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중예술에 대한 가벼운 고찰 [문화 전반]

우리가 그리는 세계는 어떤 욕망을 투영하는가
글 입력 2024.08.18 11:2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간에 맞게 오는 지하철, 그 안에 들어서면 피곤한 눈빛으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지긋지긋한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그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서서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을 때면, 마법같이 이 지하철이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면 어떨지 따위의 상상을 하게 된다. 판타지 웹소설 최고 히트작인 <전지적 독자 시점>처럼 지하철을 탔더니 소설 속의 세계로 향하는 지하철이었다거나, 알고 보니 지하철이 고양이이었다거나. 아, 이건 이웃집 토토로다.

 

수많은 소설, 만화, 드라마, 영화들이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보면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이 나만은 아닌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은 언제나 그 시대가 가장 원하는 것을 그릴 수밖에 없었고, 그려왔다. 대중예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예술을 향유하는 특정 계층의 취향에 따라 예술은 변화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경제가 발전하고 정치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넓은 의미의 예술은 사회 대부분이 즐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물론 예술의 정의, 대중의 정의가 따로 필요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대중의 예술’로 대중예술을 정의하겠다.

 

다시 돌아와 예술을 향유하는 특정 계층의 취향에 따라 예술이 변화했다는 것을 반대로 하면, 어느 시대의 예술을 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바랐던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인상주의는 빛에 따른 자연의 순간적인 변화 양상을 자유롭고 불규칙한 터치의 중첩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예술 사조가 등장한 배경에는 작품 구입 주체가 정부, 교회에서 개인 소장가로 바뀌면서 다양한 주제가 시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이에 더해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미술은 더 이상 외부 세계를 재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의 예술 향유층은 화가 개인의 창작과 독자성을 바란 것이고 예술은 이에 응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현재 영화, 드라마, 만화와 같은 대중예술에서 가장 사랑받는 세계관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쉽게 죽고 쉽게 다친다. <부산행>과 <킹덤>에서는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고 살아남기 위해 거리낌 없이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이에서 살아남고, 알고 보니 좀비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 등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런 구조의 예술이 많다는 것은 대중들이 꿈꾸는 욕망이 이 안에 담겨 있다는 뜻일 것이다. 다치는 것은 아프고, 쉽게 죽는 세상은 너무나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왜 더 쉽게 죽고, 더 쉽게 죽이는, 더 쉽게 다치는 세계를 상상하고 열광할까? 그리고 왜 주인공은 항상 그 속에서 살아남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일까?

 

 

kingdom.jpg

 

 

항상 이런 상상은 사람의 작은 욕망에서부터 비롯한다. ‘시간이 멈춘다면…’ 같은 상상은 흘러가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깝고 귀중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같은 상상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매일매일 흘러가는 같은 일상 때문에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쉽게 다치고 쉽게 죽는 세상이라면…’ 과 같은 상상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상에서 크게 다치기 쉽지 않다. 운이 좋지 않으면 종이에 손가락이 베이거나, 발을 헛디뎌 넘어져서 다리에 멍이 든다. 그만큼 일상은 조용하고, 단조롭다. 부장님께 결재를 올리면서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지는 않는다. 아픔을 겪을 필요가 없는 만큼 우리는 눈에 띄는 성장이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쉽게 다치고 쉽게 죽는 세계라면, 우리는 결정 하나라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결정 하나가 잘못되어 누군가가 죽는다면(혹은 내가 죽는다면) 엄청난 후회와 고통 속에 엄청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이런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대중예술을 통해 대중은 일상을 벗어난 엄청난 자극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이 목숨을 담보로 크게 잃고 크게 얻는 모습은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왜 어떤 위험에 처해도 살아남고, 생존에 생존을 거듭해 성장하고, 알고 보니 특별한 출신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일까? 좀비가 활개 치는 세상의 주인공은 운 좋게 살아남고 살아남다 동료들을 만나 점점 성장한다. 그리고 알고 보니 주인공이 보균자였다거나, 특별한 능력이나 인연으로 좀비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가진 영화, 소설, 만화는 열 손가락을 넘어갈 것 같다. 대중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항상 그냥 지하철의 수많은 인파 속 하나일 뿐인 내가 특별하다는, 나도 나로 존재하고 싶다는 정체성에 대한 욕망이 특별한 주인공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고 항상 행복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자신이 죽인 사람들로 인해 주인공이 겪는 고통과 시련은 아프고 잔인하기 그지없다. 손이 베인다면 마데카솔을 바르며 다음부터 조심해야겠다는 정도의 자그마한 성장을 하게 되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한계를 깨는 극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나날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동시에 자신은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느끼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의 예술을 보며 과거 사람들의 욕망을 점쳐보듯이 언젠가 미래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예술을 보며 우리의 욕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최선.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