불과 돌멩이를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

 

나는 책을 덮으며 샤를 페팽과 그가 인용한 철학자의 말들이 나의 내면에 남긴 변화를 눈치챘다. 그것은 카뮈가 <여름>, <결혼>  등 몇 권의 책을 통해 이 작가에게 심어주었던 문제의식 또는 윤리가 내게도 생겼다는 것이다. 그 윤리란 첫 번째, 언제나 ‘새로운 만남’을 선택할 것. 두 번째, 무엇이든 사랑할 것. 이는 이를테면 언제나 떠나기를 선택하고, 그렇게 만난 풍경과 햇빛, 사람과 나 자신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의식이다. 또한 고여있기보다는 흐르기를 선택하고, 내가 만난 실수와 성공이 나를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진정한 삶 또는 자아를 발견하려는 나의 욕망임을, 존재의 확인과 생존을 위한 진화론적 방법임을 샤를 페팽의 말로써 다시끔 확인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다시 출발하고 다시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현실의 한 가운데에서 단 하나의 삶 그 자체이자 힘차게 박동하고 있는 어떤 위력의 존재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란 오직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어느 자연도, 어느 추억도, 어느 예술 작품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달콤한 맛을 더해 줄 조미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총체적 조미료들은 어느샌가 특별한 존재로서 눈 앞에 솟아올라 우리의 삶에 더욱 깊은 맛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자태로 쌓여있는 무한한 만남의 가능성(책들)을 바라봤다. 읽다 만 책들을 이렇게나 다시 펼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저들을 만난 후 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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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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