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엄마의 첫 차

낙관의 효능
글 입력 2024.08.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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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쩔어 비틀비틀, 엄마의 첫 차를 마주쳤다. 1998년 출시돼 동글동글한 차체와 헤드램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티즈를 마주쳤다. 저 멀리 리비아로 요르단으로 수출됐다던 우리 엄마의 첫 차, 파란색 마티즈를 마주쳤다. 이런 식으로 불현듯 마주치는, 파란색 마티즈는 매번. 불현듯. 나를 쪽팔리게 한다.


2024년에 다시 본 파란색 마티즈보다는 광빨이 살아있고 클래식함보다는 낡음으로 평가받던 2009년 즈음, 우리 엄마에게도 첫 차가 생겼다. 나이 마흔 무렵에 첫 차가 생긴 과정은 그리 낭만적이지 못했다. 신차 매장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중고차 매매단지서 싸다 싸를 연신 외치던 아부지의 웃음과 엄마의 똥 씹은 표정이 여직 기억에 선명하다. 흰색과 은색과 검정색보다 싸다는 이유로, 빨간색과 황금색과 파란색 중 파란색을 골랐고. 그 덕에 우리 마티즈는 ‘황마(황금색 마티즈)’의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웠다. 85만 원을 주고 산 우리 마티즈는 딱 그만큼의 가치를 정직히 충족해 줬다.


비닐을 얇게 펴 바른 건 아닐까 의심되던 선팅지를 필두로, 시트에 푹 앉으면 전차주의 담배냄새가 푹 올라오던 직물시트. RPM 게이지 없이 소리로 가늠해야 하는 계기판. 닭다리를 돌려 열어야 하는 뒷창문. 이마트 주차장 올라가는 언덕길에서는 꺼야 하는 에어컨. 트렁크 위 각티슈와 초보운전 수기 A4 용지. 어딘가 모르게 항상 우왕좌왕하던 초보운전 시절의 엄마. 나는 우리 마티즈가 하나하나 전부 쪽팔렸다.


장마철 애써 아들내미 데리러 온 학교 앞. 누가 볼까 나는 뒷자리에 타 납작 엎드리기 바빴고. 그 와중에 앞창문, 사이드미러 습기 제거 하나 못해 휴지로 유리를 닦던 엄마의 서툰 조작법이 쪽팔렸다. 저 멀리 친구가 타고 가던 습기 없는 BMW 뒤 우리 마티즈가 뭐가 그리 쪽팔렸는지. 똥차라 비아냥거리며 쪽팔렸던 그때가 쪽팔린다. 까방권을 하나 깔자면, 나는 그때 초딩이었다.


뭐가 그리 쪽팔렸던 걸까. 우리 엄마가, 우리 마티즈가. 아님 구태어 쪽팔려 하려 안달이던 내가.


고맘때 내게는 꿈이 있었다. 돼지저금통을 꽉 채워 엄마에게 차를 사주고 싶었다. 기아 쎄라토였다 포르테였던. 현대 아반떼 XD였다 HD였던 내 이상과 달리 마티즈라는 현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은 현실을 비참하게 한다. 앞으로가 없는 때문에는 미래마저 비루하게 한다. 미화시킬 과거마저 추화시킨다.


해답과 혜안은 낙관이다.


지금 보니, 라고 쓰고 보니. 싸구려 선팅지가 정감 있고. 직물시트 담배냄새가 향수 같고. RPM 없는 계기판이 재미있고. 창문 밑 닭다리의 그립감이 그립고. 우왕좌왕하던 젊은 날의 엄마가 귀엽고. 수기로 초보운전을 작성했던 거실이 아른거린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아닌 자가용으로 아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을 엄마와 예기치 못한 습기에 당황했을 엄마 모습이 여자친구처럼 이쁘다. 저 멀리 친구가 타고 가던 BMW의 편리함보다 우리 마티즈의 불편함이 더 아른한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걸, 그때 나는 몰랐고 지금 나는 아는. 이 괴리가 참. 그렇다.


지금의 내게도 꿈이 있다. 일평생 중고차만 타온 엄마에게 새 차를 사주고 싶다. 차값이 얼마인지 취득세가 얼마인지 유지비가 얼마인지 내 소득은 얼만지도 아는 지금으로서는, 이 꿈이 다소 허황스러우나 내게는 꿈이 있다. 꿈은 말 그대로 꿈이다. 더 이상 꿈 때문에 현실을 비참하거나 비루하게 만들지 않는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이 현실을 비참하게, 비루하게 만든다면 그 꿈에는 효능이 없다.


엄마가 모는 20년가량 된 중고차가 미드 주인공 자동차 같고 느낌 있다.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언더독 기질이 있는 거 같고 느낌 있다. 찢어진 가죽시트와 찢어지는 스피커와 어딘가 헐렁한 버튼들도 느낌 있다. 현재를 비관하지 않고, 낙관할 줄 알고. 앞으로를 고민할 줄 아는 지금이 느낌 있다.


중요한 건 미래다. 현재를 낙관하지 말자.

 

술에 쩔어 비틀비틀 마주친 마티즈야, 반가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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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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