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lly] 3. 다정한 허무

반짝였던 꿈이 한낱 떠돌아다니는 비늘조각뿐이었다 해도.
글 입력 2024.08.1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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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sasa

 

 

{Jellyfish Monologue}

3. 다정한 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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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먹한 공기. 먹구름 빼곡해 햇빛 한 줄기 없고, 바다에 감도는 기운은 서늘하다. 파도 소리마저 적적한 사이, 해파리는 온화한 바다를 그리워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가라앉을수록 짙어지는 적막. 이 적막은 평온일까. 긴 꿈을 헤매다 눈을 뜨면 이곳이 잔잔한 호수였나 설핏 착각하게 될 만큼 고요하다. 평소 뺨을 쓰다듬듯 흐르던 물결은 뚝 멎은 채 해파리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여긴 온화한 품이야? 해파리의 미약한 심장 박동 소리가 대답인 양 낮은 파동을 내어준다.

 

혹시 바다 한 편이 맥동하기 망설일 만큼 아주 큰 슬픔이 일어났었던 걸까. 심연에 고인 빛, 수면에 어룽거리는 빛, 해파리 곁으로 다가오는 빛이 죄 우중충하다. 푸른 바닷물 머금고 허공의 온기 삼키며 생기 어린 낯빛을 늘 내비쳤던 바단데. 플랑크톤이라도 부유하며 생명의 흔적을 일러주는 세계였는데. 오늘은 탁한 물색만 가득하다. 소음 하나 없어서 단단하게 엉긴 침묵이 귓가를 파고든다.

 

이명이 울리기 시작한다. 불안은 이미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중이다. 물에 젖어 엉킨 해조류가 바위에 눌어붙는 것처럼 투욱- 터억- 소리의 되직한 질감이 사늘하다. 가느다랗게 울리는 이명은 실선을 그으며 해파리를 에워싸더니 물방울의 윤곽선이 된다. 홀연히 고립된 물속에서 해파리는 더욱 먹먹해진다. 약간의 진공 상태. 내면에 멍울진 공기가 차오른다. 투욱- 터억- 불안은 꾸준히 독백에 떨어진다. 알맞게 차오르는 법을 모르는 불안 때문에 마음은 거듭 비어버리는 모순을 반복한다. 뫼비우스의 띠 모서리를 타듯 흐르는 감정들. 공허함이 부피를 키운 자리엔 사념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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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한 방울.

 

올곧게 침잠하던 물방울이 살랑- 곡선을 그리더니 잘게 흔들린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물을 밀어내고 있다. 낯선 물살이 다가온다. 점점 커지는 압박감에 해파리는 파드득 정신을 차리고 위로 헤엄쳤다.

 

수증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티포트와 불안이 질퍽하게 쌓이는 독백 사이에 앉아 투명한 바닥으로 바다를 내려다봤다. 잠자코 기다리니 탁한 물빛 사이로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은빛. 나풀거리는 베일을 닮은. 아, [물고기 떼다] 작은 점 같은 생명체들이 저들이 하나인 양 일제히 움직인다. 해파리는 몸이 멎어 선 채로 물고기 떼를 멀거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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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넨 나보다도 작고 연약할 텐데… 나만 혼자야] 해파리는 초라한 기분과 외로운 마음을 애써 외면하는 중이다. 그 마음을 확인하면 그대로 믿고 움츠러들 게 뻔해서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굴려 보낸다. [외로운 것들은 세상에 없듯이 존재하는 거야] 해파리는 귀신이 되는 상상을 한다. 모두가 살아 숨 쉬고 나만 막힌 숨으로 덩그러니 남은 세계. [애초에 투명하게 태어난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해파리는 죽음이 아닌 다른 경로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방법을 상상한다. 의미 없는 망상일 뿐인데 순간 해파리는 정말 자신과 아무 상관 없게 된 세상을 홀연히 바라보는 듯한 괴이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바다가 침묵하는 사이 내면은 온 세상이 따지는 목소리의 허상으로 따갑다, ‘넌 뭐야?’

 

웅크린다. 내면의 방이 움푹 쪼그라든다. 내면 곳곳에 잘 자리 잡았던 온갖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방 한가운데의 독백 곁으로 몰려든다. 오, 이런… 여전히 수증기 피워올리며 굴러오는 티포트를 품에 안고 독백에 기대 앉아 방 안을 둘러봤다. 쪼그라들어 작아진 방은 약간의 수증기만으로도 가득 찬다. 벌써 사위가 흐릿하다. 이렇게 계속 쪼그라들면 작은 점이 되어버리는 걸까. 그럼 나는? 독백에 떨어지는 불안이 내 어깨에도 튀었는지 고민이 머릿속을 헤집는데, 해파리는 자꾸 내면으로 기어들어 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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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메마른 폭발음. 풍선이 터졌다. 너덜너덜한 고무 쪼가리가 바닷물에 녹아 사라진다. 옹골차게 응축되어 동그랗게 존재를 알리던 숨이 허망하게 찢겨나가 사라지는 엔딩.

 

겨우 나타난 몽상은 그뿐이다. 이렇게나 부질없는 꿈이라니. 이런 꿈을 꿀 필요가 있나. 쪼그라든 방 안은 파열음 하나에도 귀가 찢어질 듯 아린데, 견뎌낸 통증 끝에 남은 건 가볍다 못해 부질없다. 있었으나 손쉽게 없던 게 된 이 허무함. 등 뒤로 닿는 독백이 이상하게 차갑다. 체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당혹스럽다. 흘러갈 바닥을 잃은 상념이 누수된 물방울처럼 툭툭 발끝에 떨어진다. [한낱 풍선이야. 채울수록 크고 아름다울 거라 믿었는데. 쓸모를 찾을 수 없는 쪼가리로 흩어지고 마는…] 독백에 쏟아지는 목소리를 보곤 할 말을 잃었다. [이럴 거면 왜 살아있는 거지] 남아있던 의지 마저 잃었다.

 

독백 주변에 하얀 거품이 가득 끼었다. 바글바글. 태어나자마자 터져나가는 하얀 허무가 자라난다. 뻐끔뻐끔 숨죽여 찰박이는 소멸의 숨. [허무해. 이건 아주 큰 슬픔이야] 거품 기둥이 고꾸라지더니 좁은 바닥을 기기 시작한다. 어쩌지. 점이 되기도 전에 거품에 파묻혀 죽을 것 같아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연한 외로움에 좀먹힐 바엔, 모두 끌어안고 침잠하자. 차라리. 슬픔을 마주할 수 있는 건 더 큰 슬픔이라고, 의미 모를 말을 떠올리며 티포트에 든 것을 독백에 모조리 붓는다.

 

펑0oo. 쾅0oo. 천둥소리가 바닷속으로 움푹 파고든다. 커다란 파열음이 수심에 희석된 먹먹함으로 이명 너머에 고인 해파리를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얼른. 다른 거. 다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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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그라든 내면의 주름을 수증기의 온기로 부드럽게 만들어 펼쳐준다. 답답한 속도로 하나하나 매만져준다. 느려, 너무 느려. 회복의 다른 이름은 느린 시간이란 걸 인정하기로 했건만, 막상 닥치면 그게 쉽지 않다.

 

잠시 쉴 겸 독백에 등 기대앉아 바닥에 흩어진 거품을 그러모아 무릎 위에 올려 담요 삼는다. 토독. 토독. 거품 터지는 소리가 왠지 다정해서 고개 숙여 귀를 기울인다. 혹시 너희도 불쌍한 풍선처럼, 우리처럼, 그러니까… 허무한 슬픔이니. 물어본다. 토독 토독. 연속되는 거품의 파열음이 그 대답 같았다. 문득 독백의 안과 밖, 해파리의 안과 밖에서 침범하다가도 홀연히 사라지는 호흡들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떻게 허무함이 다정해?

 

다 사라질 거잖아 어차피.

 

방황하는 사이 해파리는 더 깊게 가라앉아 모랫바닥에 몸을 뉘었다. 심연 아래에선 물 밖의 일을 알 수 없다. 낮인지 밤인지 몰라 시간이 멈추고, 날씨와 온도를 가늠할 수 없고, 바닷물은 흐르는 방법을 망각한 것처럼 고여있어서, 해파리의 모든 삶의 감각이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왜 살아야 하지] 그런 자괴감만 겨우 떠올리는 해파리를 지켜보자니 아까 어설프게 읊조렸던 의문 한 조각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허무함이 다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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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숨.

 

매일 아침 생애 첫 숨으로 시작하는 삶이 있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숨을 쉬지 않느냐고. 어떤 마음은 그럴지도 모른다. 어느 시간은. 어떤 기억은 그럴지도 모른다. 어차피 순간은 이름 붙여주기도 전에 사라지고, 현재는 순간이 되어 사라지고, 다가올 시간은 현재가 되면 다시 지나간 순간이 되어 사라지고.

 

지금. 나는 무얼 담고 있어? 아무것도 없어. 그래서 어렵지 않아. 까무룩 잠들기 전의 삶은 저 아득한 멀리에 잊고선 눈을 뜨면 쪼그라든 허파에 다시 첫 번째 숨을 담아주는 거야. 낯선 세상에서 막 눈을 뜬 아이처럼 눈에 보이는 걸 아무거나 쥐어. 거기서부터 오늘이란 삶이 시작되는 거야. 거품을 쥐고 손금에 스며든 짠 내음을 쥐락펴락 달싹이며 살아가기 시작하는 거야. 홀연히 우연으로만 시작되는 삶이라니 너무하지 않냐고? 하지만 어떤 마음은 그렇게라도 첫 손짓을 해내지 않으면 생기를 잃고 시들고 마는걸.

 

손끝에 남은 텁텁함을 생경하게 매만지는 순간만 남은 삶이라면, 그 순간을 내 삶의 가장 반짝이는 기억으로 품을 수 있겠지. 어쩌면, 아주 어쩌면의 이야기이면서도.

 

손에 남은 소금 결정이라도 본다면 마음이 두근거릴지도 몰라. 어쩌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뿐일지라도.

 

첫 숨이 잦지. 그래도 살아.

 

허무함이 다정하지. 그래도 충분히 살아보게 하니까.

 

오늘도 첫 숨. 반복되는 첫 숨. 시간이 쌓인 만큼 바닥서부터 일어나는 망각을 알면서도 기대하는 첫 숨. 이번 생애 네 손끝엔 뭐가 남아있어? 답을 확인하기도 전에 눈을 감곤 하는 끝. 다시 내일도 첫 숨일 거야. 후- 후- 세상에 건네는 나의 미약한 숨을 믿고 가벼운 허무함을 거듭하며 살아가는 거야. 이만해도 우린 꽤 잘 호흡하는 존재니까. 그래, 이대로 날아가. 깃털, 홀씨, 뭐 그런 걸 꿈꾸면서 말이야. 우연히 착지한 물 위에서 삶을 마치고 다시 새로운 삶을 기대해도 좋아. 깃이 젖어 날아오를 몸을 잃어도 괜찮아. 아무것도 움켜쥐지 마. 괴로움에 두 눈 꾹 감았다가 뜨면 너는 평범한 해파리고 둥근 호수의 쇼베타가 되었다가, 어느 풀숲 꿈의 블루벨, 영원히 썩지 않는 젤로 케이크. 돌아보니 이 모든 게 꿈이었다. 해서, 나는 여전히 흐리멍덩한 해파리라 해도. 반짝였던 꿈이 한낱 떠돌아다니는 비늘조각뿐이었다 해도.

 

우린 여기 분명 존재하는데.

 

너와 눈맞추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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솨아- 바닷물 고여 먹먹한 귓가에 파도 소리가 부드럽게 닿는다. 그새 잠들었나. 내면에 뻗은 의식을 손끝으로 잡아 끌어당긴다. 해가 반짝 떴다. 잠결에 멍하니 부유하던 해파리는 수면 위로 머릴 내민다. 물빛 머금은 투명한 젤리 머리가 반짝반짝 빛난다. 예쁘게.

 

[꿈을 꾼 것 같은데] 파도 포말이 한가득 피어나다 눈맞추기도 전에 사라지길 반복한다. [저런 꿈을 꿨었어] 허무해서 가벼운 마음. 모두 놓아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꿈. 가만히 있었고 파도가 넘실거리고 햇빛이 종종 드리우면 가끔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그런 꿈. [이게 무슨 꿈이야. 허무해] 해파리는 수면에 누워버린다. 새파란 하늘. [저 거대한 것이 참 덩그러니 놓여있지] 덩그러니 놓인 삶. 해파리는 꼭 자신 같은 그 말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새 떼가 하늘을 가로지르면 물고기 떼가 생각난다. [걔네들도 덩그러니 헤엄쳤을 뿐이야. 모두가 부유해. 부유하기 위해서 부유하는 게 아니라 살다보니 부유하는 거야] 온갖 텅 빈 마음을 끌어안고 물 위를 떠다닌다. 잘 모르겠어. 가볍고, 가벼울 뿐이야. 사실은. 모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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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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