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민화 그리는 것을 배우며 [문화 전반]

글 입력 2024.08.19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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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개성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나만의 패션, 헤어스타일, 분위기, 취미 등이 뚜렷하게 없었고, 색깔로 표현하자면 흰색 같은 무채색 인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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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색깔은 무엇일까


 

나의 개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었으나, 남들 눈에 튀는 게 싫어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을 성실히 찾지 않은 무채색 삶은 비극적이었다.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달 성한 뒤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찾지 못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학업에 대한 즐거움, 호기심 없이 교육 체계에 순응하며 기계적으로 학업을 수행했던 나는 대학 생활 내내 혼란스럽고 공허했다. 나는 누구인가, 대학에 왜 왔는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나의 20대는 방황하는 시간이었다.


회사에 입사했지만, 나는 사실 일이 즐겁지 않았다. 맡은 업무를 왜 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스스로 느끼는 보람과 희열이 없었다. 사람들이 알만한 유명한 기업에 다니지 않아서, 지방에 살아서 재미없는 일만 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지루해졌고, 회의감 속에서 살았다. 내 일기장에는 점점 퇴사하고 싶다는 말로 빼곡해졌다.


 


민화를 배우다 


 

그러던 어느 날 문화 프로그램 운영 업무를 맡게 되면서 민화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림이 너무 예쁘다는 나의 말에, ‘화실에 한번 놀러 오세요’라고 화답해 주셨다. 그 말이 계속 맴돌았던 나는 처음으로 화실이라는 곳에 방문했다. 넓은 화판, 그림, 붓 알록달록한 공간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 수강 등록을 했다. 나도 배우면 이렇게 멋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걸까 작은 기대감이 들었다. 민화를 그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먹으로 그림 선을 따고, 물감으로 덧칠을 여러 번 하는 것이었다. 마치 컬러링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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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없이 완벽하게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은 숨 쉴 구멍 하나 없는 삶을 만들었다. 그랬던 내 삶에 매주 1번, 3시간 그림 그리는 시간은 평온함을 선물해 주었다.

 

분노, 짜증, 긴장감, 다양한 감정이 요동치는 회사원의 삶을 마치고 화실에서 조용히 채색에 몰입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호흡이 점점 진정되고 평온해졌다. 그날 해야 하는 몫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내가 한 움큼 붙잡고 있던 스트레스가 풍선처럼 날아가버린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삶의 대부분을 평가받는 일에 써왔던 나는 무언가를 할 때 재밌다거나, 좋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라는 것은 ‘잘한다’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그림을 잘 그려야 하고, 학원에서 연습해서 선생님에게 잘 그린다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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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화를 그리며,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린 테두리 선은 삐뚤빼뚤하고 색칠도 얼룩덜룩했지만, 서툴러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그림 속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공식이 없었고, 정답을 찾지 않아도 되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해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제목을 붙이면 나의 작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의 색깔을 찾다


 

무채색 같았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통해 점점 다채로워졌다. 채색하는 방법을 배운 나는 단짝 친구의 생일날, 민화를 그려 선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그림은 여전히 서툴고 얼룩덜룩했지만, 스스로 완성했다는 뿌듯함과 설레는 마음으로 붓꽃 그림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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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받은 친구는 ‘이건 너만이 만들 수 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라 너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오랜 시간 가져왔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10년간의 내 일기장 속에는 내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고민들로 가득 차있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직업으로만 찾으려 했다. 어떤 직업이 나를 보여주고,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런 명제를 갖고 세상을 바라봤던 것 같다. 내 공허함은 직업이나 소속감의 취득을 통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긴 방황 속 나를 찾았다고 느꼈을 때, 나는 없었던 것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원래 내 삶에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방황을 끝내게 만든 것은 발견이 아니라, 인식이었다. 공허함을 없앤 것은 회사 이름이나 직함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몰입을 통해 내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창작 활동이었다.

 

 

 

취미가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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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창작활동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림을 업으로 그리는 작가는 완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긋고 세밀하게 표현하고, 한 치의 오차 없이 해내는 것에 고뇌할 것이다.

 

어쩌면 그림 그리는 즐거움은 취미로 배우는 사람만의 특권이  아닐까. 선생님의 작품과 똑같이 하지 않아도, 색이 조금 탁하거나 선이 튀어나와도 그래도 나를 책망하는 말 없이 괜찮다고 넘어갈 수 있는 취미 시간이 위로였다.

 

사회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에게 완벽의 정도를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고 냉혹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때론 생업에서 벗어나 완벽과 반대되는 온전한 불완전함 속 나를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 미숙하고 서툴러도 그래도 괜찮은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위로와 평온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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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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