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좋은 공연을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것 [공연]

외국인부터 청각 장애인까지, 관객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자막
글 입력 2024.08.1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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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츠 오퍼 베를린 자막 화면.jpg

슈타츠 오퍼 베를린의 공연 시작 전 모습.

무대 상단의 좌측 화면에는 독일어 자막이, 우측 화면에는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최민서 에디터

 

 

‘자막 오퍼레이터’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 공연에서 대사나 설명을 위한 자막이 쓰이는 경우 타이밍에 맞게 자막을 넘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뮤지컬, 오페라, 연극 등의 장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자 중에는 공연의 자막이 자동으로 재생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연은 영상 제작물과 달리 현장에서 직접 실연되기에, 같은 작품이어도 회차마다 조금씩 대사의 시간이 달라지고 언제든 돌발 상황이 발생할 여지가 있으므로 반드시 사람이 수동으로 자막을 운영해야 한다.

 

혹자는 공연 제작진 중 이 자막 오퍼레이터의 중요도와 전문성이 가장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한 공연의 경우 원어로 진행되는 대사를 들으면서 번역된 자막을 넘겨야 하기에 외국어 실력이 필수적이고, 공연 전반에 대한 이해는 물론 임기응변 능력이 요구되는 중요한 일이다. 이들이 ‘무대 뒤의 또 다른 배우’ 내지는 ‘내한 공연의 질을 좌우하는 존재’라고 일컬어지는 데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자막 오퍼레이터.jpg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자막 오퍼레이터가 바라본 무대.

국내 작품들 중 일부도 외국인과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국영문 자막을 제공한다.

©최민서 에디터

 

 


사소해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필자가 자막 오퍼레이터의 경험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공연을 볼 때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막이다. 국내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 아닌 이상, 이것이 공연에 대한 관객의 이해도를 좌우할 정도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막 운영이 원활하지 못한 내한 공연은 공연 후 로비나 화장실에서 자막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관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막으로 인해 관객이 공연 관람에 불편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는 무엇이 있을까?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자막과 대사의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경우이다. 대사보다 자막이 빨리 나오면 관객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자막 화면으로 향하게 되어 집중을 흐리고, 반대로 너무 늦게 나오면 관객은 대사가 나오는 동시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한 동시에 해당 자막을 읽을 시간이 부족해진다. 그러므로 오퍼레이터는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또한 배우가 대사를 까먹거나 애드리브를 하는 경우에는 순발력 있게 빈 화면을 띄워 관객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

 

일례로 필자가 최근 해외에서 관람한 모 한국 뮤지컬의 경우 한국어로 공연되고 영어 자막을 사용하였는데, 자막 타이밍이 계속해서 심하게 틀리는 바람에 공연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자막이 필요 없는 모국어 관객임에도 이것이 관람에 지장을 준 것을 보면, 외국인 관객들은 극의 진행과 자막이 일치하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경우 무대 위 출연자들의 기량과 작품의 완성도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공연 전체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므로, 제작 측에서 자막 운영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두 번째로 자막의 글자 자체를 읽기 불편한 경우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극장에서는 자막에 대해 일정한 양식이 마련되어 있기에 이러한 일이 흔치는 않으나, 간혹 글꼴과 글자의 크기, 색상, 위치가 적절하지 않을 때가 있다. 자막의 글자는 반드시 가독성이 좋은 것이어야 하고, 한 페이지에 적절한 분량의 자막이 배정되어야 한다. 또 문장 중간에 줄이나 슬라이드가 바뀌는 경우 문맥에 맞게 적절히 나눠지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자막 오퍼레이터가 숙지하고 실제 자막 운영 시에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막 제작 단계에서 번역의 문제가 있다. 기본적으로 원어민들에게 어색하지 않은 수준의 번역은 물론, 공연용 자막의 특성상 의성어나 고유명사,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개념 등을 해당 언어권 관객의 이해 범위에 맞춰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번역해야 한다. 일전에 관람한 모 공연에서는 해당 언어권에서만 쓰이는 고유명사에 별 표시(*)를 붙인 후 하단에 그 단어의 뜻을 다시 풀이해놓았는데, 관객이 무대와 자막 화면을 모두 주시하면서 특정 단어에 대한 추가 정보까지 수용하기에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고유명사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자막을 전달하는 여러 방식: 관객의 편의를 위한 다양한 시도들


 

공연 자막이 송출되는 화면의 위치와 개수, 송출 방식 등은 극장에 따라 제각각이며, 이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우선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무대 상단이나 무대 좌우, 혹은 두 곳에 모두 화면을 두는 것이다. 무대 상단에만 화면이 있는 경우 1층의 무대 바로 앞이나 좌우 가장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자막을 읽기 어렵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대 좌우에 큰 화면을 설치하기도 하고, 화면이 없으면 일반 벽면에 자막 영상을 투사하기도 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내부.jpg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무대 좌우의 대형 화면으로 자막이 제공된다.

©국립극장

 


두 번째는 자막 화면의 위치에 따른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좌석의 뒤에 개별 화면을 설치한 경우다. 우리나라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1·2층과 독일의 코미쉐 오퍼 베를린(Komische Oper Berlin)이 이 방식을 택한 대표적 예다. 이 경우 관객이 자신의 언어를 택할 수 있으며 자막을 원치 않는다면 화면을 끌 수도 있다. 좌석의 위치에 따라 자막을 보는 시야가 방해받지 않아 비교적 수월하게 자막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역시나 화면과 무대 양쪽으로 시선이 분산되는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세종대극장 객석.jpg

세종대극장에서는 각 좌석 앞에 설치된 화면으로 자막을 볼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



다음은 자막용 개별 디바이스를 제공하거나 관객의 개인 스마트폰을 활용하게 하는 경우다. 이는 공연장의 여건 상 자막을 공통으로 송출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용될 수 있는 대책이다. 필자가 관람한 공연 중에는 베를린 샤우뷔네(Schaubühne) 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 The Silence > 에서 독일어권 이외 관객에게 스마트폰으로 자막용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한 기억이 있다. 두 번째 방법과 비슷하게 관객이 자신의 편의와 기호에 맞게 글자 크기와 언어를 택할 수 있다는 점이 이점이나, 마찬가지로 무릎 위에 둔 자막과 무대를 번갈아 보아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샤우뷔네 모바일 기기 자막 안내.jpg

 

샤부뷔네 모바일 기기 자막.jpg

연극 < The Silence >에서는 개별 모바일 기기로 자막을 볼 수 있게 했다.
©최민서 에디터



네 번째는 자막 전용 화면이 아니라 아예 무대 뒤쪽 배경에 자막을 띄우는 방법으로, 비교적 근래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이전 세 방법이 모두 지닌 공연 자막의 고질적 문제, 즉 관객이 시선 분산으로 인해 느끼는 피로를 덜고자 고안되었는데, 무대 위 출연자들을 보는 동시에 자막을 읽을 수 있다. 다만 무대 장치나 배경 그림, 영상 등의 활용도에 따라 배경에 자막이 투사되기 어려울 수 있어서 모든 작품에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국립오페라단 2023 라 트라비아타_축배의노래 캡처.jpg

국립오페라단 2023 < 라 트라비아타 >의 한 장면.

자막을 무대 뒤 영상에 포함시켜 관객들이 무대와 자막을 함께 볼 수 있게끔 했다.

©국립오페라단


 

마지막은 최신 기술이 적용된 자막 전용 안경을 착용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다. 2015년 프랑스 아비뇽 공연 축제에서 아토스(Atos) 사가 처음으로 증강현실(AR)을 이용해 여러 언어의 자막 서비스를 지원하는 안경을 선보였으며, 2018년에는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에서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자막 안경을 상용화시켰다. 기존에 청각 장애인들은 캡션 서비스(대사뿐 아니라 음향 효과를 비롯한 각종 정보를 모두 문자화해 화면에 제공하는 서비스)가 제공되는 일부 회차만 관람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안경만 착용하면 회차에 관계없이 편리하게 자막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이와 같은 자막 안경의 상용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자막 안경은 아직 기술적·재정적 이유로 모든 극장에서 상용화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술력의 발전과 장애인의 문화 접근권 보장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이뤄진다면, 미래에는 이것이 청각 장애인과 외국인 관객 모두에게 한 층 개선된 관람 경험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국 내셔널 시어터에서 청각 장애인을 위해 제공하는 자막 안경

©National Theatre




오퍼레이터 겸 공연 애호가의 자막에 대한 단상


 

자막 오퍼레이터로 일하기도 하지만 일주일에 두세 편 이상의 공연 관람을 즐기는 공연 애호가로서, 자막을 읽어야 하는 공연은 무대를 보는 시간이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것에 늘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특히 필자가 자주 보는 오페라의 경우 대부분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나 독일어, 프랑스어 등 다른 언어인 데다가 타 장르보다 내용 이해에 더 높은 집중력을 요하기에 그 아쉬움이 더욱 컸다.


자막은 겉보기에는 공연에서 가장 부차적인 것이지만, 또 그것 하나만으로도 관극 경험을 망칠 수 있는 요소이다. 어쩌면 자막은 그 자체로 공연 예술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국내 작품의 해외 진출과 국가 간 문화 교류가 활발한 글로벌 시대에, 자막이 지니는 중요성은 배가된다.

 

결국 공연 구성 요소에 있어서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합이 필요하며, 연출가의 감독 하에 자막까지 공연 전체와 어우러지도록 조율되어야 한다. 공연 제작자는 자막을 사용할 경우 관객 입장에서 최대한의 편의를 도모해야 하고, 관객은 공연 관람 전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막으로 인한 불편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 어렵지만, 모두가 언어나 장애의 장벽 없이 조금 더 편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자막의 형태에 대한 노력과 기술 개발이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32기_최민서.jpg

 

 

[최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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