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대, 대화하고 있는가 [영화]

비포 선라이즈 (1995)
글 입력 2024.08.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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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하지는 않으나 눈에 띄게 발전하지도 않는 양식, 아니 오히려 그 품위가 날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는 개념을 고르자면 나는 이 시대의 '대화'를 꼽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위는 오글거린다는 일반화의 단어 아래 민망해진다. 술에, 자리의 분위기에, 내뱉는 텍스트들은 가려진다. 어렵사리 만들어진 이야기의 장에서도 '듣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말이 허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사랑은 또 어떤가. 서로를 존중하는 충분한 대화로 건강한 만남과 덜 나쁜 이별을 겪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영화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잃어버린 대화를 찾아서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소위 '비포 트릴로지'는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시리즈 작품이다. 그 시작점이 되는 <비포 선라이즈>는 유독 제목만으로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랜 서사가 될 두 사람의 출발을 담고 있어서일까. 여행에서 만난 단 하룻밤의 사랑이라는 설정이 낭만적이어서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나는 이 영화가 좋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앞서 대화의 부재와 영양가의 부족을 언급했는데, 제시와 엘린이 나누는 말과 말의 대면은 더없이 풍성하다.

 

죽음, 취향, 과거의 사랑, 가치관을 비롯하여 페미니즘과 점술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주제의 대화들은 매 순간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마저도 존중하고 비슷한 시선으로 맞춰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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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에 앞서, 나는 대화의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 사랑을 시작하기 전, 끌리는 상대와 저만큼의 분량을 함께 읽어내려가는 과정이 꼭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천천히 알아가면 된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사랑의 형태 역시 존중하지만, 정말 오랜 시간을 안정적으로 함께하고 싶은 상대라면 양과 질을 모두 잡은 대화를 끊임없이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오늘 먹은 점심 메뉴에 대한 것일지언정, 삶의 철학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두 주인공은 서로의 말을 거의 끊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 안달나는 순간에서도 최대한 서로의 눈을 맞추고, 반응하고, 대답에 그치지 않은 채 질문을 이어간다. 이것조차 내 눈에는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시간까지 나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온전히 집중하고, 잘 모르는 주제의 등장에도 흥미를 보이려 애쓰는 것. 그런 '나의 반응' 자체가 그 어떤 대화의 기술보다 앞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시처럼, 셀린처럼.

 

 


비엔나를 부드럽게 지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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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게 보았다. 비엔나라는 도시의 아름다움을. 두 주인공이 해가 화창하게 자리한 시점부터 다음 날 새벽을 맞기까지 도시 곳곳을 누비는데,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공간이 없다.


좋은 작품을 보면 촬영지를 방문하고 싶어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마음이긴 하지만 이렇게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 영화에서의 낭만적인 순간이 나의 여행에는 없더라도. 그저 목격하고 싶었다.

 

그들이 지나간 거리를, 관람차를, 레코드샵을, 벤치를, 공원을.

 

언젠가 나에게도 비엔나의 저녁과 새벽 사이를 거닐게 되는 행운이 오기를. 좋은 만남도 뒤따른다면 더 좋겠다.


 

 

사랑의 장면, 사랑의 말


 

명장면과 명대사가 넘치는 작품이다. 사실 대사 처음부터 끝까지를 전부 프린트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고 싶다. 비엔나의 아름다움을 힘입어 시각적인 장면들도 빛난다. 대단히 화려하거나 생소한 색감이 아님에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레코드샵에서 유유히 흐르는 음악과 번갈아가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마 많은 이들에게 숨죽이고 바라본 사랑의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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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로 영화가 주는 행복이 이뿐이라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을 설레게 하고, 사랑하고 싶게 하고, 사랑을 믿고 싶게 하고, 그러므로 살아가고 싶게 한다면.

이러한 연결을 이끌어낸다면, 예술로서의 역할은 완벽하게 해낸 게 아닐까.


영화예술을 사랑하다 보면 너무 많은 것을 짚어내려고 애쓰게 된다. 물론 나는 끝없이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도 좋은 창작의 시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부담을 내려놓고, 평론의 욕구를 접어두고.

 

영화가 주는 그 자체만을 깊이 품어보기를 권한다. 특히 <비포 선라이즈>의 대사들은 놓치기에 아까운 것들 투성이니까.

 

아마 평생 사랑 영화를 보게 되겠지. 어쩌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자주 눈물 흘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랑을 사랑하는 까닭은, 사랑을 말하는 영상을 사랑하는 까닭은.


여전히 그보다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은 없기에.

 

 

[박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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