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I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
글 입력 2024.08.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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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한테 못 할 짓 했다는 거 알아. 누군 내가 너무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며 산다고 해도, 넌 나한테 사소하지 않았잖아.

 

I 너와 어울릴 무렵에는 바다도 아닌 것이 온통 푸르면 주제를 넘는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럼 넌 옆에서 꼭 한 마디를 덧붙였지, 푸르다는 말에 주인이 어디 있냐고. 그러게. 고작 말 같은 것에 주인이며 소유권이며 그런 게 어디 있지.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그냥 하고 싶은 말들을 할 걸.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서 미안해. 이 말 먼저 하고 싶었어. 네 기대에 부응 못 해서 미안. 너도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내가 미안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오래 했어. 그렇게 어린 생각인 줄도 모르고. 난 네 생각 가끔 해. 사람들이 그런 말 많이 하잖아, 관계에 온 힘을 쏟은 사람은 후회가 없다고. 난 그러지 못해서 네 생각 많이 하나 봐. 

 

네가 나한테 속삭였던 비밀들 있잖아, 누군가의 A, B, C. 그런 거. 난 아직도 다 내 입안에 있어. 네가 오해하고 남겨둔 것 중에 난 이게 제일 억울했어. 난 죽을 둥 살 둥 지켰거든, 네가 세상으로부터 지키던 것들. 그랬는데 내 실수 하나로 그것까지 모두 무너져 내려서 그건 엄청 허무하더라. 이제 와서 소용없을 거 아는데도 말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서툴렀어.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지 몰라서 옭아매는 방식으로 좋아했어.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몰라서 널 감추는 방식으로 위로했어. 그게 다 너에게 상처가 됐겠지. 이제야 진심으로 알아. 그리고 이제야 너를 진심으로 이해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산다는 걸 네가 기꺼워 해주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네가 떠나던 날 넌 내가 평생 널 알게 된 걸 후회했으면 좋겠다고 했지. 너도 그런다고 했고. 나한테는 그 말이 제일 길고 두꺼운 칼이더라. 그걸로 심장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잘려진 채로 살아. 그게 나의 벌이니까. 더듬어도 만져지지 않고 환상통만 있는 흉터. 마치 너 같아. 정말 그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졌잖아. 내가 겁쟁이인 걸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도망칠 수 있었겠지, 내가 어디도 감히 못 따라갈걸 아니까. 그런 행동이 마땅하단 걸 알면서도 마음이 얼얼한 건 어쩔 수가 없어서 한참을 멍하게 지냈어.

 

네 생일이 돌아올 때면 네가 내 생일을 축하하던 때가 기억나. 큰 택배 상자 하나를 꽉꽉 내 선물로 채워 들고 오면서 멋쩍게 웃던 모습. 그때 우린 돈이 많지 않았으니까, 4월이 오기 전까지 조금씩 조금씩 선물들을 모아서 택배 상자에 쌓아두었다는 말. 너무 꾹꾹 눌러써서 오돌토돌하던 편지. 정말 둥글고 정갈하던 네 글씨체. 넌 뭘 그렇게 많이 나한테 주고 싶었을까.

 

편지라는 거 너랑 난 다시는 주고받을 수 없겠지. 그런 사이로 남아버린 게 이제는 아프지 않아. 우린 이미 많이 컸으니까, 각자의 줄기대로 살아가야 맞다는 생각을 해. 전할 수 없는 편지는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고 네가 그랬는데, 난 여전히 8월이 돌아오면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한 번만 더 네 안녕과 건강을 바란다고 생일 축하한다고 그래보고 싶어. 그래서 내 에디터 활동을 핑계 삼아 마지막 편지를 적는다. 영원히 너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때 이후로 더 이상 네가 싫어하는 일들 안 하려고 노력했거든.

 

I야, 네 젊음이 어디서든 적당히 따뜻하고 너에게 친절하기를 바란다. 넌 늘 극적이고 역동적인 무언가는 싫어했으니까, 차분하고 고아하던 네가 여전히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기를. 이건 너무 내 욕심인가. 아무쪼록 네 찬란한 모습들이 여전히 간직되어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 내가 정말 미안했어. 용서해달라는 거 아냐. 언젠가 볼 일 있다면 나만 잠깐만 알아볼게. 너는 내 이름도 까먹었으면 좋겠다. 생일 축하해.

 

 

 

아트인사이트 명함.jpg

 

 

[황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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