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방향 잃은 분노는 늘 낮은 곳을 향한다 - 연극 까마귀 클럽

글 입력 2024.08.05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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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화를 내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노력형 분노 스터디 ‘까마귀 클럽’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을 화나게 한 일과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화를 낸다. 구성원들은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을 묵묵히 들으며 화를 잘 내기 위해선 어떤 부분들을 개선해야 하는지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하면 화를 잘 낼 수 있을까. 그들은 화를 내는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습한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화를 내는 일 역시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출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어떤 형태로든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기만 하는 사람들, 화를 잘 참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놓인 사람들에게 화풀이하는 사람들까지.


까마귀 클럽에 모인 이들은 다른 사람의 화를 늘 받아내야만 했던, ‘낮은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다. 주인공 ‘나’는 텔레마케터, 클럽의 회장인 ‘별’은 지방직 공무원이며, 클럽 회원인 ‘프로틴’은 기간제 교사다. 그들은 매일 같이 고객님, 학부모님, 그리고 민원인님들의 정당하지 못한 분노를 삼키고, 참아야만 한다. 매일 누군가의 분노와 마주하면서도 자신은 분노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인 감정적 약자들. 이들은 늘 화를 품고 살아가지만, 막상 자신을 화나게 했던 이들에게는 감히 화를 낼 수 없다.


비자발적으로 화를 낼 수 없게 된 이들이 서로에게 화를 내는 까마귀 클럽. 그들은 자신을 화나게 했던 일들을 더욱 명료하게 언어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비언어적인 표현들도 하나씩 연습해 나간다. 화를 너무 많이 참아서, 참지 못해서, 혹은 엉뚱한 곳에 화를 내서 문제가 되는 이 사회에서 이들은 화를 잘 내는 방법을 학습하고, 그것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까마귀 클럽은 화를 낼 수 없었던 감정적 약자들의 연대이기도 하다. 의지할 만한 인간관계가 없이 살아왔던 ‘나’는 클럽 회원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소속감을 느낀다.

 

 

[포스터] 연극_까마귀 클럽_예술공간 혜화.jpg



그러나 까마귀 클럽에서 보여준 그들의 분노 역시 온당치 않은 것이었음을 보여주며 연극은 끝이 난다. 어느 스터디 모임 날, ‘나’는 자신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고객에게 화를 낸다. 평생 화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살아왔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주눅이 들지 않고, 목소리를 떨지 않고 무섭게 화를 내는 데 성공한다. 놀랍도록 발전한 ‘나’의 모습에 스터디 구성원들은 모두 감탄하며 ‘나’의 분노 비결을 묻는다.


그들의 찬사 어린 질문에 ‘나’는, 당신들이 그만큼 편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한다. 연극을 보던 내가 잠시 멍해졌던 순간이었다. ‘나’에게 스터디원들은 제때,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를 아무렇게나 내보여도 ‘괜찮은’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비록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이 말에 회장인 별은 ‘나’에게 자신들을 만만한 ‘호구’처럼 보고 화를 낸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낸다. 모임 내내 언제나 온화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였던 별이 ‘나’에게 달려들 듯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며 소리치고 욕을 하며 화를 내는 장면은 감정적 약자들이 서로에게 화를 내는 까마귀 클럽의 기괴함을 극대화한다.


까마귀 클럽의 회원들이 화를 받아내야만 했던 이유. 그건 그들이 언제나 을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갑’들은 화가 나기 때문에 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화를 내도 괜찮았기 때문에 화를 냈다. 나’의 분노는 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갑에게 향해야 했을 분노였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분노하는 대신, 자신이 화를 내도 ‘괜찮은’ 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모임에서 보여준 ‘나’의 분노는 클럽 회원들이 수없이 마주쳤던 갑들의 분노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갈 곳을 잃은 분노는 그렇게 또 다른 약자를 향했고, 그들을 착취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었다.


마음 한편에 제때,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던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놓은 사람들이 많다. 까마귀 클럽의 회원들처럼 말이다. 분노는 사회의 온갖 부당함과 부조리에 항거하는 정당한 사회적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정당하고 발전적일 수 있는 우리의 분노가 거의, 늘 제대로 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떠돌고, 결국에는 낮은 곳을 향하고 만다는 것이다. 어쩌면 화를 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스터디원들이 그토록 연습했던 말, 표정, 목소리도 아닌 방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분노에는 제대로 된 방향이 필요하다.

 

 

[한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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