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 - 내가 나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 [사람]

글 입력 2024.08.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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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랜만에 폴란드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20일 전 적었던 일기를 보았다. '내일이면 19일이 남는다. 1년은 6개월이 되고 6개월은 한 달이 되었다가 더 빠른 체감 속도로 당일이 되겠지? 삶이 꼭 모래시계 같다. 하루들이 같은 가치를 가지지 않고 더 무거운 쪽으로 경사질 만큼 쏠린다. 경사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여름이 오고 있다. 이만큼 눈이 부시고,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자, 그만큼 쏟아지는 슬픔을 감수하고 있던 때가 없다.'

 

벅차오르게 행복해서 글을 쓰고 싶을 때가 잘 없다. 여러 번 말했듯 나는 슬퍼야 글이 써진다. 누가 내 마음을 무지성으로 한 움큼 쥐고 주욱 뜯어내야 그 자리에서 글이 뚝뚝 흐른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내 기분은,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집안 불을 다 꺼두고 노란빛 새어 나오는 촛불 몇 개만 켜둔 채, 조용하고 낮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어스름 어둠이 내린 바깥에서 지켜보는 마음이었다. 고요하게 슬프고 행복한 마음.


당장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도 나는 벌써 그 매 순간이 그리웠다. 그래서 계속 가라앉은 눈으로 모든 모양새를 쫓았다. 그리고 집요하게 좇다 보면, 결국은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라는 건 결국 삶 여기저기에서 툭 튀어나와 모든 곳에 덕지덕지 발라지는 무언가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자다 숨이 차서 깰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는 보통 악몽을 꾼다. 대부분은 내가 일상에서 잘 해내 오던 것들인데 꿈속에서는 유독 일을 못 해서 하루 종일 그 일을 하는 내용이다. 깨고 나면 그 꿈을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토닥토닥 다독인다.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이거 다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이었어. 그렇게 다독이다 보면 다시 잠에 든다.


기숙사에서 살 때는 그렇게 다독여도 다시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폴란드에 가기 전 친한 언니와 같이 쓰던 기숙사 방은 해가 뜨는 동안 세상이 서서히 밝아지는 모습이 잘 보였다. 그럼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이 파란 마음도 얼른 저렇게 밝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다독이지 않아도 내가 숨을 잘 터뜨렸으면 좋겠다. 내 하루가 기대됐으면 좋겠다. 모인 무릎을 한가득 안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폴란드에서 그런 날이 하루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무리 그곳에서의 삶이 한국에서의 것보다 여유롭고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나도 보통의 사람인지라 어디서든 스트레스를 받고 여러 고민을 한다. 그러나 폴란드에서의 생활을 통해 달라진 건, 내가 나를 믿게 되었다는 거다. 내가 다시 벅차게 행복해지고, 사랑하는 것들이 더욱 많이 생기고 그래서 집요하게 나의 좋은 에너지를 쓸 것이라는 믿음. 그걸 가지게 되었다.


그건 폴란드에서 살았기 때문은 아니지만, 폴란드에서 내가 직접 살아온 것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은 맞을 것이다. 폴란드에서 살지 않았더라도, 어디서라도 나는 지금 내가 가지게 된 경험들과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향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폴란드여서 더 각별한 것은 맞다.

 

친구들과 스물셋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면 말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다. 그건 어쩔 수가 없다. 내 스물셋이 나중의 내가 보았을 때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는 알 길이 없으니까. 근데 나는 솔직히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해 기대가 있다. 나는 스물여덟의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하고,서른셋의 내가 가장 높이 사는 가치는 무엇일지 궁금하고, 중년의 내가 청소년이 된 자녀가 있을지, 노년에는 어떤 옷을 골라 입고 어떤 말씨로 이야기할지 궁금해 죽겠다. 그래서 꼭 오래오래 살고 싶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이십 대 후반의 내가 가진 추구미가 어떻게 될지다. 일전에 친한 대학 동기 언니와 스물여덟 정도는 되어야 그동안 내가 추구해 오던 미감과 경험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서 진짜 나만의 고유한 분위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으로서는 이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난 어떤 어른이 될까? 이건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답을 갈구하게 되는 질문이다. 여하튼 나는 많은 외부의 것들을 사랑하다 모자라 결국은 나까지 사랑하게 되는 사람 같다.


폴란드에 오기 전에 나는 폴란드가 내 임시 도피처라고 생각했다. S에게는 이야기했지만 난 23년 상반기에 너무 힘이 들었다. 끊임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졌다가 밭은 숨으로 겨우 올라오면 다시 내팽개쳐졌다. 친구들도 정말 많이 만났고 돈도 많이 썼는데 집 오는 길에 많이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허해서 나중에는 오랜만에 기도했다. 폴란드에 가기 전 내가 나를 숨 멎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하루가 그리 소중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미래의 내가 어떤 어른이 될지 궁금해한다. 도망쳐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물론 이랬다가 또 어느 순간은 미치도록 그만두고 싶어질 때가 올 거다. 난 열여덟에도 그랬고 스물에도 그랬으니까. 그래도 결국은 다시 나를 믿게 될 테니까, 그 믿음 하나로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사랑할 거다. 이게 내 다짐이다.

 

이 글을 쓰는 제일 큰 이유는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고 힘을 얻는 때가 왔으면 좋기 때문이다. 나는 환한 그리움을 먹고 살아가므로 어쩔 수 없다. 요즘 다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슬슬 가지지 못한 것에 초조해할 때가 돌아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씀으로써, 과거의 나에게 미안하지 않게 다시 힘을 내보자는 메시지를 미래의 나에게 전한다.


지금 당장은 잠시 주춤하고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 다시 시작될 나의 스물셋 반토막이 기대된다. 내 그리움을 만든 사람들을 모두 만나는 것을 완수하고 싶고, 종이책을 더욱 많이 읽고 싶고, 오랜만에 돈을 벌고 싶고 경복궁역과 연남동에서 선선한 날을 즐기고 싶다.


내가 오래오래 나를 궁금해 하고 나를 지지하기를. 혹여 다시 무너져도 근사하게 웃던 날들을 기억하며 스스로 다잡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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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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