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리학은 조선시대 여성에게 삶의 답이 되었는가① [도서/문학]

임윤지당의 글을 통해 보는 조선시대 여성과 성리학
글 입력 2024.08.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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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리학을 기초로 건설된 유교 국가였으며, 국가의 주도 하에 성리학적 이념을 사회에 정착시키려 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시도가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17세기에 이르면 조선에 전반적인 유교 기반의 의례들이 정착하게 된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는 기본적으로는 유교의 핵심 가치인 예를 중시하며 삼강오륜과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한 가족질서와 사회질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생겨났을까? 성리학은 종법적인 질서를 기반으로 국가 질서를 형성하려 했다. 따라서 조상숭배를 매개로 하여 가족 내부의 관계를 조정하고, 가장의 권위와 세습적인 특권을 유지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가족제도와 혼인방식이 크게 변화하면서 여성은 가정적, 사회적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내외법에 의거해 여성들의 활동 영역과 공간은 안으로 규정되고 외출의 규제가 이루어졌으며 친영례와 적장자 중심의 제사 상속으로 인해 재산 상속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성리학은 가부장권 강화를 위해 여성에게 명백한 억압과 규제를 가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성들은 살아가고 있었고, 임윤지당의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은 당시 조선시대 여성은 성리학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체화하고 있었고, 해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먼저 조선시대 여성들의 저술 활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시대적 배경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한글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어 여성들은 읽기와 쓰기가 가능해진다. 조선 초기부터 정책적으로 보급한 여성 수신서의 결과로 한글을 해독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친영례와 같이 변화한 성리학적 혼인의례가 확산되며 다른 집으로 시집 보내야 하는 딸에 대한 교육이 곧 자기 가문의 교양과 지적 수준을 나타낸다는 생각에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결혼 이후 시댁에서는 며느리에게 가풍을 이어 나가기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물론 이때 교육 수준이나 내용은 남성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었으나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며 여성들의 독서활동은 활발해진다. 이때 <소학>, <열녀전>과 같은 유교 서적 뿐만 아니라 여행기, 소설 등 다양한 종류의 읽기 활동이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 여성은 진일보하며 독서를 통해 얻은 내용을 적극적으로 의미화하고 자신들의 생산물로 재구성하는 원천으로 삼는다. 글쓰기란 행위는 독서 이상의 작업으로 자신의 창작 욕망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며,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경험이 남겨질 만하다는 자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다. 따라서 글쓰기를 통해 여성이 무엇을 남겼는가 보는 것은 당대 여성이 어떤 사상과 의지로 삶을 살아갔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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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지당은 조선 후기의 여류 성리학자로 대성리학자 임성주의 여동생이다. 홀어머니 곁에서 경전과 역사서를 읽고 그 뜻을 논하기도 하는 등 학문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형제들끼리 경전 해석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혼인하기 이전부터 둘째 오라버니인 임성주가 준 <효경>, <열녀전> 등을 즐겨 읽었고 <춘추>, <자치통감>과 같은 중국의 다양한 역사서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은 여성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탐구한 글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성리학에 대해 저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놀랄만하다. 그는 남성 전유물이던 성리학을 평생 탐구하고 성리학의 쟁점이 되었던 ‘이기심성’과 ‘사단칠정’을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진 마음을 지키지 않고 자포자기 하는 사람을 향해 본연의 어짊을 수행하며 지키지 않는다며 비판하는 모습을 통해 그가 성리학적 이상을 내재화 하였음을 보여준다.

 

또 흥미로운 지점은 "비록 여자이지만 부여 받은 본성은 남녀 간에 다름이 없다"고 주장하며 남녀의 차별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모습이다. 임윤지당은 신체적인 차이로 인한 남녀의 구별이 있을 뿐이고 그에 따라 맡은 역할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남녀는 음양의 우주질서와 같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파악했다. 남녀 모두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고 수양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는 일은 똑같은 것이므로 남녀의 차이는 성인에 이르는 데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처럼 임윤지당은 남녀 구분없이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보편적 인간의 고귀성에 가치를 둔 임윤지당의 글은 여성이 직접 성리학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주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여성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다.

 

하지만 임윤지당의 글은 남성 중심의 지식체계를 비판하기 보다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습득하여 그 지식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한 점에서 여성주의 지식과는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조선시대 여성의 학문은 매우 예외적인 현상으로 취급되고, 아무리 훌륭해도 사회나 국가 차원으로 확장 시킬 수 없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임윤지당 자신도 학문을 하는 사실을 숨기고 집안 살림을 다 끝낸 후에야 밤에 학문에 몰두한 점은 여성에게 학문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하지만 기존 체제에 대한 해체와 해방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당대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네트워크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상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해방적인 여성주의 학문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여성의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학문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성리학을 여성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은 유의미하다.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기회를 잡은 여성들은 채워지지 않았던 자아실현의 욕구를 기록이란 창조적 행위를 통해 조금이나마 해소해고자 했다. 임윤지당은 성리학의 탐구를 통해 자신의 창작 욕구를 드러냈지만 성리학은 이러한 창조적 행위를 여성에게 허락한 적이 없었다. 여성은 그저 여공에 힘쓰고 삼종지도에 따라 남성이 이상을 추구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만을 요구 받았다. 인간으로서의 끊임없는 창작욕,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에 대해서는 어느 답도 주지 않았지만 임윤지당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어느 질문에도 성리학은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리학만이 당대 여성들의 삶을 설명하는 유일한 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적인 정책 실행의 측면에서 보면 여성에게는 그저 음양의 질서에 따라 안에서 여공의 일에만 몰두하라는 규제만이 줄곧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성들은 어떤 점에서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내면화 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국가적 지향점과는 다른 면모들을 보이기도 하며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갔다. 그 증거가 바로 성리학적 질서를 내재화한 문장들이 적힌 ‘기록물’일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기록 자료를 통해 단지 국가적 정책과 정치적 자료로는 알 수 없는 조선시대 여성의 가치관과 삶을 복합적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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