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혼을 어루만지는 음식 [음식]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힘이 되는 음식은?
글 입력 2024.08.0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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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겠냐는 질문을 들으면 사람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모든 것이 호화롭게 펼쳐진 고급 뷔페일 수도,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었던 다정한 집밥일 수도, 아니면 자주 가던 단골 식당에서 늘 먹던 메뉴를 주문할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삶이라는 절벽의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매달렸다고 가정할 때, 단번에 결단을 내리기란 쉽지 않다. 평소에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에 공을 들일 만큼 삶이 여유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는 지금 떠오르는 음식은? 그건 본인이 속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몽글몽글 차오르는 기분이라면 달콤한 디저트가 먹고 싶을 수도 있다. 무더위에 지쳐 기력을 모두 잃어버릴 것만 같은 위기에 처했다면 초계국수처럼 시원한 음식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면 콩나물이 들어간 얼큰한 해장국을 찾아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현재 영혼을 달래 주는 음식을 먹고 싶다. 차갑게 굳어진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음식이 필요하다. 금이 가고 조각나 있는 영혼을 보듬어 줄 음식은 단번에 생겨나지 않는다. 그 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전후 상황, 주변 인물, 그때의 감정, 심지어 당시의 날씨로도 좌우될 수 있다. 그리고 단연 중요한 음식의 맛. 나에게는 어떤 상황에 꼭 먹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음식은 없지만, 어느 날을 지나다 보면 문득 생각나는 음식은 존재한다. 그 음식들을 처음 마주친 그때를 복기해보면, 공통으로 떠오르는 감정이 있다. 모두 따뜻하고 온화한 빛을 띠는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이에 여러분께 내 영혼을 어루만지는 음식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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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스튜


 

몇 년 전, 친구들과 일본식 집밥 전문점에 방문한 적이 있다. 가게의 대표 메뉴는 새우가 올라간 크림 스튜와 따뜻한 밥 한 공기. 이 조합이 생소한 사람들은 크림 스프에 밥을 말아먹는 학창 시절의 괴식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차원이 다른 맛이다. 우선 한 숟가락 가득 스프를 뜨면 채수가 깊게 우러난 육수와 어우러지는 버터의 풍미, 그리고 우유와 생크림의 고소함이 느껴진다. 푹 끓여져 나온 채소들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진다. 단지 식감만으론 채소의 종류를 유추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진한 크림 향 뒤에 숨겨진 잔향으로 알아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껴먹게 되는 탱글한 새우까지. 한 그릇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가슴이 따스워진다.

 

 맛이 예상되지 않는 낯선 음식, 묘하게 긴장되는 마음, 쌀쌀한 바깥 날씨. 그리고 별 이야기 없이도 웃음이 나오는 친구들. 이 4박자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느낄 수 있는 기분, 즉 경험해 본 적 없는 추억을 향한 그리움으로 재탄생한다.

 

 아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식집은 사라졌다. 크림 스튜를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이별의 아픔을 겪는 것도 잠시, 직접 만들어 먹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요리에 있어 몇 가지의 철칙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기준이 되는 제1 철칙이란, ‘주변에서 구할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라.’이다. 음식점과의 거리가 멀다는 핑계를 대기보다, 귀찮음이라는 가면을 쓰기보다 일단 시도해 보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다 보면 길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어느 것이나 시작은 빈약하고 실망스럽기 마련이지만, 거듭할수록 완성도는 높아진다.

 

 그렇다면 이제 유튜브에 들어가 레시피들을 검색해 보자. 그날의 맛과 얼마나 일치할지에 대한 호기심과 레시피에 대한 일말의 의심으로 둘러싸인 채, 요리를 시작했다. 다 만들어진 크림스튜는 데코레이션만 빈약할 뿐이지, 꽤 괜찮아 보였다. 눈처럼 뽀얀 스프와 재료 본연의 색을 띠는 한 그릇은 시각적으로 만족감을 부여했다. 조심스럽게 한 입을 맛보자, 긴장감에 응축되어 있던 마음은 스르르 풀어져 내리고, 입안에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풍미만 남는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힌다. 성공이다.


그 이후로 종종 크림 스튜를 해 먹곤 했다. 냉장고 속 잠들어 있는 채소들을 해치우기에도 좋다 보니 마음이 공허할 때 외에도 어딘가 긴급한 처치가 필요할 때 애용한다.

 

*

 

[크림 스튜 레시피]

1. 스튜에 들어갈 채소들을 깍둑 썬다. (양파, 감자, 당근은 필수)

2. 단백질원으로 베이컨이나 소세지, 혹은 새우를 준비한다.

3. 오일을 두른 팬에 모두 넣고 볶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냄비에 물 200ml와 치킨 스톡 반개를 넣고 5분간 끓인다.

4. 그 사이 버터 2스푼을 녹인 팬에 밀가루 2스푼을 넣고 볶아 루를 만든다.

5. 루가 원하는 색을 띄면 생크림 200ml과 우유 200ml를 넣고 잘 풀어준다. (생크림이 없다면 우유로도 충분하다!)

6. 5번에서 만든 우유소스를 야채가 익어가는 냄비에 넣고 원하는 만큼 끓인다.

7. 간을 보며 우유/소금/후추를 취향껏 추가한다.


추신. 크림스튜는 만들다보면 1인분에서 시작해서 2인분, 3인분의 양으로 불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호호 불어가면서 먹기 시작하면 금세 해치울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양파 스프와 바게트


 

뜨개질을 좋아해서 여러 유튜버를 구독한다. 그중 한 유튜버가 아이슬란드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생활하며 자급자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볼 만큼 좋아했다. 그 음식 중 하나가 바로 프렌치 어니언 스프, 즉 양파 스프였다. 양파 스프는 양파를 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그 음식을 메뉴로 생각했다는 것은 정말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그녀의 말이 와닿았다*.

 

올해 초는 나 자신을 위해 온전히 쉴 수 있던 시간이 많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에서 홀로 빠져나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은 편안하게 시도할 수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충만하던 시기의 나는 괜히 음식에도 공을 들여 보고 싶은 오기가 들었다. 이렇게 결심한 마음이 금세 식어버릴까 싶어 얼른 양파를 꺼내왔다.

 

사실 양파 스프는 양파가 전부를 차지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재료 없이 긴 시간 동안 양파를 어르고 달래가며 농축된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세고 강한 불로 양파를 빠르게 익혀내기보다는 최대한 약한 불에서 채소가 가진 고유의 단맛을 표출시킨다. 이렇게 만든 양파 스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맛을 낸다. 극한의 감미료를 사용한 것만 같은 감칠 감이 맴돈다. 잘 끓여진 양파 스프는 빵과 치즈를 올려 마무리한다. 이때 빵의 종류는 모양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단단하고 바삭한 것이 좋다. 겉면이 보기 좋은 갈색으로 그을려 바싹하게 익은 치즈와 촉촉해진 빵, 그리고 이미 형체가 없어져 감칠맛만이 남겨진 양파 스프를 먹으면 단순한 재료에서 나올 수 있는 극대화된 맛에 놀랄 수밖에 없다.

 

양파 스프를 만드는 과정은 앞서 말했듯이 정말 오래 걸린다. 양파를 볶는 데에만 적어도 10분, 정석의 방법을 따른다면 1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러나 요리에 투자되는 시간의 한가로움을 만끽하면서, 부피가 줄어드는 양파를 볶다 보면 이것이 진정한 휴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양파 스프 레시피 - 쉬운 버전]

1. 양파 1개를 최대한 얇게 채 친다.

2. 양파를 내열 용기에 뚜껑을 덮은 후, 전자레인지에 1분씩 끊어가며 총 2분을 돌린다.

(이 과정이 없으면, 양파 스프는 1시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3. 반투명해진 양파를 버터 한 스푼을 넣고 볶는다.

4. 양파가 전체적으로 갈색을 띠면 소금 약간과 밀가루 약간 넣는다.

5. 물 250ml와 치킨스톡 반 개를 넣고, 5-10분을 더 끓인다.

6. 완성된 양파스프를 내열 용기에 옮겨 담고, 바게트를 올린 후 치즈를 뿌려 에어프라이어에서 구워낸다.

 

*출처: 바늘이야기 김대리 DAERI KIM

 

 

 

애호박새우젓국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고등학교 3학년, 엄마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나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을 먹이고 학교를 보냈다. 배가 든든하게 채워져야 공부할 힘이 난다면서 나보다도 먼저 일어나 매일 아침을 차려 주셨다. 그러나 불규칙한 수면 시간과 망가져 버린 식습관으로 나의 위는 아직 수면 상태일 때가 많았다. 시리얼같이 거칠고 딱딱한 식감의 식사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간신히 씹어 삼키더라도 소화가 되어 에너지로 쓰인다기보다는, 마치 레고를 배 속에 가득 채운것 같은 이물감이 느껴졌다. 민감한 소화 기관을 타고난 자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럴 때 엄마는 자그마한 뚝배기에 애호박새우젓국을 해주곤 했다.

 

애호박새우젓국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호박과 새우젓이 주된 재료이다. 육수나 물에 썰어둔 애호박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는 국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칼칼한 맛을 더해줄 청양고추를 썰어 넣는다. 뚝배기 바닥이 훤히 보이는 맑고 투명한 국물과 부드러운 애호박은 빈속을 따끈하게 채워 준다. 자극적이지 않게 재료 본연의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열을 충분히 가해 잘 익은 애호박은 양파 못지않은 단맛을 뽐낸다. 다른 반찬 없이도 애호박새우젓국과 밥 한 그릇이면 든든하게 아침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요리의 레시피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찾아보고 개발한 레시피가 아니라 엄마가 나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추억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끝까지 파헤치고자 하는 오기와 탐구심에 힘입어 각종 사이트에서 발췌한 요리 방법을 연구하다 보면 끝내 비슷한 맛이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요리만큼은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다. 굳이 그 맛을 내는 방법을 글과 숫자로써 수치화하고 싶지 않다. 엄마의 요리는 엄마의 손맛으로 완성된다. 때때로 음식은 최고의 재료, 귀한 향신료, 값비싼 요리 도구보다도 누군가의 정성이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그 음식이 유년기 시절의 추억과 얽매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겨운 음식을 떠올리며, 가슴 속에 차오르는 훈훈함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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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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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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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운양파아몬드
    • 엄마가 해주신 추억의 그 음식을 글로, 숫자로써 수치화하고 싶지 않다는 문장이 너무 와닿아요. 찌잉,, 오늘도 잘 봤습니다 :) 크림스튜와 양파 수프 레시피 저장해서 꼭 해먹어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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