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것'을 채우는 건 떨어져나간 감정이야 [도서/문학]

오은의 『없음의 대명사』에서 대명사 찾기
글 입력 2024.08.1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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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사실 많이 읽어보지 못했고, 읽으려는 시도 자체도 별로 갖지 않았다. 활자라는 개념이 나에겐 소설과 에세이, 그리고 평론과 같은 영역에만 붙어있다. 왜냐하면 시는 확실함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는 이에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 깨지고 태어나는 방식이란 것을 주체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얼마 안 되는 압축된 문장 자체에 애가 타고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표현들 앞뒤 가리지 않고 붙여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무언가를 진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활자라는 개념에서 더 나아가 책은 지식 이상의 무엇,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원동력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자기 자신조차 챙기지 못했던 무시된 감정들을 복구하고 인정해 주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인정하기로 결심하는 것.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일을 단지 작품으로만 표현한다는 지점이 예술이었다.


오은 시인의 『없음의 대명사』를 읽게 된 경로 또한 원동력의 개념과 비슷하다. 몇 년 전에 친구가 선물해 주었지만, 그 당시에는 추상적인 대명사 안을 채울 경험이 부족했었는지, 갑작스러운 감정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했던 탓인지 30장 정도를 읽고 덮어놨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좋은 기회로 좋은 예술가들의 좋은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안에 무엇인가 비워져 '나는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느꼈다. 비워낸다는 것은 또한 채워나간다는 것이다. 새로운 나를 인정하기 위해선 과거의 나를 비워내는 것처럼. 채워지는 것들이 '없음' 그자체라 하더라도 나는 나의 없음을 대명사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인의 말

 

'없었다'의 자리에는 '있었다'가 있었다.

 

2023년 봄

오은

 

 

앞선 시인의 말은 『없음의 대명사』의 제목 다음으로 첫 번째 장을 넘겼을 때 보았다. 그리고 이 문장은 책을 읽으면서 쌓인 안개 속에서 규칙적으로 떠오르는 조수와 같은 문장이었음을 깨달았다.


문학평론가인 오연경은 시인의 말을 "'잃었다'는 것은 무언가가 지금-여기에 없음을 의미하면서 언젠가 여기에 있었음을 전제한다. '없다'와 '있었다' 사이의 시차와 간극을 메우는 것이 우리의 슬픔이다. 더 이상 '이것'으로 가리킬 수 없는 대상을 다시 말 속으로 불러내기 위해 '그것'을 열렬히 호명한 이번 시집에 가득한 것은, 그러니까 슬픔이다. 시인의 대명사는 잃어버린 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있게 한다."라고 평한다.


그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바로 차례가 등장하는데, 차례를 빼곡히 채우는 대명사는 '그곳', '그것들', '그것', '이것', '그들', '그', '우리', '너', '나' 순이다. 책이 정한 방향을 따라가다 보면 대명사가 지시하는 의미의 범위가 줄어듦과 동시에 거기에 들어가는 대상도 또렷해진다.

 

 

무엇이 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 있는 채로

무엇이 있다

이름을 모르는 채로

내가 있다


나는 골똘해지고

무엇도 덩달아 골똘하다


수수께끼를 내지도 않았는데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며칠 후

이름을 떠올린 채

허무해지는 내가 있다


그때 무엇은 호명되지 못했는데


길 위에서 버스 안에서 회전문 밖에서

생각 끝에


이름이 있는 채로

무엇이 있다


「그것」 p.44-45 전문


 

너 어디야?

눈앞에 있어도 너는 나를 찾았다


한걸음 뒤에


나 여기 있어

고작 반걸음인데도 한걸음에 달려갈 수 없었다


반걸음 사이


우리는 서로를 애타게 찾았지만

아무리 타도 닿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때는 그것을 닳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했으나


반걸음 아래


등잔 밑처럼 비밀한 이야기가 있었다

아무도 들추어보지 않은 실마리가 있었다


등이 켜지지 않아 통째로 비밀했다


그때는 그것을 신비라고 여겼으나


반걸음만 더


한 걸음과 두 반걸음은 달라서

함께 걷는 일은 걷는 일이었다

어긋나서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던 바구니 같았다


그때는 그것을 구심점이라고 믿었으나


반걸음 앞에


네가 있었다

내가 너라고 부르는 사람이

눈앞에 있어서 늘 등 뒤를 바라보게 하는


그때는 그것을 동경으로 받아들였으나

반걸음으로


나는 걷는다

또각또각 또박또박


반걸음만큼


나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반걸음을 움직였다

반걸음이나


「너」 p.127-129 전문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화장실에 갔다

 

혼자는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었다가

사람들 앞에서는

왠지 부끄러운 것이었다가

 

혼자여도 괜찮은 것이

마침내

혼자여서 편한 것이 되었다

 

화장실 거울은 잘 닦여 있었다

손때가 묻는 것도 아닌데

쳐다보기가 쉽지 않았다

 

거울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볼꼴이 사나운 것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차마 웃지 못할 이야기처럼

웃다가 그만 우스꽝스러워지는 표정처럼

웃기는 세상의

제일가는 코미디언처럼

 

혼자인데

화장실인데

 

내 앞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웃을 수 없었다

 

「나」 p.134-135 전문

 

 

'그것'은 화자와 청자 사이의 어떤 암묵의 조건을 통해 전달될 것인데, '그것'이 지칭하는 바를 모를 때 우리는 각자의 상상에서의 이해가 녹여 나와 오해를 향해 내달린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들은 억압받는다. 알지도 못하는데 북받치는 감정으로만 삐져나오는 덜컹거림은 '그것'에서 '너'로, '너'에서 '나'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광활하던 '그'들이 사라지니 혼자가 되었다. 알지 못할 때는 답답하고, 알았을 때는 공허하다. 앞선 오연경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시집을 가득 채우는 것은 '슬픔'이다. 그 슬픔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바로 상실이다. '그'라는 지시대명사가 인칭대명사로 바뀔 때, 우리는 이해로서 갖고 있던 것들이 오해로 변모하며 덜어내야 할 것이 생긴다.


그렇기에 '그곳'을 떠돌던 유령은 슬픔을 품 안으로 들임으로써 비로소 '나'가 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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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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