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우의 방에 초대받았다 [도서/문학]

정시우 기자와 배우 10인의 솔직한 대화
글 입력 2024.08.1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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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끝나고, 배우는 어디로 갈까?’ 배우가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일굴지 궁금했던 나는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담아 배우들에게 조심스레 청했다.


“당신의 공간을 보여주세요.” 그렇게 탄생한, 배우 10인의 ‘자기만의 방’에서 나눈 인터뷰


배우의 집, 배우의 동네, 배우의 작업실···. 작품 속 역할에서 빠져나와 배우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곳.


배우의 방으로 초대합니다.

 

[배우의 방] 시작 부분 中

 

 

책을 펼쳐 세 페이지를 넘기니 까만 종이에 노란 글씨로 위의 문장들이 적혀있었다. 어떠한 이미지도 없이 암흑 속에서 빛나고 있는 저 초대 글은, 막 공연 시작이 임박한 극장 속 커튼 같았다.


초대장을 넘기고 나타난 새하얀 종이 속 Prologue. 배우와의 인터뷰에 앞서, 정시우 기자가 인터뷰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나열한 글이었다. ‘평소 잘 듣는 사람’이 아닌데 인터뷰에서만큼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짝사랑하듯 인터뷰이를 덕질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에게 온전히 시간과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시간이 만들어내는 기적’이 동행하기 때문에. 즉 사람과 사람이 같은 시공간을 보내며 깊숙한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낭만’을 인터뷰가 전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정시우 기자가 연재한 ‘씨네플레이-정시우의 Aroom’ 속 배우 10인(박정민, 천우희, 안재홍, 변요한, 이제훈, 주지훈, 김남길, 유태오, 오정세, 고두심)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다. 연기에 몰입한 배우들이 현실 속 ‘나’로 돌아오기 위해 어떤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구석구석 보여주고 있는데, 아주 재미난 네 가지 요소들이 숨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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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형식의 인터뷰


 

첫 번째 인터뷰 주인공인 박정민의 방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오후 2시부터 10까지 추억의 극장 ~ 집 ~ 야탑동 언저리를 이동해가며, 공간 소개와 본인의 근황, 배우 박정민과 인간 박정민의 이야기, 두 명의 친구와 함께하는 술자리가 이어졌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대화를 옮겨놓은 이 구성은, 나도 옆에 같이 있는 것처럼 빠른 흡수를 도왔다. 따사로운 점심시간, 여유로우면서 선선한 밤까지 시간대마다 느껴지는 분위기는 대화 속 공기를 추측할 수 있게끔 해주기도 했다.


요즘에 하도 과정을 압축한 콘텐츠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이렇게 있는 그대로 시간에 따라 내보이는 것이 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완성된 ‘글’의 형태를 일부러 흐름에 맞추려고 편집하는 것이 아닌, 자연히 ‘말’하는 과정 속에서 적절한 질문으로 편집하는 작가의 노련함이 엿보였다.

 

 


배우의 솔직한 대화와 남다른 시선


 

천우희 배우가 영화 ‘한공주’로 상을 받기 전과 후의 반응에 대해 말을 꺼냈다. 상을 받기 전에는 천우희라는 존재가 희미했지만, 상을 받고 나서 다르게 바라봐 주기 시작한 현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그런데 본인 또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 잘 모르는 영화라도 어디서 상을 받았다거나 평론가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면 괜찮은가 보다 하게 되는 게 있어요. 뭐랄까, 나의 기호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지금 시대가 또 그런 것도 같고요. 자신만의 기호가 있을 것 같지만, 주변 정보가 너무 많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에 휩쓸리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그러다 보면 한 번씩 ‘현타’가 와요. ‘이걸 내가 정말 좋아서 좋다고 하는 건가?’ 하는 순간이요.

 

pp.86-87

 

 

어떤 부분에서든 자신만의 기준과 신념이 있을 테지만, 주변의 반응에 따라 본인도 모르게 확신이 의문으로 흔들릴 때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녀 역시 선택 과정에서 귀가 얇아져 후회한 적이 있다면서, 본인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헤매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대신 지금까지의 선택과 후회가 쌓이며 ‘현명함’을 얻게 되었다는 한마디는,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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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59

 

 

오정세의 방은 다름 아닌 ‘병원 근육치료실’이었다. 촬영장이나 소속사, 물리치료 병원을 많이 찾다 보니 자연스레 병원이 그의 방이 된 것이다. 피곤한 얼굴의 정시우 기자를 본 오정세 배우는 담당의와 의논 후 비타민 수액을 맞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에 나란히 누워 인터뷰를 진행했다.

 

웃기면서도 신선한 상황 속에서 인터뷰가 시작되었고, 오정세 배우는 기자를 향해 겁이 없냐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어떻게 알았냐는 기자의 말에, 아까 링거 바늘이 피부로 들어가는 걸 보고 있는 기자의 모습을 통해 겁이 없음을 읽어냈다고 한다. 작은 행동 하나에도 주시하고 캐릭터로 녹이는 능력, 섬세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뭐든 인상적인 걸 발견하면, 내 안에 저장해둬요. 연기할 때 꺼내 쓰려고요. 기자님 보면서는 ‘주사 맞으면서 바늘을 볼 수도 있네?’가 인지됐어요. 그럼 이제 풍성하게 그리는 거죠. 가령 작품에서 외과적 응급 처치를 받는 장면을 찍을 때, ‘상처로 찢긴 부위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면 캐릭터가 강인해 보일 수 있겠구나’가 입력된 거예요.

 

p.358

 

 

 

[배우의 방] 독점 공개


 

책을 읽다 보면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공간, 대화의 맥락 속에서 포인트가 되는 물건 등을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잡지 보듯 자유분방하게 배치되어 있는 이미지들은 그 내용마저 개성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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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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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07

 

 

예시로 2개의 사진을 첨부했지만, 이외에도 배우들의 추억과 손길이 닿은 다양한 사진을 만나는 것도 묘미였다. 내가 언제 배우의 실제 방을 구경하고, 자주 걷는 길을 공유하고, 일기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TMI 가득한 이미지들을 마주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한 개인 브이로그나 영상 비하인드가 유튜브에 업로드 되었을 때의 그 설렘과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도서가 출간되었을 때 배우들의 이미지를 포토카드로 제작하여 증정하는 이벤트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포토카드 실물을 영접할 수 없었지만, 독자들의 후기를 보니 마케팅 수단으로도 팬을 위한 소정의 선물로도 매력적인 굿즈였던 것 같다.


 

 

정시우 기자의 짧은 에피소드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내는 일, 일명 ‘썰을 푼다’고도 말한다. 나도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인터뷰를 할 때 에피소드를 자주 물어보곤 한다. 다수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마치 비밀 이야기를 건네듯 짜릿함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썰을 풀어보라고 하면 막상 떠오르는 이야기가 없었다. 뒤늦게 ‘아! 이런 일이 있었는데’하고 잠시 떠오를 뿐. 나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가 궁금증을 갖고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로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그런지 매번 만날 때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고 오는 친구가 신기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정시우 기자가 풀어쓴 짧은 에피소드에서도 매력이 가득했다. 바로 밑에서 소개할 두 개의 에피소드들이 별일 아닌 평범한 상황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이 글 속에서 맛깔스럽게 풍겨 다가왔다. 상황 배경은 머릿속으로 영상처럼 재생되었고, 상대의 말을 생생히 담은 큰따옴표에서는 그들의 성격이 그려졌다.


 

따릉이를 반납하고 안재홍이 종종 간다는 카페를 찾아 상수동 골목을 걷는데, 길을 인도하던 그의 발걸음이 조금씩 꼬였다. 방향을 잘못 잡아 헤매고 있음을 내가 눈치채자, 그가 능청스럽게 한마디 건넸다. “걷는 거 좋아하신다고 해서 일부러 돌고 있습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위트 넘치는 이 상황 모면 센스에.

 

p.129

 

 

(···) 육수 맛이 가히 국물계의 끝판왕이라 감격에 겨워, 술을 마시려 국수를 먹는지 국수를 먹으려 술을 마시는지 모르는 상황이 됐었다. 얼큰하게 취해 계산하고 나오는 길, 주인 어르신에게 “국수 육수가 진짜 최고였어요”라고 전하자, 돌아온 말은 의외였다. “그거 다 실패의 맛이야. 그 육수 맛 내느라 흘린 짠내 나는 눈물이 한 바가지여. 그런데 지금도 자주 실패해. 그럼 어때, 다시 만들면 되지. 허허허.” (···)

 

p.381

 

 

일단 배우 10인 그리고 정시우 기자의 팬들은 이 책을 무조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역시 덕질을 즐겨 하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더하자면, 팬이라면 궁금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일상과 TMI들을 시원하게 대방출하고 있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장소들에서.


이 책의 제목은 [배우의 방] 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할 정도로 적확했다. 그 사람의 공간을 보면 성격이 보인다는 말에 적극 동의하는 바인데, 배우들이 소개하는 본인의 방은 숨김없이 보여주기 좋은 장소였다. 역시 각자가 애정하고 자주 가는 공간에서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를 이어가서 그런지 독자 입장에서도 편하게 읽혔다.


마지막으로 정시우 기자의 인터뷰 기획, 질문, 편집, 에세이는 나에게 두근거림을 선사했다. 프롤로그에 적은 인터뷰의 매력에서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배우와 보내는 하루는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게끔 만들었다. 타인의 다양한 목소리를 끌어내고 자신만의 글로 옮기는 정시우 기자의 능력을 본받고 싶다.

 

 

 

아트인사이트 컬쳐리스트 명함.jpg

 

 

[김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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