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더운 여름밤을 함께할 그림 속 이야기들 - 무서운 그림들 [도서]

글 입력 2024.08.06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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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그림이 있으신지요? 저에게는 있답니다. 늘 이리저리 튀는 생각 탓에 길가의 풀이 언젠가 보거나 들었던 무언가로 이어지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거든요. 오늘의 주제인 그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들었던 노래나 영화의 한 장면은 불현듯 제 머릿속에서 깜빡거립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노을 위를 떠다니는 구름을 볼 때는 뭉크의 <태양>이, 날씨 좋은 날 내리는 부슬비를 볼 때는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어요.

 

이원율의 책 <무서운 그림들> 속 그림들은 주로 캄캄한 밤에 떠올릴 법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을을 덮치는 검은 그림자와 절박한 질문자의 뒤로 드리운 어둠, 외눈박이 키클롭스의 까만 눈과 같이 첫눈에 오싹한 느낌을 주는 그림부터 얼기설기 엮인 형태의 과일 얼굴, 건장한 왕의 초상화, 그리고 누구나 아는 금빛 여인의 초상처럼 미묘한 인상의 유명작까지. 예술적이지만, 인생의 아름다운 나날들 속에서 떠올릴 법한 작품들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몇몇 그림이 어젯밤에 떠오르더랍니다. 아마 책 속 이야기꾼이 나에게 들려준 그림 뒤의 마음들 때문이겠지요.

   

*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두 번째 버전)이었습니다. 잠에 들 때쯤은 솔직히 구체적인 이야기가 흐려진 이후입니다. 남는 것은 읽었던 이야기의, 보았던 그림의 인상뿐입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그림이 더 특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image01.png

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두 번째 버전), 1880년, 패널에 유채, 73.7x121.9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가 느꼈던 무거운 고요함이 느껴지시나요?

 

분명 섬과 배는 밝은 듯한데, 막상 그 밝음이 수렴하는 그림의 중앙은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듯한 두려움이 느껴지는 한편, 차갑지 않은 검은색 덕에 깊은 안식 속으로 이끌리는 안정감이 머리를 내밀기도 합니다.

 

배의 앞머리에 살포시 놓여있던 흰 관을 그리며 당대의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어떤 존재였을지 생각했습니다. 뵈클린과 이 그림의 의뢰자는 모두 병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유족입니다. 유족이 아닌 이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흑사병의 시대, 죽음의 질감은 지금과 사뭇 달랐겠지요. 더 잦고, 더 무력했던 죽음의 모양은 뵈클린의 다른 작품 <페스트>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숨을 거둬가던 질병에, 그 슬픔이 가져온 우울함에 무겁게 짓눌려있었을 사회가 상상이 갑니다.

 

그러자 <죽음의 섬>(두 번째 버전)의 상냥함이 새삼 와닿습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숲의 따듯한 검은색, 배를 모는 사공과 관 위로 내리는 고고한 흰 빛, 겸허한 자세의 탑승객이 수많은 유족에게 위로를 건네는 듯합니다. 많은 죽음을 헤쳐온 화가의 서늘하고도 따듯한 마음이 깊게 인상적이었습니다.

 

*

 

이야기꾼 이원율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이 그림의 시대적 배경도, 화가의 개인적인 경험도, 그림 자체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도 알 수 없었겠지요? 잠들기 전 화가의 상냥한 마음을, 그림에 얽힌 슬픈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림 한 편에도 어찌나 이야기가 많았던지요!

 

책을 읽으며 메모해 두었던 모로의 말이 있습니다.

 

“영원히 남는 그림은 생각과 꿈, 마음으로 만들 수 있다. 손재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그림은 간혹 화가의 평생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름, 배경, 궤적 따위를 알지 못해도 그림 한 장에서 압도적으로 전해져오는 파도가 있습니다. 분명 그건 손재주만의 영역은 아니겠지요. 가끔은 전시 해설을 읽지 않고 그 파도를 흠뻑 맞다 오기도 합니다.

 

내가 느낀 감정의 파도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그림이 전하는 감동에 맥락을 싣는 건 중요합니다. 선명함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왜 내가 이 발랄한 색채의 그림을 보고 슬펐는지, 이 예쁘기만 한 그림이 나에게 무얼 더 말하고 싶었는지 알아가는 것은 내 경험을 선명하게 합니다. 해상도가 높은 사진처럼 또렷이 담은 내 기억은 시간이 지나 흐려지더라도 더 진하게 남을 테죠.

 

뵈클린의 위로 덕에 단잠을 잤던 어젯밤처럼, 잠들기 힘든 밤, 이 <무서운 그림들>이 나를 지켜줄 것 같습니다.

 

 

무서운 그림들_평면표지.jpg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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