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셔터 아일랜드'와 '펄프 픽션' 사이의 '너츠'

글 입력 2024.08.1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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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소년'이 지난 1월 워크샵 공연 이후 스토리 상의 재구성과 추가 캐스팅으로 새롭게 선보이는 미스터리 연극 '너츠'를 관람하고 왔다. '너츠'의 공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전 공연과는 다른 스토리라인과 캐릭터들로 재탄생되어 새로운 매력을 선보일 것이라고 해서,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뒤 개인적으로 이전 공연의 스토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궁금해졌고 한 번쯤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았다.

 

우선 연극 '너츠'의 결말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해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들로 하여금 다소 난해하다거나 몰입이 방해된다고 느낄 만한 지점들도 충분히 발견 가능하다. 미국 북부 조그만 펍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조사하게 된 FBI 요원 '새미'의 정체가 자아 분열을 겪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연극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뒤섞고 그것들의 교차점을 뒤늦게 제시하는 전달 방식을 취한다. 그뿐만 아니라 연극 초반부의 대사들과 등장인물들이 자아내는 연극의 분위기가 다소 늘어지고 주제에서 벗어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몰입에 조금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연극 중반부부터 거침없이 더해가고 녹여내는 긴장감과 몰입감,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연극의 스토리 전개 방식이 보여주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고려할 때 '너츠'는 내게 충분히 인상적인 연극이었다. 특히 공연을 관람하는 내내, 그리고 커튼콜이 진행되는 순간에도 '너츠'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두 작품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는데, 그 작품들을 통해 연극 '너츠'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과 각 작품들이 가진 특징에 따른 비교 지점들을 술회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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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


 

각각 살인 사건과 실종 사건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축으로 진행되는 스토리와 고조되는 극의 긴장감, 후반부에서 정신분열이라는 소재를 통해 제시하는 반전까지. 영화 '셔터 아일랜드'와 연극 '너츠'는 퍽 많은 지점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셔터 아일랜드'의 경우 영화의 시작부터 앤드류 레이디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객관과 객관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신분열로 인한 환상 속에서 객관과 주관이 충돌했음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현실과 허구가 대립하고 허구에서 현실로 전환되기까지의 과정은 살인범 앤드류 레이디스가 지닌 환상 속에서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너츠'의 주인공 새미가 지닌 환상 속에서의 허구적 사건들은 현실의 탈을 쓴 채 관객들에게 차례로 던져진다. 잭, 토드, 다이머라는 인물들을 통해 제시되는 각 살인 사건들은 서로가 다소 무관하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말해 객관과 객관이, 현실과 현실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살인범 새미의 정신분열로 인한 자아들의 충돌이라는 현실이 드러나고 나머지 인물들은 허구 속에 남겨지게 된다.

 

다만 허구에서 현실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어서 '셔터 아일랜드'는 현실이 허구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허구를 폭로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너츠'는 현실을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풀어내기보다는 허구 속에서 자아들이 충돌하며 그로 인해 고뇌하고 고통 받는 새미의 자아 (주관)를 통해 허구를 암시하는 우회적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 두 작품의 흥미로운 차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극의 마지막에서 라디오 음성을 통해 현실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리는 것은 직접적인 방식이다.

 

특히 두 작품의 비극적 결말이 매우 닮아있다. 앤드류 레이디스는 현실을 자각한 후에도 끊임없이 허구로 되돌아가 가상의 자아에 매몰되는 자신을 비관하며 뇌엽절리술을 받기로 결정한다. 이는 진정한 자아와 인격을 포기하는 것으로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없다.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 마지막으로 내리는 현실적 판단이다. 새미 역시 자신의 실체가 연쇄살인범이었음을 깨닫고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권총으로 자살한다. 결국 관객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허구의 대립 속에서 무엇이 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하고 인지하는 것에 성공했으나, 극 중 인물들에게는 허구가 현실을 누르고 승리함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구분이 무색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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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픽션


 

강자와 약자의 대립.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폭력. 혹은 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내력과도 같은 폭력의 배경. 영화 '펄프 픽션'은 겉보기에 서로 무관해 보이는 에피소드들이 금가방과 금시계라는 각각의 상징물을 통해 반복적으로 병치되고 뒤얽히며 무엇이 어떻게 교차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 속에서 관객은 강자와 약자가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폭력의 개념과 궁극적으로 타인 혹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폭력을 제거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끔 만드는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테마는 바로 자존심이다. 상대의 자존심을 무시하고 짓밟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게 되는 연유를 발견하고 그것이 또 다른 폭력을 연쇄적으로 재생산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영화의 결말부에 등장하는 작중인물 쥴스의 대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진실은 너는 약자이고 나는 사악한 폭군이라는 거야. 하지만 나는 목자가 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세미를 억압하고 폭행하며 방치했던 인물들이 강자의 입장에서 목자가 되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예컨대 전기수리공이나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약자의 전형은 무너진 자존심과 그로 인한 폭력의 발생으로 연결된다.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가정으로부터의 근본적인 폭력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펄프 픽션'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누군가의 앞에서는 강자로, 다른 누군가의 앞에서는 약자로 그려진다. 빈센트와 쥴스가 두목 마셀러스의 앞에서는 약자의 입장이지만 버치와 강도범들 앞에서는 강자인 것처럼. 우리는 언제든지 새미가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할 수도 당할 수도 있다. '펄프 픽션'과 '너츠'에서 크게 연관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이 맞물리며 관계 속에서의 새로운 폭력이 발생하듯이. 또는 그러한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폭로되듯이.

 

따라서 비폭력에 대한, 목자가 되는 길에 대한 질문들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한 까닭에 새미의 죽음은 너무나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너무나 쉽게 폭력을 관망하는 자들에게, 폭력에 무감각해진 자들에게 울리는 경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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