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필이 되려다 만 것들 [사람]

방대한 분량의 글만이 완성작은 아니다.
글 입력 2024.08.0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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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쓰는 일은 어렵다. 호흡이 짧은 글을 쓸 때는 오랜 시간을 머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긴 글보다 더 깊은 고뇌를 거쳤을지도 모를 나의 조각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오래 꺼내보게 되는 단편의 목소리들을 모아봤다.

 

 

 

1


 

늦은 시간 학교를 나서다가 등굣길보다 하굣길의 풍경이 더 예쁘다는 친구의 말을 들었다.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내 모습에 밀려들어오는 이질감. 같은 그림인데도 보는 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무슨 까닭일까.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침은 하루의 문을 여는 피로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기대하는 하루가 아니라면, 누구나 그 문을 여는 것을 망설일 것이다.


그에 비해 노을을 담은 저녁의 색은 나를 들뜨게 한다. 오늘도 하루를 잘 버텨냈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은 오늘의 태양이 소멸 직전에 쏘는 마지막 빛을 머금는다.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생생하게 막 피어난 꽃들이, 외로움을 띄고 있는 여린 풀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길이 단숨에 하루의 피로를 몰아내는 이 아름다운 시간. 나는 지금의 공기를 단 한 줌도 뺏기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호흡하며 내리막을 본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분에 따라, 그 날의 분위기에 따라 수없이 다르게 평가된다. 애써 어여쁜 꽃을 피워냈음에도 피로에 잠긴 우리의 눈에는 담기지 않는 것처럼, 모든 정성들이 하루를 마친 시간이 되어서야 선명해지는 것처럼. 당신의 노력에 대한 결과는 때때로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그 찬란을 지킨다면 언젠가는 당신에게도 태양을 품을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만약 그 시간을 온전히 준비해온 당신을 세상이 외면하더라도 슬퍼하지 말아라.


빛바랜 그림일지라도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본 나에게만큼은 잊혀지지 않을 세기의 명작이 될 테니.


_ 고등학생, 20XX년의 어느 여름에


 

 

2


 

낙천적이진 못해도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나서는 성격은 아니라도 불의는 참지 않았다. 나는 내 리듬을 신뢰했고, 가끔 박자에 어긋나는 일들이 있더라도 애써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런 스스로를 끊임없이 포장했다. 내 언어습관은 신중하다고, 내 행동은 선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습했던 공기의 교실을 등지고 새 고장으로 떠나던 길에는 비가 왔다. 그 빗줄기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친구들 눈가에도 침범했었나 보다. 가을을 애정하는 만큼 항상 여름의 끝자락은 반갑기만 했는데, 그 날은 그렇지 못했다.


옛 학교 친구들이 보면 깜짝 놀랄 만큼 위축되어가던 시점에, 나의 새 그림을 그려줄 화가들을 만났다.


소유하고 있는 자아의 색이 다양한 친구들이었다. 그 개성들은 단단하고도 유연했으며, 나와 정반대의 색깔을 띠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나를 안심시키던 목소리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린 마음에 찾아온 작은 울림은 꺼지지 않는 메아리가 되었다. 평생 가슴을 울리겠지만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의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을 너무도 투명하게 해내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고 애쓰는, 맡은 직책에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하는, 그대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자만을 다시 돌아봤다. 한 걸음 성장하기 앞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지금 이 인연들을 만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하며 나를 새 색깔로 덧칠해가려 한다.


전학생이라는 이름의 내 모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나에게 그 여름의 내리막은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계절이었다.


그리고 나의 그 계절이 다치지 않게 정성껏 품어준 그대들은 우리의 영화에서 틀림없이 고귀한 배역을 차지하겠지. 이제는 내가 품어줄 차례이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우리의 엔딩 크레딧을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 여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밤이다.


내가 애정하는 모든 것들에게 깊은 감사를.


_생애 첫 전학을 거친 뒤의 일기


 

 

3


 

많은 이들이 내게 언제까지 낭만을 우선추격하며 살아갈 테냐 묻는다. 그런 건 돈을 번 뒤에 향유하는 게 지혜롭다고 말한다. 결국 부유해야 취미도, 사랑도 보존할 수 있단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점심 메뉴는 상대에게 맞출 수 있어도 살아감의 철학에서만큼은 고집이 세다.


가능한 아주 오래 내가 사고할 수 있는 그 모든 순간과 마감의 지점까지 미련하고 무모하다, 는 한줄평을 기쁘게 받아들여야지.


우리 삶이 영화라면 저명한 평론가는 결코 타인이 아니다. 그러니 그대들도 무엇인가 사랑하고 그 크기를 세상에 나타내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요.


_ 스스로의 가치관을 돌아보며, 블로그 글 발췌

 

 

 

4


 

지금 시대에서 문학을 하며 살겠다는 결심은 사실 무모함을 가미하지 않고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요즘 비로소 내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잔뜩 움츠려 있던 것들을 더 자주 꺼내보고 읽는 중이다. 교만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렴 좋다! 계속 사랑하고 계속 쓸 것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알아봐 줄 것이다. 언어만이 줄 수 있는 어느 짙은 감동을.


_ 문학의 꿈에 서서, 스물에


 

 

5


 

살아간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우연히 재생한 노래가 마음에 드는 것. 날씨가 좋다는 이유로 한참을 걷게 되는 것. 곁에 내가 믿고 나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


충분히 살아갈 이유이다.


그러니 기분을 단어로 선택할 수 있다면 오늘은 썰물을 즐기는 바다로 할래.


_개화를 누리며, 블로그 글 발췌


 

 

6


 

여전히 많은 것이 어렵습니다. 세상은 어지럽고 사람은 모르겠어요. 그러나 통달할 수 없는 것이 청춘이기에 미숙함이 당연하다는 것을 더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그렇게 바라는 담담하고 의연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_미완의 시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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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꿈꾸는 어른을 꿈꾼다.

 

어쩌면 그 열망을 이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내 삶의 기쁨이자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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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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