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도래

곁에 있을 때는 모르는 것들.
글 입력 2024.08.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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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아파트에 정전이 났다.

 

나는 그때 선풍기를 틀어놓고 얇은 이불을 대충 덮은 채로 거실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살랑이던 이불이 슬로-모션으로 잦아드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졌는데도 열기는 왜 해를 따라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가지 않는가. 빛도 없는 곳에서 무엇하러 밤을 뜸 들이는가.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논쟁을 무시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꺼진 TV와 전등, 작동을 멈춘 에어컨과 선풍기, 휴대폰 배터리를 10%만 남겨놓고 잠들어 버린 충전기 등등…

 

나는 전자파와 카페인에 중독되어, 밤이 되면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는 동안 한시조차도 빛나는 화면을 멀리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인간인지라, 휴대폰이 “나를 제발 내버려 두라”며 열을 냄에도 꿋꿋하게 붙잡고 화면 밝기만 점점 낮춰갔다. 우리 집 식구들은 다 잠들어서 나는 그 넓고 공허한 거실에서 혼자였다.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 친구가 되어 줄 책이나 미디어 세상도 사라졌다. 하다못해 공백을 채워주던 소리들도 기절해버렸다.

 

늘상 편안하고 활기차던 본가의 거실이 잠들고 나니, 겨우 연명하던 휴대폰조차도 방전되고나니, 정말로,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동시에 서울에서의 지난 봄과,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어느 때의 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 당시의 공허함과 시림, 막막함이 날 괴롭히던 감각을 되새기게 된 것이다. 그때도 그랬다. 날 지켜주던 든든함과, 날 아껴주던 시원함이 끊어졌었다. 아주 불시에, 나도 모르게.

 

“곁에 있을 땐 모르는 것들이 있다.”

 

이 말에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한다. 매순간 감사함을 잊지 않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안위와 감정이 중요해질 때가 있다. 그때만은 나 말고 다른 것들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는, 잃어버린 것들의 빈 자리만이 남아있다. 그때도 날씨는 참 더웠는데, 이상하게도, 길잃은 듯 몸서리치게 추웠더랬다. 나를 어떻게 되찾았더라, 고민해보니 답이 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되찾은 적이 없었다.

 

***

 

전기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더움을 견뎌야 했다. 괜찮았다. 나는 버티는 것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다. 조금 무섭기는 했다만. 우리 집은 커다란 아파트 단지인데, 우리 동만 정전된 것이 아니라 단지가 거의 다 정전된 것이라,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어두웠다. 특히나 이 동네는 재개발 중이라 온통 불 꺼진 공사장 뷰다. 거실의 큰 창문이랑 부엌 뒤 베란다에 난 작은 창문을 열면 집 구조상 맞바람이 쳐서 시원한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기로 했다. 귀찮기도 하고, 열어봤자 을씨년스럽기만 하기도 하니.

 

있다 보니 그대로도 괜찮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보며, 아무것도 만지지 않는. 진, 짜, 태초의 상태. 막막한 어두움이 무섭지도 않아졌다. 얇은 이불을 벗어 놓고 창문 앞에 앉아 잠시간 밖을 보았는데, 불이 다 꺼진,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조용한 바깥은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년 말인가, 올해 초인가. 집을 떠나 자취방으로 가기 전에 보았을 때 우리 거실 창문의 뷰를 책임졌던 아름드리 높은 나무 몇 그루의 윗동이 덜렁 잘렸었는데, 퍽 흉물스러웠었다. 근데 이제와서 보니 아기자기한 이파리들, 어린 가지들이 조금씩, 소담스레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창 전체를 덮을 만큼 높이 솟았던 나무들이 덜렁 잘려 창 절반 정도의 아래를 차지하고, 그 건너의 들판-공사장.-과 하늘이 창 절반 정도의 위를 차지하는, 이색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풍경이 생겨버린 것이다. 나무가 잘린 직후에는, 머리카락을 잃어버린 중년 같기도, 발톱을 잃어버린 닭발 같기도 했는데, 좀 지나고 나니 이제 막 자라 오르는 어림과 여림이 마치 막 일어난 소년 같았다. 오히려 하늘을 모르고 치솟던 이전의 당당함보다도 주변과 어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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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활자로부터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기껍기만 했던 키보드가 부담이 된 이래로, 그것이 다시 기꺼워질 때까지. 즐겁기만 했던 글자들이 난제(難題)가 된 이래로, 그것이 다시 즐거워질 때까지. 사람으로부터도 잠시 멀어지고 싶었다. 대화가 스무고개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이해되지 않는 이를 이해하려는 오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까지.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의 당당하고 충만했던 그때로.

 

“잃어보니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통용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잃고 한참 지나서야 잃었음을 아는 이도, 무엇을 잃은 건지조차 모르는 이도, 잃고도 덤덤한 이도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언제 잃은 건지도, 무엇을 잃은 건지도 오랫동안 몰랐다. 한참 지나서 빈자리를 목격했을 뿐이다. 그때서야 인지한 공허함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이번에 적막 속에서 생각한 것은 감각의 상실이 도와주는 또 다른 감각에 대한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 또, 맡고, 느끼고, 끌어안는 감각. 그것들을 모두 상실했을 때, 떠오르는, 돌아감을 통해 만들어지는 무언가들 말이다.

 

되감게 만드는 것, 또는, 다가오는 어떤 상태. 그 감각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정의할 수는 없지만, 감히 그것을 “도래”라 부르고 싶다. 살면서 몇 번의 도래를 맞이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 감각을 인지하는 것만으로 알던 것과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지라.

 

 

[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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