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느 여름날, 시네마테크와의 인연

글 입력 2024.08.1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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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해도 푸르른 나무와 매미 울음소리는 그대로여서일까. 무더운 여름이면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요즘처럼 카페나 오락실이 있던 동네도, 그런 시대도 아니었던 터라 친구들과 만나면 알아서 놀 거리를 찾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을 나가면 시내가 나왔다. 사실 ‘시내’라는 표현은 행정구역 상 시 이상의 지역에서나 쓸 수 있는 표현이기에 ‘읍내’가 더 맞는 단어지만, 왜인지 친구들과 나는 그 누구도 읍내라고 말하지 않았다. 시내라고 불리던 그곳은 내가 살던 마을에 비하면 여건이 나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발전한 곳은 아니었다. 편의점조차 하나 없던 그곳은 오후 9시가 되면 가로등 외에 전부 불이 꺼질 정도였으니까.

 

그런 곳에서 자랐으니, 당연하게도 나는 영화를 잘 알지 못했다. 영화를 본 기억을 되짚어보면, 고작해야 지역 문화예술회관에서 가끔씩 상영하는 대중영화를 관람하거나, 가족과 함께 인근 도시로 나가 영화관에 갔던 것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다. 집에서 비디오테이프로 해리포터를 보거나 티비에 나오는 명절 특선 영화 등을 보기도 했지만, 이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놀이’였을 뿐,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흥미나 관심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시내에 ‘작은 영화관’이라는 단관 극장이 처음으로 생겼다. CGV처럼 멀티플렉스가 아니었기에 영화표는 절반 정도로 저렴했지만, 지역 특성상, 영화를 보러 갈 때면 아는 사람을 마주치기 일쑤였다. 성격상 그런 마주침을 정말 싫어해서 자주 가게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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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학한 이후로, 아직까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처음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꼭 봐야 한다고 일컬어지는 영화를 하나, 둘 보기 시작했고, 영화전공 수업을 듣고, 영화 글을 쓰며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향유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서울이나 부산처럼 집과 가까운 곳에 시네마테크가 있어 다양한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지역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즐겨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의 나는 더 넓은 사고를 할 수 있었을까? 과연 영화가 나의 세상을 지금보다 넓혀줬을까?

 

아마 꼭 그렇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머리가 크고 세상을 좀 더 알고 난 뒤에 보는 영화들이 더 깊이 와닿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더 많은 영화를 접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에 대한 아쉬움은 마음 한 켠에 여전히 자리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친구와의 약속도, 별 다르게 할 일도 없어, 두 편의 영화를 예매한 뒤, 서울아트시네마로 향했다. 한 편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그리고 다른 한 편은 ‘학이 난다(1957)’였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고전 영화였음에도 너무 재밌었다. “옛날 영화 치고 재밌네”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재밌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자마자 나는 안내 데스크로 가 충동적으로 '관객회원'을 신청했다. 6만 원이면 신청할 수 있는 관객회원은 일 년간 9천 원인 영화를 5천 원에 볼 수 있으니, 가격 때문에라도 오늘 같은 재미있는 고전 영화를 더욱 자주 보게 되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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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연한 계기와 충동적인 선택으로, 그동안 인연이 없었던 시네마테크에 첫 발을 내디뎠다. 다양한 영화를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첫 순간이었다. 이는 닐 암스트롱이 55년 전 달에 내디딘 첫 발자국에 비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소한 나아감이겠지만, 적어도 나의 세상에선 그와 맞먹는 위대한 발자국이 될 거란 터무니없는 망상을 한다.

 

아쉬웠던 지난 날들을 뒤로 한 채, 이제 새로운 인연으로 마주하는 시네마테크라는 공간에서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D열 4번쯤 되는 빨간 의자에 앉아 수많은 이야기와 사람들, 그리고 사랑들을 보게 될 시간들이 무척 기다려진다.

 

 

[박도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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