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방가르드 실험극으로 재구성된 청년 노동의 현실 - 알바의집, 배로나르다

글 입력 2024.08.23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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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새로운 연극이 올랐다. CJ문화재단이 선정한 '알바의 집, 베르나르다'가 8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CJ아지트 대학로에서 공연된다. 이 작품은 스페인 고전을 현대 한국의 모습으로 재해석해 청년들의 일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2005년부터 혁신적인 연극을 선보여 왔다. 그들은 주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현대 기술을 연극에 접목하는 등의 실험을 해왔다. 연출가 김현탁은 여러 유명 연극상을 수상했으며, 새로운 연출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알바의 집, 베르나르다'는 스페인 작가의 고전 희곡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이 스페인의 한 마을에서 일어나는 가족 이야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한국의 다양한 아르바이트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 연극은 편의점, 식당, 배달 일, 창고 일, 어린이 카페 등 여러 아르바이트 현장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 연극은 단순히 청년 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의 일자리 문제와 세대 간 갈등 같은 다양한 이슈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04-알바의집, 배로나르다 공연 티저 이미지_7.jpg

 

 

 

# 현대극으로 다시 피어난 고전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주로 고전을 해체하는 작업을 해왔다. 〈알바의 집, 베르나르다〉 역시 스페인의 고전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중세적 여성관과 왜곡된 모성을 주제로 하는 스페인의 고전 희곡이다. 주인공인 과부 '베르나르다 알바'는 두 번의 결혼 실패 후, 두 번째 남편의 장례식에서 결혼 적령기의 다섯 딸들에게 "8년 동안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딸들의 반발로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문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이 간단한 줄거리만으로도 베르나르다 알바가 남성에게는 '죽음'을, 여성에게는 '권위와 억압'을 상징하는 팜므파탈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여성을 '창녀'와 '성녀'로 이분화하는 중세적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이 희곡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많았으며, 지난해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도 그 일환이다.

 

반면, 성북동비둘기는 이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알바(아르바이트)'라는 키워드에 주목하여 청년들의 노동 문제와 연결 짓는 것이다. 극 중에는 원작의 일부가 모티프로 삽입되지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름만 차용한 완전히 새로운 작품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와 청년 소외 현상


 

연극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단군신화를 비틀며 시작한다. 성공을 꿈꾸며 상경한 두 친구는 각각 '곰'과 '호랑이' 인형탈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반지하 방에서 지낸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집안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들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여력이 없어 매 끼니를 배달음식으로 해결한다.

 

이어서 극은 이 두 친구가 주문한 음식을 만드는 음식점으로 시선을 옮긴다. 주방은 배달 앱의 알림 소리로 소란스럽다. 가게 주인이 배를 두드리며 누워있는 동안, 주방 보조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두 명이 정신없이 일한다. 조리가 완료되면 다음은 플랫폼 노동자들의 차례다. 이들은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식사와 택배를 배달한다.

 

연극은 이 외에도 청년들이 겪을 수 있는 여러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며 청년 소외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미끼로 피해자를 유인하는 그루밍 성폭행, 결혼을 원하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포기하는 커플, 진상 손님 때문에 아르바이트생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야 하는 상황 등이 그려진다.

 

극은 인터넷 강의 촬영을 보조하던 아르바이트생이 쓰러져 목숨을 잃는 장면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청년들은 알바 신세를 벗어나고자 토익 인강을 등록하지만, 토익 학원에서도 알바들의 노동은 계속된다. 한 알바생은 "노동이 계속되어 너무 피곤하다"라는 말을 여러 시제로 표현하는 강사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러나 결국 과로로 쓰러지고 만다. 강사는 이 죽음을 목격하지만, 수강생들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무시하고 수업을 강행한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철저히 카메라 밖에서 일어난다.

 

이후 극에 등장했던 모든 아르바이트생들이 모여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다. 음식점 알바들은 목숨을 잃은 이에게 수의 대신 작업용 조끼와 노란 헬멧을 입힌다. 택배를 나르던 플랫폼 노동자들은 관을 소중히 옮기고, 스튜디오의 방청객 아르바이트생들은 아름다운 찬송가를 부른다.

 

 


#‘쉬는’ 청년들에게도 따뜻한 위로를


 

구직단념청년이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7월 청년층 가운데 아무런 일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고 '쉬었다'라고 대답한 청년들이 75%를 기록했다. 이는 사회 활동을 강제로 금지시켰던 코로나 팬데믹 시기보다 높은 수치이며, 통계 작성 이래 최대 수준이다.

 

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않은 이유는 다양했다.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것은 '원하는 임금 수준이나 근로조건이 맞는 일거리가 없을 것 같아서(42%)'였다. 그 뒤로는 '이전에 찾아보았지만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에(18.7%)', '교육, 기술, 경험이 부족해서(13.4%)', '근처에 일거리가 없을 것 같아서(11.1%)'가 뒤를 이었다.

 

'요즘 애들은 쉬운 일만 찾아서 그래'라고 청년들을 탓하기보다는 청년들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한다. 어쩌면 새로운 일자리 찾기를 쉬고 있는 청년들은 생존을 위해 좋은 방향으로 진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입장에서 좋지 못한 직장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험들은 주거 문제처럼 대체로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타파할 마땅한 대책도 없는 실정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와 투표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저출산 추세상 청년들은 기성세대와의 수적 열세로 인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마치 '냉동 인간'이 되길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해답이 없는 문제라면, 그것을 마주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의 에필로그는 인상적이었다.

 

연극의 에필로그에는 극을 시작했던 '호랑이'와 '곰'이 다시 등장한다. 40일째 되던 날 '호랑이'는 더 이상 알바-집을 반복하는 삶을 살 수 없다며, 인형탈을 벗고 알바가 아닌 '인간'으로 돌아감에 기뻐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곰은 꾸역꾸역 100일을 넘기고, 역시 인형탈을 벗고 '인간'으로 돌아가며 마무리된다.

 

이는 노동을 잠시 멈추고 쉬는 청년들도, 노동을 이어나가는 청년들도 모두 한 명의 소중한 인간임을 시사하는 성북동비둘기의 위로가 아닐까.


 

[신동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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