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새로 피어나는 소리, 잡음에 관하여 – 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아있다 III

글 입력 2024.08.28 00:16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퇴사


 

이직한 지 4개월 만에 퇴사를 말했다. 다른 회사로 취업 준비를 할 생각은 아직까진 없다. 다만, 원하는 일로 돈을 벌어보는 실험을 할 계획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매일 3건의 기획 기사 발행을 요구했다. 나는 기사를 쓰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기사 소재 체험이나 인터뷰 질문지 작성 및 가이드라인 전달 등 회사 관련 업무에 개인 시간의 일부를 할애해야 했다.

 

정직원이면 당연히 회사에 시간을 내주어야 하는 법이거늘, 난 맡은 일에 개인 시간까지 빼앗기는 게 아까웠다. 2년 남짓한 변변찮은 경력으로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다소 쉬운 난도의 업무를 맡았음에도, 별로 잘하고 싶은 분야가 아니었던 탓이다.

 

사실 입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회사에서 맡은 포지션'의 괴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평범한 직장인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싫어 버텼다. 직장인이 얻을 수 있는 이점-일정한 월급, 경력 한 줄, 사회적으로 잘 기능하는 사람이라는 은유적인 의미 같은 것-을 포기하기 싫었다. 퇴사 후 홀로 섰을 때 내 한계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좌절할 것이 두려웠던 것도 퇴사를 미뤘던 큰 이유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내 일을 하는 건 지금 구조에서 불가능했기에, 퇴사를 하고 내 일에 집중하거나 회사에 속하고 내 일은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홀로 무언가를 할 자신이 없어 최대한 회사에 다니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회유해 보기로 했다.

 

먼저 이미 5, 6년 차인 친구들과 씀씀이가 달라져 약속을 피하는 궁상맞은 30대 여자의 초라한 하루를 구체적으로 그려봤다. 그리고 재취업을 하고 싶어도 나이가 많아 중고 신입으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좌절감을 떠올려 보았고, 결국엔 사회인으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를 한심하게 여긴 남자 친구가 결국 떠날 수도 있다며 스스로 겁도 줬다. 10대 때부터 단련해 온 망상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퇴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자 타인의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친구 하나는 자고로 회사는 뇌를 빼고 다녀야 하는 거라며, 일로 자아를 찾을 생각 말랬다. 엄마는 어딜가나, 무얼 하나, 어차피 힘든 것 마찬가지라며 지금 직장에 붙어있으라고 말했다. 요즘 취업이 워낙 어렵다며 말이다.

 

그래, 갈망이 대수더냐, 누군들 갈망하는 바를 모두 이루며 살 수 있던가.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 찾은 게 어디야. 닥치고 다니자. 제발 좀.

 

갈망하는 삶을 잠시 유예해도 큰일 나지 않는다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따박따박 안정적으로 월급 받고 경력 쌓는 게 낫다고, 그 누구보다 날 설득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안정적인 삶을 깨뜨리는, 잡음 같은 내 갈망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웬걸. 승질머리도 참 더럽지… 잘 설득시킨 줄 알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일을 할 때마다 몸이 아파오는 게 아닌가. 초반에는 심장이 빨리 뛰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 출근하는 시간만 되면 심장이 조였다. 영혼 없이 몽롱하게 일하던 중 속이 너무 갑갑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천천히 심호흡을 내쉬는 날도 잦아졌다.

 

당연히 회사나 일은 아무 잘못이 없다. 이 모든 증상이 일 때문도 아니다. 단지 마음이 없는 곳에 몸이 머무르다 보니 생긴 문제. 한번 결국 5개월만 일을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0817_앙상블블랭크 작곡가는 살이있다 III_포스터.jpg

 

 

 

현대 클래식과 앙상블블랭크 공연


 

어렵게 환승 이직해 들어간 회사의 퇴사를 앞둔 내게 클래식 문화 초대는 반가운 해우소. 클래식은 ‘잘은 몰라도 아무튼 좋은 것’들 중 하나다. 여러 악기가 어우러져 조화를 만들어낼 때의 아름다움은 물론, 가사가 없다는 특성으로 전적으로 내 상황, 생각, 감정만을 짚어보는 시간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추적추적 얄밉게 비가 내려 축 졌던 토요일 저녁, 클래식 공연 ‘작곡가는 살아있다’ 공연을 보기 위해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어두운 네이비 새틴 맥시 원피스에 채도 높은 레드 컬러 에코백을 들고 예술의전당으로 향했다.

 

단정하고 고요한 공연 전의 텅 빈 오렌지빛 무대는 조명이 어두워지며 금세 근엄해졌다.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올랐다. 첫 곡은 마티아스 핀처의 <야누스의 두얼굴>이라는 곡이었다.

 

 

마티아스 핀처 <야누스의 두얼굴>

 

 

지금까지 감상했던 클래식 공연과는 다소 다른 단출한 두 명의 연주자. 그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각자의 악기, 바이올린과 첼로 연주를 시작했다. 엷은 선율로 시작해 긴장감을 조성하더니 이내 나는 불편한 소리. 예상과 다른 공연 속 조화가 깨진 음악은 계속됐다.

 

보기도, 듣기도 좋은 문화예술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그다음부터는 해석의 몫. 좀처럼 읽지 않는 팜플렛을 펼치니 책자는 이 곡에 대해 ‘하나의 육체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는 형상을 한 신, 야누스’를 연주하는 것이라며,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석을 읽으니 그제서야 어떤 것을 말하려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첫 곡이 끝나고 나와 함께 공연을 감상하러 간 P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알던 클래식은 이런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거다. 당황을 나눌 틈 없이 다음 곡의 연주가 시작됐다.

 

이번 곡은 안톤 베베른의 <현악 3중주를 위한 악장>. 오선지를 뚫고 나오는 쨍한 높은음과 그 이후 매끄러운 연결음 없이 등장하는 묵직한 낮은음들의 불규칙함이 연주되었다.

 

 

안톤 베베른 <현악 3중주를 위한 악장>

 

 

이런 부조화된 소리로 이들이 말하고 싶은 건 뭘까.

 

공연장에 자리한 다른 관객들도 그랬을까? 그들은 저런 현대 클래식에 익숙할까? 나만 현대 클래식의 낯섦을 어려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 무대보다 관객석을 더 자주 둘러봤던 것 같다.

 

마지막 곡은 바흐의 음악이었다. 낯선 이들만 가득한 모임, 유일하게 아는 이를 찾은 사람처럼 반갑게 안도하는 마음으로, 익숙하고 조화로운 소리를 내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 사장조> 연주를 들었다.

 

P와 집으로 향하는 길, 인스타 스토리에 난 이런 메모를 남겼다. 현대 클래식은 난해하다.

 

다소 강렬했던 현대 클래식과의 첫 만남. 더 이상 글 작성을 미룰 수만 없던 평일 저녁, 클래식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생겼을 때마다 집어 드는 책 <아무튼, 클래식>을 펼쳐 ‘현대 클래식’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 읽었다.

 

["작곡을 전공하고 음악 기자로 일했던 저자는 개인적인 일화를 통해 현대 클래식의 탄생 배경과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기자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강혜선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초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로 파리 오케스트라 악장이 된 분이다. 그런데 늘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비슷비슷한 곡만 연주하는 조직 생활이 갑갑하다며 몇 달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오래된 음악만 연주하는 음악가들은 모두 게으름뱅이다!”라며 직언을 서슴지 않은 선생님에게 나는 “왜… 왜요?”라고 되물었다. 그런 덜떨어진 인터뷰어에게도 선생님은 나름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창밖을 내다봐요. 자동차들이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고 있잖아요. 파리에 있는 나와 서울에 있는 당신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기도 하고요. 이런 세상에 살면서 몇백 년 전에 쓰인 음악만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 아무튼, 클래식 中

 

새로운 모든 탄생, 이를테면 생각과 신념, 가치관 그리고 행동 양식들까지. 어쩌면 새로 피어나는 것들은 그 익숙하지 않은 속성으로 인해 잡음과 같이 들리는 게 아니었을까. 다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공연장에선 난해하다고만 생각했던 현대 클래식을 듣기 위해 얼떨떨하게 유튜브에 접속했다. 내가 정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속 불편한 잡음과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듯 보이는 현대 클래식의 불쾌한 소리를 받아들여 보기 위해.

 

물론 여전히 귀에 들려오는 잡음이 달가울 순 없다. 그렇지만 새로 피어나는 그 존재를 인지하기 위해, 오직 받아들여보기 위해 잠시간은 견뎌보기로 한다.

 

 

[권기선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9.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