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아있는 클래식과 다시 만나다 - 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아있다

글 입력 2024.08.2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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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은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낭만주의 음악과 구분되는 이전의 고전파 음악(모차르트부터 베토벤)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다.

 

현대에 와서는 다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사용되는데, '앙상블 블랭크 - 작곡가는 살아있다' 보도자료에 나와있는 '현재에도 클래식 음악은 많은 현존 작곡가들에 의해, 시대적 흐름과 새로운 음악사조를 반영한 다수의 창작품으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라는 말도 그러한 맥락이다. 다시 말해 작곡가가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오늘날에도 클래식 음악이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다.

 

공연 중 최재혁 음악감독이 관객들에게 언급했듯이 앙상블블랭크는 새로운 아름다움과 색다른 재해석을 추구하는 예술 단체이다. 사실 클래식의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을 고려했을 때 그로부터 새롭고 색다른 느낌을 얻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특정 부분의 편곡과 재해석이 본래 의도했던 바는 관객이 얼마나 그것을 민감하게 잡아내고 짧은 시간 내에 소화할 수 있는지에 따라 그 전달 효과가 좌우된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곡부터 상당히 난해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곡이 진행될수록 곡이 감상자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조금씩 멀어져 가는 연주자들의 몸짓과 눈빛, 곡의 진행 등이 한층 선명해지기도 했다.

 

이것이 어떠한 음악일까, 어떠한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를 고민하다가도 그들이 서로 등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 마치 악기를 통해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해지기도 하고, 야누스적인 모습보다는 되려 서로의 소리가 특정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얽히며 동질화되고 있음이 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0817_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이있다 III_포스터.jpg

 

 

순서대로 곡이 진행될수록 대단히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부분도 기실은 내가 그러한 방향성으로만 곡을 수용하고자 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면 생각보다 심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

 

워크맨은 귓속에 몇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 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 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부분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수록된 <내 워크맨 속 갠지스>라는 시는 이처럼 음악의 편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광고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다양한 클래식에 친숙해져 있음에도 언제나 클래식이라는 용어만 들으면 막연하게 낯설게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순간에, 그 어느 날엔가 이와 같은 공연을 통해 클래식을 접한다는 것은 참 기묘하면서도 더없이 분명한 경험을 제공한다.

 

바흐가 작곡한 공연의 마지막 곡을 들으며, 그가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이라는 형식은 비록 모호하고 난해할 수 있으나 그 냄새는 경쾌하고 웅장한 곡의 진행만큼이나 선명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찍이 음악으로 스며든 바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음악은 유적지를 남기지 않지만 어느 먼 나라에서는 음악이 방금 다녀간 나라들을 허공이라 부른다 (...)

 

생의 마지막 리듬인 자신의 맥박을 들으며 천천히 저격수의 음악을 받아들이며 상대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물어진다 음악이 방금 다녀간 텅 빈 공연장처럼 현장은 늘 결연하며 단순하다 연주를 막 끝낸 지휘자의 침묵이 거대한 울음을 상기하듯.

 

-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음악이 방금 다녀간 곳, 클래식이 잠시 머물렀던 곳의 허공과 바로 그 텅 빈 공연장을 상상한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다시 마주치게 될 클래식이 내게 무엇을 상기시킬 것인가를 상상한다.

 

나도 모르게 내 몸 어딘가에 기록된 선율이 거대한 울음과도 같은 지휘자의 침묵 뒤편에서 여전히 살아있음을 떠올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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