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변화보다, 기본에 충실하기 [공연]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 - 군악제와 종합예술제의 경계에서
글 입력 2024.09.0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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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아마 한 번쯤은 노란색 옷을 입은 연주자들이 태평소와 북, 징 등 악기들을 연주하며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유튜브 상에서 한국 군악대(일명 ‘취타대’)가 해외에서 열린 국제 군악제에 참가해 폭발적인 박수갈채를 받은 영상들이 널리 퍼졌고, 사람들은 영상이 게시된 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위 ‘국뽕’을 자극하는 이러한 영상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13년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 한국팀 공연 영상.

취타대를 중심으로 북춤, 칼춤, 사자춤까지 우리나라의 다양한 전통 예술을 선보였다.

©Youtube 'TheGatorgal'

 

2008년 퀘벡 시티 밀리터리 타투의 대미를 장식한 "Amazing Grace" 영상.

세계 각국의 군악대가 모인 가운데 우리나라의 태평소가 음악을 이끌어 화제가 되었다.

©YouTube 'Winnie9212'

 

 

필자 역시 예전에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취타대 영상을 접한 것을 계기로 국제 군악제의 존재를 알게 된 듯하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여러 군악제가 개최되고 있는데, 영국 에든버러의 로열 밀리터리 타투, 스위스의 바젤 타투, 캐나다의 로열 노바 스코티아 인터내셔널 타투, 미국의 버지니아 인터내셔널 타투 등이 있다. 여기에서 ‘타투(Tattoo)’는 네덜란드어 ‘Taptoe’에서 유래한 단어로, 군악대의 연주나 퍼레이드, 그리고 군사적 전통을 기리는 행사 전체를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세계적 군악제들 중 단연 1950년에 시작된 에든버러의 밀리터리 타투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매년 약 22만 명에 이르는 관객이 모여들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지닌다.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png

매년 8월 에든버러 성 앞에서 펼쳐지는 밀리터리 타투

©The 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 


 

 

800여 명이 펼치는 각양각색의 퍼레이드


  

이번 여름, ‘축제의 도시’ 에든버러에 프린지 페스티벌과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을 위해 방문한 필자는 뒤늦게 밀리터리 타투의 존재를 떠올렸다. 다행히 아직 티켓이 남아있었는데, 저렴한 좌석은 이미 매진되어서 최소 70파운드 정도를 지불해야 했다. 생각보다 비싼 금액이 부담되었지만, 그래도 이 머나먼 타국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티켓을 예매했다. 이 밀리터리 타투를 목적으로 에든버러를 방문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라고 들었던지라 더욱 기대되는 마음으로 공연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나라의 기록적인 폭염 소식이 들려오던 때에, 에든버러에서는 최저 기온 11도에 거센 바람과 잦은 비까지 더해진 궂은 날씨가 이어졌다. 그러나 밀리터리 타투의 객석을 꽉 채운 관객 9천여 명의 열기는 추운 날씨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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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성 에스플라나데 9천여 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

©최민서 에디터


 

매일 밤 9시부터 에든버러 성 앞에서 펼쳐지는 밀리터리 타투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호주, 캐나다, 미국 등의 군악대 및 민간악대로 구성된 241명 규모의 파이프 및 드럼 악대(The Massed Pipes and Drums)가 등장하며 포문을 열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온 파란 제복의 ‘시타델 연대 군악대와 파이프 밴드(The Citadel Regimental Band and Pipes)’는 흥겨운 멜로디와 경쾌한 발동작으로 색다른 매력을 뽐냈고, 객석을 바라보며 유명 컨트리 음악 “Take me home, Country Roads”(1971)를 불러 관객의 호응을 유도했다. 이어서 여자 무용수들이 칼 같은 대형 군무를 선보였으며 보랏빛 의상이 순식간에 청록빛 의상으로 변신하는 마법 같은 광경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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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시타델 연대 군악대와 파이프 밴드

©The 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용 공연에 이어서 정반대로 엄숙한 분위기의 미 해군 의장대(US Navy Ceremonial Guard)가 등장했다. 이전 공연들과 달리 아무런 음악 없이 고요한 정적 가운데 소총을 자유자재로 공중에 던지고 돌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이자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진 관객들이 연신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서 등장한 팀워크 아츠 인디아(Teamwork Arts India)는 또 한 번 분위기에 반전을 주었다. 백파이프와 인도의 각 주를 상징하는 네 명의 무용수로 시작된 공연은 방그라(Bhangra, 인도의 펀자브 지역에서 유래한 민속 춤과 음악 스타일) 단체의 춤과 노래, 그리고 에든버러 성의 벽면과 무대 전체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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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워크 아츠 인디아의 무대는 화려한 조명과 음악, 춤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민서 에디터 

 

 

이번 타투를 위해 특별히 조직된 미 해양 군악대(United States Sea Service Band)는 금관악기들과 드럼으로 웅장하게 시작했으며 가수와 전자기타가 합세해 영화 <탑건(Top Gun)>의 OST “Danger Zone”, 영국의 대표적인 바다 노래 “Don’t forget your old shipmate”, 스윙 음악 “Sing, Sing, Sing” 등 관객에게 친숙한 노래들을 연달아 연주하여 분위기를 달구었다.

 

공연의 후반부에 이르러 “The Voyage” 무대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전해진 전통음악의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프 반주의 노래 “My mother told me”로 시작된 이번 무대는 피들(Fiddle), 파이프, 드럼, 반조(Banjo), 아코디언, 보드란(Bodhran), 하프 등의 반주에 무용수들이 한 팀씩 나오면서 점차 무대 전체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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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밀리터리 타투의 주제인 "Journeys"에 맞게 "The Voyage" 무대가 꾸며졌다.

©최민서 에디터

 

 

다음으로 스위스에서 온 매제스틱 드럼 군단(Majesticks Drum Corps)은 현란한 드럼 기술을 자랑하며 에든버러에서의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영국 전통의 울슬리(Wolseley) 패턴 피스 헬맷을 쓴 영국 해병대 연합 군악대(Massed Bands of the Royal Marines)의 연주에 이어서 앞서 등장했던 해군 밴드와 의장대들이 다시 합류해 행진 음악을 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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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슬피 패턴 피스 헬맷을 쓴 영국 해병대 군악대

©The 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 


 

곧이어 800명이 넘는 전체 출연진 모두 나와 “Take my hand”를 열창하고 춤추며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고, 밀리터리 타투만을 위해 작곡된 “Home is the sailor”에 이어 에든버러 성 위 등장한 ‘The Lone Piper’의 백파이프 독주로 타투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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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조명이 암전 된 가운데 에든버러 성 위에서 'The Lone Piper'가 등장해 백파이프 독주를 선보였다.

©The 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 


 

 

밀리터리 타투 – 군악제인가, 종합예술제인가?


  

공연의 시작부터 마지막 퇴장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다양했던 2024 밀리터리 타투는 2021년부터 타투의 전담 예술감독을 맡은 마이클 브레이스웨이트(Michael Braithwaite)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2022년의 “Voices”, 2023년의 “Stories”에 이어 “Journeys”를 올해의 주제로 삼은 그는 전통에 현대적인 연출과 기술, 의상 디자인, 음악적 영감을 결합해 타투를 보다 몰입감 있고 역동적인 공연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2024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의 현장 스케치 및 홍보 영상

©The Royal Edinburgh Military Tattoo

 

 

그러나 기대가 커서였을까, 공연이 끝난 후 아쉬운 점도 꽤나 많았다. 가장 큰 것은 예상보다 ‘밀리터리’의 비중이 작다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뒷자리에 앉은 한국인 한 명이 일행에게 “이거 그냥 공연이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필자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타투는 1950년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군사 퍼레이드와 전통적인 군악대를 중심으로 하는 행사였으나, 1995년부터 민간 공연 팀과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이 많이 추가되면서 군사적 성격이 약화되었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전투 재현이나 대포 경주와 같은 군사적 퍼포먼스가 현재는 거의 사라진 반면, 현대적인 춤, 대중 음악, 다양한 문화 공연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올해도 앞서 언급했듯 각종 팝송과 일반 무용, 인도와 스코틀랜드, 미국 등의 전통음악 등이 포함되어 군악 이외 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 이러한 변화는 타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지만, 오랜 시간 타투를 관람해온 마니아들 혹은 군사적 행사로서의 타투의 정체성을 기대했던 일부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과거의 밀리터리 타투는 군사적 전통과 유산을 기념하는 상징적 행사였으나, 오늘날에는 점점 더 상업적이고 엔터테인먼트 중심의 공연으로 변화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적 측면은 분명 관객의 흥미를 끌지만, 타투의 본래 목적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군사적 상징성과 프로그램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 군악대 행사의 성격을 유지하는 동시에 조명이나 영상 등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현대적인 감각을 더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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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의 시작을 알리는 파이프 및 드럼 악대

©최민서 에디터

 

 

두 번째로 기획 측면에서 공연의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될 만한 장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사실 국가별 군악대의 퍼레이드만 이어진다면 별다른 기승전결이나 전개에 대한 이해가 특별히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처럼 일반 공연예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계속해서 반전된다면 관객 입장에서 전체적인 공연 순서와 구성에 대한 기획 의도에 궁금증이 들기 마련이다.

 

BBC의 밀리터리 타투 중계 영상을 확인하니 진행자의 설명을 통해 기획 의도와 각 작품의 배경을 알 수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사회자나 중간 영상과 같이 관객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었고, 각 팀의 이름만 무대 뒷편의 성벽에 비춰질 뿐이었다. 때문에 공연 중 군악대가 아닌 일반 공연예술 팀이 등장했을 때는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관객은 ‘밀리터리 타투’에서 당연하게도 기본적으로 ‘밀리터리’를 볼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자나 영상을 통해 공연의 기획 의도와 전체 흐름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졌다면 관객의 이해도와 만족도를 더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국가적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도 아쉬웠다. 미국은 시타델 연대 군악대와 파이프 밴드, 해군 의장대, 해양 군악대 등 여러 단체가 참가했지만 비서양권에서는 인도만 참가했으며 그마저도 군악대가 아닌 일반 공연이었다. 기획보다는 섭외의 문제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최대한 다양한 문화권의 군악대를 초청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국제 군악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관건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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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명이 넘는 전체 출연진이 2024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의 피날레를 장식하고 있다.

©최민서 에디터

 

 

 

최고의 차별화 전략은 기본에 집중하는 것


 

결국 무엇이든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더 열광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전통적인 것, 원형을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혁신적 시도는 응당 필요하지만, 본질을 잃은 새로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다.

 

8월의 에든버러는 십여 개의 축제가 동시에 진행돼, 전 세계 어느 곳보다도 다채로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과 프린지 페스티벌이 있어 제각기 개성 넘치는 수천 개의 공연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진다. 때문에 밀리터리 타투에서 공연예술의 요소를 강화시키는 것은 여타 축제들과의 차별점을 약화시키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 시기에 오로지 밀리터리 타투만 관람하는 사람들도 있어 소비자층이 어느 정도 나뉘지만, 필자처럼 인터내셔널과 프린지 페스티벌까지 즐기는 관객이라면 밀리터리 타투에서는 ‘밀리터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화와 젊은 관객층의 공략, 이전과는 다른 기획 등을 이유로 밀리터리 타투의 강점인 ‘밀리터리’의 요소가 줄어든다면 타투는 이전의 명성을 오래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2년간 중단되었던 밀리터리 타투가 2022년 재개되어 올해까지 3년에 걸친 마이클 브레이스웨이트 감독의 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내년에는 대규모 야외 공연 전문가이자 2015년부터 영국 육군 예비군으로 복무 중인 이력을 가진 앨런 레인(Alan Lane)이 예술감독으로 부임하여 타투를 진두지휘할 예정이다.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가 75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 타투 본연의 매력을 되살리는 동시에 또 다른 혁신적 아이디어로 전세계의 팬들을 매료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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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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