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클래식 장에서 살아남기

글 입력 2024.08.08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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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여행 중 클래식 피아노 독주회를 관람한 적 있다. 익숙하지 않은 장르일뿐더러 그마저도 여행 메이트의 선호로 가게 되었던 터라 흥미가 크지 않았다. 오전에 강행한 이만 보의 일정도 사기 저하에 한몫. 나, 집중할 수 있을까? 졸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을 갖고 연주회장에 도착했다.


공연에 관한 브로슈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공연장의 풍경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좌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 같기도, 오래된 모임의 일행 같기도 한 가지각색의 외국 할머니와 할아버지. 옷장에서 정갈한 옷을 고르고, 다림질하고, 늦었다며 재촉하고, 두 손을 꼭 잡고 이곳에 오기까지의 풍경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한국에서도 목격하고 싶은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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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어두워지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집중하지 못하리란 우려와 달리 곧바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데, 핸드폰을 통해선 느끼지 못했던 섬세한 음들이 곧장 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주자의 들썩이는 몸, 부드러운 소리가 공간을 꽉 채웠다. 언젠가 클래식엔 가사가 없어 같은 소리에서 무수한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래, 이 음들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상상을 하자. 상상, 상상.


아아, 안타깝게도 미디어와 숏폼의 영향으로 인한 집중력 부족의 문제는 클래식 장에서도 유효했다. 40분이 넘어가는 연주 시간 동안 도저히 상상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옆 좌석의 여행 메이트는 언제부터인지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제기랄.


다른 좌석은? 맞은편에서 친구처럼 졸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그 옆 할아버지는 멍을 때리고 있었다. 리듬에 전혀 맞지 않게 고개를 흔드는 할머니도, 왜인지 고개를 좌우로 젓는 할머니도, 리듬을 타며 그루브를 젓는 청년도 있었다.


연주자에겐 죄송하지만 음악을 배경 삼아 관객을 관찰하는 게 더 재밌었다. 그들의 모습도 클래식이 자아내는 무수한 서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오스트리아에서 공연을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유명 관광지면 반드시 있었던 거리의 악사들, 버스커의 공연이 먼저였다.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만족한 만큼의 돈을 요구하는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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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떠나 관객을 흡인하는 힘은 프로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오히려 그들의 음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당신은 왜 이곳에서 연습 같은 연주를 하나요. 사람들이 보길 원하나요, 보지 않길 원하나요. 지금 연주하는 <인생의 회전목마>는 이곳에서도 유명한 음악인가요. 하루에 얼마를 버나요.


사실 나는 투박한 용기를 목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수요 없는 공급을 만들어내는 대범함도. 미숙함도 매력이 될 수 있는 관용도. 주변과 관계없이 자신을 유지하는 단단함도. 아마추어만이 낼 수 있는 순수한 미소도. 어리숙한 음률을 곱씹으며 멋대로 정의 내렸다. 버스킹이란 기꺼이 무시당함으로써 선명해지려는 것이구나. 수많은 시선을 은폐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이구나.

 

아마추어에게 경외를 느끼니 자연히 프로에게도 마음이 이끌렸다.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시선을 받기 위해 기술과 감정을 연마하는 배짱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노동의 결실로 세간의 숱한 평가를 감내하겠다는 의지는 그 자체로 단단한 것이다.

 

상상이 너무 길었었나. 어느새 모든 연주가 끝나고 끝없는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나 역시 크고 길게 박수를 쳤다. 감동의 박수만은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을 주목하게 한 수행과 노력, 그것을 흡수하는 깜냥에 대한 박수였다. 이런 경탄도 클래식에선 허용되는 것이 아닐까. 여행은 이런 식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허용한다는 걸 배웠다.

 

조용히 클래식을 음미하던 여행 메이트는 무엇을 배웠는지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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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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