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디론가 헤매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도서]

리베카 솔닛 - 길 잃기 안내서를 읽고
글 입력 2024.08.1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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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일단 나의 입장에서는 두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걷다 보면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곳에서는 길 잃기보다는 헤매기에 가깝다. 정말 먼, 잘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갔을 때야 정말 길을 잃는다고 할 수 있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건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며 두렵고 외로운 일이다. 내가 온 곳과 갈 곳을 모두 잃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로 알아보자.

 

 

 

잃는다는 것


 

잃는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가 길 잃기 이후의 시간을 변화시킨다. 예상치 못하게 길을 잃고 발견하는 혹은 발견되는 무엇들은 그동안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양한 시점과 저자 본인의 경험을 함께 공유한다. 솔닛이 말하는 길 잃기란 환영받는 상태는 아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회피하고 싶어 하는 상태이다. 하지만 솔닛은 그 ‘잃음’을 계속해서 변호한다.


첫 번째 장에서는 ‘잃기’의 두 가지 뜻에 관해 설명한다. 사물을 잃는 것과 길을 잃는 것, 이 두 가지 의미에 있어 솔닛은 사물은 사라지지만 길을 잃는 것은 새로운 발견의 순간을 끊임없이 만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 나는 ‘길 잃기’란 상실과 획득의 동시다발적 순간이라고 하고 싶다. 상실의 두겁을 썼지만, 이전의 세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새 세계가 나타난다. 결국 길 잃기는 길 찾기의 시작인 셈이다.

 

 

 

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 이야기


 

첫 장 이후 이어지는 글들은 리베카 솔닛의 개인적인 경험과 역사 속 설화들이 겹쳐 진행된다. 그중 가장 강렬한 이야기는 스페인의 탐험가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였다.


스페인 내륙을 탐사하던 중 그의 탐험대는 600여 명 중 4명만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병으로 죽고, 누군가는 노예가 되고, 누군가는 서서히 죽어갔다. 그 수많은 죽음 속에 최후의 4명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원주민들을 만나 함께 살아갔다. 시간이 흘러 스페인의 정복자들을 만났지만 이미 그들은 다른 세계에 편입된 상태였다. 겉은 그들이 온 곳의 모습을 했지만, 그들의 사고와 모든 생활방식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언젠가 그들은 돌아와 그 이야기를 글로 적었지만, 그것은 카벡사 데 바카로서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 현재 시점의 서술이었을 것이다.


이 완전한 길 잃음은 아름다우면서도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피부가 벗겨지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피의 과정을 겪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 때의 탐험대는 어떤 감정이었을지 감히 상상해 본다.

 

 

 

왜 길을 잃어야 하는가


 

인생이라는 크고 작은 길 잃음의 연속에서 우리는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어야 하고 그 시간은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시작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저자가 말하는 길 잃기들 또한 아름답지만은 않다. 책 속의 인물들은 이전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혹은 스스로조차 과거를 잊는다. 길을 잃은 이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기에 남겨진 이들의 시점으로 잔잔한 슬픔이 찰랑인다. 솔닛은 슬픔에서는 늘 풍만한 기쁨이 느껴진다고 하며 그 슬픔을 부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길 잃기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지만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이 아이러니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소개한 카베사 데 바카 이야기처럼 길을 잃는다는 것은 내가 길을 잃은 것조차 잊어버릴 때 끝난다. 하지만 그 마침표가 새로운 세계에서는 시작이 된다는 점에서 완전한 슬픔도, 완전한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대지를 찾아서 


 

올해 초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 이 책을 읽었다. 안정적인 선택과 본능이 이끄는 결정 사이 마음을 헤매던 중이었다. 어떤 선택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고민이 깊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선택의 순간이었지만 모든 가능성 궁금해하고, 들여다보는, 이 모든 과정이 피곤했다.


모두가 이런 과정을 겪는 것인가? 나만 미련하게 많은 길을 두들겨보는 것일까? 그때 만난 길 잃기 안내서의 한 문장이 내게 거대한 진동을 일으켰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 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 받지 않는 자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어떤 사람은 가치와 관습을 상속받은 집처럼 물려받지만, 어떤 사람은 그 집을 불태워야 하고, 자기만의 땅을 찾아야 하고, 맨땅에서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

 


새로운 길을 언제나 어렵다. 가보지 않은 길에는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 고생과 미련을 안 할 수는 없어도 모든 선택에 대한 꾸준한 방향성이 있을 때 조금의 힘을 비축할 수 있다. 나는 주로 모든 선택의 기준을 달리하며 에너지를 산발적으로 소비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면 목표가 흐려졌을 때 내가 온 곳을 기억하지 못하고 길을 잃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조금 더 자신 있게 길을 잃기 시작했다. 새로운 대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내게는 여전히 생경하지만, 길 잃는 이 시간 자체를 조금 더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됐다. 내가 누군가의 길 잃기를 슬프고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리베카 솔닛의 글을 읽을 때마다 상실감을 이토록 아름답게 담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결국 비워 내고서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글들이 귀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익혀야 할 기술은 과거를 손에서 놓아주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이 담담함이 수천 번 헤매었을 그의 삶을 짐작하게 만든다.


새로운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길 잃기 안내서를 적극 권한다. 저 너머에 함께 헤매고 있는 이들을 상상하며 말하고 싶다. 우리 함께 길 잃어보자고.


길 잃기에 용기는 필요하지만, 꼭 처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산책하듯이 조금씩 여기서 멀어질 수 있길.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영토를 찾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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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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