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도서/문학]

견딜 수 없는 무거움?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글 입력 2024.08.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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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중략)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중략)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4~5p

 


 

1) 양자택일로서의 선택


 

삶, 존재의 시간, 존재하는 모든 순간의 집합. 존재의 모든 순간은 선택을 수반하고, 그 결정은 언제나 우리를 알 수 없는 미래로 이끌곤 한다. 삶은 선택의 결과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 허나 그 결과의 실상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아볼 수 있다. 뒤돌아보는 방식으로만이 그것, 선택의 실상은 드러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 끝내 선택의 결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일상에서 자주 보이곤 하지만). 선택, 그것은 행함과 행하지 않음, 옳음과 그름, 긍정과 부정, 유의미와 무의미에 대함, 또는 이러한 가치판단과 완전히 무관한 것, 좌측 혹은 우측 편에 속한 것. 전편 인용한 쿤데라의 말이 가리키듯이, 우리는 선택의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 그 정답을 알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함과 동시에 포기하게 된 반대편 삶의 갈래를 영영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좌측 편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 갈림길의 우측 너머는 영영 상실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선택의 양자택일적 순간에 있어 무엇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실증적인 의미로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선택이 두렵게 다가오는 까닭이 이와 같고 그것은 불가해와 불확정성, 그러니까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영영 알 수 없으면서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택해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불가해)과, 어떤 선택의 의미가 확증되지 않고 가변하고 있음에도 그것의 의미를 믿음으로써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불확정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우리 실존의 불안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미지와 무의미에 대한 불안. 그리고 우리는 저항한다. 선택의 정답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의 의미를 확증하지 못하면서도 그 결과를 믿어야만 하기에, 그렇게 동력을 얻는 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일찍이 내린 모든 선택은 훌륭하거나, 올바르거나, 하다못해 크게 틀린 것은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에 있어선 적어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되곤 하였다. 자신이 틀렸다는, 총체적으로 그릇되었었다는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얼만 한가.

  

이러한 인간적인 사실을 전제한 후에야, 우리 삶을 바라보는 다음의 두 가지 관점이 선명히 대두된다. ‘삶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또는 ‘삶은 단 한 번뿐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삶의 의미와 올바름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 다음에야 진지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딱히 삶의 의미를 구가하지 않는, 고향 집 마당을 지키는 내 늙은 골든 리트리버에게 이르러 이러한 질문이란, ‘과연 오늘 저녁밥은 몇 시에나 줄런가?’ 보다 가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삶은 존재의 시간이며, 그 모든 시간,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순간과 그 사이사이에 수 놓인 선택의 집체. 삶의 의미와 선택의 올바름, 이 불가해와 불확정한 무언가, 그럼에도 대두하는 그것에 대한 갈증을 전제한 다음에야 이 질문은 진지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삶이 무한히 반복되건 단 한 번뿐이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되지 아니하다.

  

두 가지 양극단의 사실 중 어느 한 가지는 진실일 테다. ‘삶은 반복된다, 혹은 전혀 반복되지 않는다.’ 허나 어차피 우리는 그중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으므로 이 두 관점에 대한 문제마저도 선택의 문제로 전락해버린다. 그대는 삶을 무엇으로 바라보기로 선택하였나, 무한이라는 견딜 수 없는 무거움? 아니면 단 한 번뿐인 허무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일찍이 나는 이것이 선택의 문제, 겨우 그 정도 문제라는 사실을 미처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다 알 수 없는 생애의 서사,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인과에 의하여 슬며시 채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너무도 가까이서 빛나는 진실처럼,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도, 심지어 그릇된 것이라 여기기도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의 무거움, 혹은 가벼움. 최초에 이는 천성과 생애에 의해 채택되는 것이나, 얼마든지 재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선택할 수 있다 하여, 그것이 손쉬운 일이라거나 오직 열정과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이다. 채택된 것과 재선택하려는 것, 그 사이의 저항, 치열함과 뜨거움 또한 몸에 새긴 자욱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아주 다른 글에서 다루어보자고.

  

그것, 양가 택지 중 자기자신이 더욱 밀접하게 살던 것, 자신의 몸과 정신이 자연 선택한 어느 한 가지 결정에 의식이 결부되어 있던, 우리 젊은 날의 모습은 자연하다. 젊은 시절부터 이런 것, 아니 비단 이 문제에 대한 것뿐 아니라 모든 양가적인 택지 앞에서 소실점을 포착하고 중심을 견지하는 일은 일견 불가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아- 그래,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기도 하였지. 조금 모호한가? 내가 몸으로 체득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의 반만이라도 내가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차설. 여하간 그것은, 아니 그것까지도 선택이다. 자기 존재의 무게, 무거움 혹은 가벼움마저도. 마치 자연결정처럼 자신의 천성이 채택한 삶의 무게가 있을 테요, 그것을 수정하거나 재선택하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라지만, 거꾸로 뒤집어 말해보자면 우리가 그러한 정체된 한 가지 상태로서 죽는 순간까지 불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변화란 아주 긴 시간 동안의 선택이 쌓여서 일어나는 것이다.

  

선택, 두 갈림길의 좌측 혹은 우측편에 대함. “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과 “Es konnete auch anders sein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필연과 우연, 의미와 무의미, 염세와 냉소, 그리고, 무거움과 가벼움. ‘모든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것으로서 이미 결정되었다!’, 또는 ‘모든 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즉 양가적, 양자택일의 문제. 오직 선택의 문제, 그뿐이었으나… 그것이 선택이었노라는 하나의 사실은 아주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무엇으로부터? 가장 먼저 인식, 그 다음은 의지로부터. 의지는 인식에 후행한다.

  

전자가 참이라면 모든 선택은 필연이 되고,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이 장차 무한히 반복됨으로써 그렇게 된다. 한편,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내릴 선택과 결정이 장차 무한히 반복될 것이므로 그것은 가장 무거운 짐, 인간의 상상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 중량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비판 여지가 있음을 전편에 언급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과거에 경험하였고 결정된 것의 재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존재가 경험하고 관통해나가고 있는 ‘지금 이 지상의 순간’에 그 질문의 의도를 투사하기 위해서는, 다중우주론을 전제해야만 한다.

  

한편 모든 선택이 장차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에 ‘가장 무거운 짐’이 된다는 전제 하에서는, 무거움이라는 우주적 어둠이라는 배경 위에 수 놓인 존재의 가벼움이란, 반짝이고 사라지는 별처럼 찬란히 빛난다. 실로 나는 그 가벼움을 오래도록 동경하였다. 아 가벼움. 그것은 얼마나 산뜻하고 명쾌하며, 자유한가?

  

“네 지금의 선택이 장차 네 미래를 결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두려워하고 신중할지어다.” 이렇게 말하고 스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무거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앞에 선 가벼운 사람은 말한다. “그건 채 알 수 없는 것.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골몰치 아니한다. 고로 그리 진지하게 굴 지도 않을 것이며, 신중함 때문에 자칫 이 순간을 놓쳐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에, 또렷하게 맺히는 가벼움의 광휘를 사랑하고, 또 질투해왔다.

 

 가벼움이 그 자유함에 말미암아 아름다운 것이 되고, 그에 대비되는 무거움이 끔찍하고 두려워할 만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짐짓 사실. 그러나 무거움은 정말로 끔찍한 짐이고 가벼움이란 찬란함, 오직 그뿐인가? 세상사가 그렇게 명확히 구분지을 수 있어 어디 명쾌한 것이었던가, 작가는 묻는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모든 질문을 사랑한다.

 

 

 

2) 책임, 무거움과 가벼움


 

존재의 등짐에 얹히는 것, 무게라는 비유의 원관념은 책임이다. 여기서 책임이란 반드시 피대상자인 인간을 상정하지 않는다. 즉 통속적인 것, 특정 인간에 대한 책임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책임은 어떠한 원인으로서의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행위 사이의 인과에 대한 태도이자, 그에 대한 종속의 정도이다. 인과와 개연에 천착하는 인간은 일찍이 내린 선택에 관해 통감할 책임이 무겁게 다가오고, 그 반대의 인간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 즉 가벼울 수 있다는 것.

  

참 이런 문제를 논할 때마다 어려운 것은, 그것을 전함에 있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책임’은 통속적으로 논해질 때엔 오롯이 미덕이라, 소위 무거운 인간은 자신이 그것과 한없이 가까이 있다심에 내심 기뻐하거나 자랑스러워 할 테고, 스스로 가벼운 인간은 그 정반대의 이유로 인해 반감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 그러나 통속적인 것으로서 논해질 때에도 그것은 오로지 참일 수 있는가. 강한 책임감이 사랑스럽고, 그 반대편은 그렇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개연쯤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의 확신은 믿음일 뿐. 실상은 늘 양극의 사실이 어지러이 혼재되어 있는 카오스가 아니었을까.

  

나는 최대한 가치 중립적으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쓰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전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허나 책임, 여기에서 다루는 한에 그것은 미덕이 아니이라. 그건 그저 태도이자 관점이며, 선택할 수도 가변하기도 하는 것. 그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천착의 정도, 종속의 정도에 불과하다. 하여 책임, 그 등짐을 인 무거운 이는 과거와 인과로부터 자유하기 어렵고, 가벼운 이는 비하여 복되이 자유하다. 그러나 한편 가벼운 이는 과거라는 인과의 뿌리, 그 대지를 상실한 채 자기 존재의 필연성을 우연 위에 피투하고, 무거운 이의 존재 감각, 스스로 영위하여 느낄 자기 존재의 필연성은 그에 비하여 온존하다. 궁싯거릴 진지함과 허무한 자유로움. 무엇이 더 바람직한가? 그대는 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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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인간은 자신이 과거에 내린 선택과 지금 이 순간에 드러난 결과, 그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한 관점으로 세계와 그 안의 자신을 바라본다. 과거의 잘못된 선택이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지금 다가온다면, 그는 이 두 가지 사건 사이에 천착하여 깊이 골몰할 것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세계로부터 마땅치 않은 것들을 대접받고 있다면, 그것은 일찍이 자신의 그릇된 선택 때문이라고 그는 여길 것이다. 즉, 그의 책임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래야만 하는, 모든 사건의 전말을 자기 과오로 여겨야 할 절대적 당위는 존재치 않는다. 이 또한 선택일뿐. 여전히 후회는 이러한 사람의 것이다. 후회는 이 사람에게 더욱 가까이 놓인 것이다. 그의 본질이 그 후회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는 과거의 실패에 골몰함으로써 미래를 가늠하려 한다. 그러한 관점 앞에 놓인 모든 사건은 완전하게 이어진 것(아직 미지에 의해 가려져 있을 뿐)이기에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대할 수 없게 되지만, 그렇기에 그 사람은 산출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미래를 꿰뚫어보려고 한다. 인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 그의 발은 너무 무거우나, 그렇기에 자신이 어렵사리 내딛을 걸음은 중력의 축복 하에 대지에 단단히 밀착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결정되었고, 이미 결정된 채로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그렇게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한편 그러한 관점의 극단에서 지쳐버린 어느 존재의 무거움은, 얼마든지 염세가 되어버릴 수도 있던 것이다. 이렇듯 무거운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로부터 마음껏 자유하지 못하다. 그는 인과에 종속된 존재이며, 장차 자신의 미래 또한 그러한 관점에서 설계하기를 원한다. 미래를 관측하고 예측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르게 말하자면, 돌다리를 계속해서 두드리는 방식으로 삶이라는 미지를 건너가려 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디고 무거운 걸음이겠는가.

  

그러나, 그렇기에 더 큰 ‘삶의 의미’를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 언제나 그랬듯 인간의 오묘함일 것이다. 그가 간주하는 세계는 모종의 ‘일관성’을 내포하는 닫힌 세계이자 순환하는 세계이다. 한편 그러한 관념으로서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도출하고 누려볼 수 있는 것 또한 그것, 삶의 의미란 바로 그 ‘일관성’이다. 불변하고 꾸준한 것으로서의 ‘의미’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와 같은 류의 질문이란, 어떤 미지의 공식이 있어 올바른 항을 대입하면 상응하는 결과를 산출하리라는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태어나는 질문. 하여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은 가설과 공식을 만들고 그 항의 자리에 자신의 삶을 대입하며 결과값을 조율해나간다. 

 

삶의 의미란 이 ‘일관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었으며, 우리가 삶의 의미를 ‘감각한다는 것’이란 그것을 발견했다거나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인 것이다. 아, 감미로운 느낌, 여전히 그것은 느낌이기에 얼마든 착각할 수도 있는 것. 하여 우리중 누군가는 '더는 생의 의미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 사람은 바로 그 의미에 대한 믿음, 실은 그저 느낌에 불과한 그것을 잃어버리고서는, 자신의 처지를 배반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는 무거움을 추종했던 만큼, 이제 가벼움을 추종한다. 복수하듯 강렬하게, 가벼움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쯤 다음 파트, 가벼움을 한번 톺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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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벼운 인간은 이상 언급한 일체 무거움을 이해치 못한다. 그 반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였듯이. 그에게 있어 무거움 그것은 마치 지나치게 장엄한 종교의식을 바라보는 무교인의 공허한 몰이해와 닮았다. 과거와 지금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렇게까지 천착하고 가슴 앓아야만 하는가, 가벼운 자는 의문한다. 왜냐하면 무거운 자에게 세상이란 이미 결정된 것으로서 다가오는 것이었던 반면 가벼운 자에게 그 모든 것은 우연하게, 즉 단 한 번만 발생하는 무작위의 것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자에게는 반복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가벼운 자에게는 전혀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한 번 일어나고 말 것에, 무엇 그리 열심히 들여다보고 분석할 만한 것이 있을까?

 

 세상은 퍽 공평하기 때문에, 그 가벼운 존재에게도 일찍이 내린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되돌아올 것이다. (그릇된 선택과 젊은 날의 산술적 무지, 그 자체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도 선택의 결과는 준엄한 얼굴을 하고선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네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것을 어찌할 테냐. 이것은 네가 뿌린 씨앗이요, 그 열매이다.’ 허나 사안이 심각하지 않다면, 달리 말해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것이라면, 가벼운 이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미래를 향하여 걸어갈 것이다. ‘일어난 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 쏟아진 물, 던져진 주사위.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도 재현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천착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물며 그로 인해 지금 이 순간과 미래를 허비하는 일이란!’ 그는 과거의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미래의 일에도 크게 골몰하지 않는다. 보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더러 그런 경우도 보아 왔지만), 쪼아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끝내 모든 것은 우연의 조화로부터 태어나는 것. 그러므로 나는 과거에 천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미래를 가늠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주사위를 던지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는 삶이라는 미지의 돌다리를 주사위 눈에 적힌 숫자만큼 성큼성큼 건넌다. 가끔 돌이 수면 아래로 쑥하고 빠지기도 할 테나, 완전히 익사하지만 않는다면 어찌 되었건 상관없는 것이다. 들여보련 들 미리 알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과감하고 자유하면서, 위태로운 발걸음인가. 

 

이렇듯 책임은 그 무게로 하여 한 인간의 존재를 대지에 내리깔아버릴 수도 있지만, 한편 그만큼 지상 가까이 속하게 하는 힘. 반대로 그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 인간, 한없이 가벼운 그 사람에게 있어 삶이란 아무런 연속성도 갖지 못하는 것, 모든 순간이 개별적이고 무작위적인 것, 책임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우연, 단 한 번뿐인 것으로서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상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인간의 모순에 대한 양비론적 관점이다.

 

 

 

3) 고뇌와 키치


 

그렇다면 삶에 대한 관점이자 태도, 무거움 혹은 가벼움에의 긍정, 그 중 어떤 것이 더욱 택할 만한 것인가. 작가는 답을 결정해주지 않는다. 만약 어느 한 가지를 답으로 상정하였더라면 이 책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아 그것은 얼마나 기나긴 고민이었던가, 나의 것으로도! 오래도록 물어왔다, 무엇이 정답인가. 가벼움, 혹은 무거움! 두 가지 극단 앞에 놓인 인간은 처음에, 어느 한 가지를 긍정하여 채택하고 굳건히 믿기 위해 그 반대편을 부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수많았던 선택이 그러했듯,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덧없는 미련을 분연히 잘라내버리곤 신 포도주처럼 기억 속에서 삭여내듯이. 우리의 믿음은 나약하기 때문에 반증을 요하고, 그것은 나약할 제 반대편의 희생을 통해 영위되는 불완전한 것이다. 하여 무거운 존재로서 그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는 사람은, 맨 처음 의도치 않게 그 대립항인 가벼움을 부정하게 된다. 반대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극단적 선택은 ‘고뇌’의 유무를 통해 동시에 긍정될 수 있었다. 고뇌란 정답을 확정할 수 없는 이러한 것에 대한 우리의 불온한 갈증. 그것을 끝내 밝혀내리라는 분연한 의기와 모든 진지함, 무작위한 것들로부터의 일관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열정은 무거운 이의 소유요 방식이다. 한편 정답을 알 수 없는 이런 것으로부터 애초부터 무관하여, 해맑은 눈과 매일의 감각으로 세상을 새로이 바라볼 줄 아는 자유로움은 가벼운 이의 소유요 그러한 형태의 방식이다. 두 가지 극단은 서로 대척점에 서서 마주하나, 고뇌라는 행위를 통해 아주 멀리서 얽어든다. 가벼움과 무거움, 그 중 무엇이 정답인가! 고뇌 속에서 가벼운 이는 무거움을, 무거운 이는 가벼움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고, 우리가 다다를 대지는 그 사이의 어딘가이다. 모든 모순과 딜레마에 대한 답변은 이러한 열린 결말로서만이 불완전하게 선언될 수 있다.

  

더는 무거운 이라 하여 자유롭지 않고, 가벼운 이라 하여 고뇌하지 않는다고, 하다못해 그 고뇌까지도 ‘가벼우리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무거움은 자신의 등짐 아래에서 도리어 안식을 누리기도 하고, 거꾸로 가벼움은 자유히 흩어지는 상실감 속에서 도리어 방황하기도 한다는 것을 느지막이, 몸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가벼운 자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온전히 고뇌하되 그의 존재가 그러하듯이, 바람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이 거하고 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일찍이 다 아지 못했다. 가벼운 이의 고뇌란 표류하는 성질이며, 그것은 대단히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지 못했다. 바로 이 다음의 제재, “키치”를 알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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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 나는 모든 종류의 고뇌를 사랑한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을 의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온한 상태로부터 태어나는 갈증, 의심으로부터 태어나는 이 정신의 고통을 나는 사랑한다. 강렬한 믿음을 허물고 삶에 대한 회의를 뿜어내게 하는, 맹신을 서서히 부식시키는 그 독한 회의를 품게 만드는 것. 우리의 지혜가 여기, 이 고뇌로부터 익어가지 않는가? 선택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 선택을 의심할 줄 아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또한 자연히 주어질 그 고뇌. 우리의 지혜를 익어내는 것은 열사와 혹한이 아니인가? 그렇게 무거운 이가 덜어낸 가벼움으로, 또한 가벼운 이가 덧대어낸 무거움으로 끝없이 밀고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인가. 우리를 우리 너머로 건네주는 것, 실은 머물지 못하도록 쫓아 주는 것.

  

인간적인 모순, 즉 딜레마,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만 하나 결코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가 이것이 아닐까, 양비 혹은 양시는 그 과정이자 방법론일 터. 선택의 결과가 언제나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선택, 어느 한 가지 극단이 옳은지 그른지는 미리 다 알 수 없고 다만 우리가 택한 어느 한 가지의 올바름을 믿고 있었을 뿐이로되, 그것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그러므로 양비 혹은 양시의 무력한 마땅함, 어느 한 가지 결정에 머무르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마땅한 무력함을. 내려온 선택의 결과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고뇌하는 두 눈에 걸려드는 것. 나는 이렇게 쌓여가는 이해, 맹신이라는 믿음의 실패로부터 강제로 확장되는 이해의 범주, 그 너비를 지혜라고 말한다.

 

 영영 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의문과 갈증, 고뇌. 나는 그것을 지혜의 여로라 말하려들며 퍽 긍정한다마는, 한편 이러한 고뇌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쿤데라가 영원회귀에 대해 그러했듯, 고뇌를 완전히 뒤집어서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완전히 뒤집어서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 고뇌란 인간 조건의 필수불가결한 것이어서, 고뇌하지 않는 것은 부정되어 마땅한 것인가? 그렇게 선언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거움이 그러하였듯이, 오히려 모든 고뇌란 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 내지는 집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불필요한 정신적 방해 요소라고 일컬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 의문과 갈증,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면 비로소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 수 없기에, 모든 것은 믿음의 문제로 화한다. 올바름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삶이 내 결정의 소산이며, 그 결정이 나의 귀책이라면, 그것을 오롯이 나의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차피 그것이 끝내 알 수도 확증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러므로 끝없이 미지와 무의미의 감각으로부터 거대한 공허를 앓느니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편이 더욱 나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잊어버리는 편이 더욱 바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내 머릿속, 나와 대척점에 서서 마주 보고 있는 어느 존재는 이렇게 말한다. 고뇌로부터의 자유, 실은 실각. 더는 의심하지 않고 한 가지 관점과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태도. 나는 이러한 태도와 그에 말미암는 모든 관점을 “키치”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관점이자 삶의 방식.


 

키치 Kitsch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 - 키치, 고려대한국어대사전

 

본래는 '미적으로 품위가 없고 저속함'이라는 뜻. 그러나 현재는 익살스럽고 개성적인 패션 혹은 감성을 이르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 키치, 국어사전 신조어, 2024년 06월 12일

 


“키치”는 저급 문화이되, 그 스스로 고급 문화를 표방하는 것들을 가리킨다. 한편 작가의 용례가 그러하듯, 이는 비단 문화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것이 많은 논란과 반감을 일으킬 정의임을 알고 있다. 특정 키치를 받아들인 사람에게 그것을 키치라고 부르는 일은 위험하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진지한 것이고 분명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그렇게 틈 없이, 실은 거세된 채 인식되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엄정한 사실로부터 도출된, 차갑고 납작한 의미인가 묻노라면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사견에 따르면, 의미가 있어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랑, 내지 집착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미리 의미로서 다가와 믿음이 돼 있었노라고,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

  

오늘에야말로 키치에 대한 내용 전개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글의 마지막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려 했지만 어김없이 분량 조절에 실패하였다. 다음 편에는 키치에 대한 주요 파트를 톺아본 다음, 글의 핵심이자 정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논하며 이 지루한 글의 대미를 장식하도록 하자. 피로감이 몰려오니 이만, 오늘은 여기까지.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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