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죽도록 노력하지 않는 내가 밉다

글 입력 2024.08.2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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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적당히 노력하는 것에 도가 트이고 인이 박힌 사람이 있다. 잘못된 자세로 스쿼트를 100개, 200개 하고 있다고나 할까. 힘이 안드는 것은 아니나 운동효과는 그닥인.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지레 그렇듯 수험 생활이 적당한 노력의 딜레마가 극으로 치달을 때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나의 노력 달란트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었다. 기숙사에서 잠들기 전 미리 다음 날 입을 옷을 꺼내두고 새벽 기상송이 울리면 가장 먼저 튀어나갔고, 부득불 토요일에 집에 돌아가 일요일에 등교하며 쉴틈을 전소시켰다. 남들은 심심풀이 사과 게임 하나 쯤은 깔려있는 아이패드에는 유튜브도 뭣도 지워져 있었다. 주변환경을 통제하는데는 일가견이 있었고 팍팍하게 살 줄 알았다.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만치 스스로를 통제하는 노력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항상 마지막 한 발, 몰입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카레에 밥을 비벼 먹으려고 애써 밥그릇 한쪽으로 밥을 꾹꾹 눌러담고 새어나가는 일분일초의 쌀알도 용납하지 않고서 카레를 붓기를 망설이는...나란 놈....

 

이런 스스로를 다잡으려 계획세우기에 집착했다. 무질서한 생각들을 솎아내기 위해서, 당장 무엇에 집중해야할지 되새기면서 최상의 계획을 세웠지만, 실상은 매일매일 한 칸 씩 뒤로 써야 하는 무의미한 취미생활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이루지 못한 과업들의 잔재는 새카맣게 일기장 속에 '제발' 이라는 글자로 쌓여갔다. 감히 '제발 대학을 붙여달라'는 기도는 아니었고, '제발 좀' 어떻게 해보라는 의미의 다그침이었다.

 

아무튼 티끌모아 태산으로 나름 명망있는 산 등반에 성공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서 한동안은 앞서간 목표와 채찍질하는 자아간의 화합이 그런대로 이루어졌다. 1학년의 학업 부담은 해방감을 맘껏 누리기에 적절했고 팀플이나 동아리 기획 활동은 적성을 저격했기에 역시 사람은 잘하는 것을 하고 살아야하니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대학교의 시험은 현대판 과거시험 같아서 철학 교양수업에서 B+을 맞고도 이건 공부한다고 풀 수 있는게 아니라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졌다. 좀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일 건수가 없었다.


그래도 천성은 어디가지 않았는지 교환학생 준비를 위해 학기 중에 등록한 영어학원 숙제를 해가지 않았고 (학기 중에 영어학원 다닐 생각을 한게 내가 말하는 조건만 갖춘 애매한 노력의 표본이라는 거다.) 종강 후 일주일 바짝 준비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그마저도 저버려서 목표했던 점수도 받지 못했다.


깊게 고찰해보지는 않았지만 내 이런 모순적인 성정은 일말의 완벽주의와 효율성 집착, 아주 약간의 자기과신이 가미된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JUST DO가 어렵다.


그런데 또 시도는 닥치는 대로 한다. 그리고 포기도 쉽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 전력을 다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기회를 붙잡고 정말 꾸역꾸역 종착지까지 오지만 엉성한 결과물을 손에들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은 애매한 노력은 내 그림자를 부풀려 갔고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나는 한없이 커다란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어깨를 돌려 세우면 온 몸에 '속이 빈' 풍선을 덕지덕지 붙인 내가 서 있을 것이다. 몰론 고무 풍선 만큼의 내공도 내공이라면 쌓였겠지만.

 

*


얼마 전 인스타그램 매거진에서 이런 글귀를 봤다.


이상적인 삶을 생각할 때면,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후 그에 맞는 커리큘럼에 따라 한 단계씩 나아가는 형태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삶은 언제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고, 우연히 발생하고 일단 수습하는 과정을 거듭하며 삶의 이중나선을 그려왔다.


재미있게도, 애매한 노력은 사소한 선택을 일생일대의 전환점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기차화통을 삶아먹고 기차를 직접 들어 옮길 노력으로 원래 생각한 철로로 돌려놓지 않은 이상 기차는 역방향으로 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다면, 가장 직관적인 예로서 목표대학 못가면 무한N수를 감행하는 것이 있다. 나의 경우에 아직까지 애매한 노력을 한방에 상쇄하려는 분골쇄신의 노력을 한적이 없는 대신 생각지도 못한 학과를 나와 상상도 못한 직업을 가질 기회에 처해있다. 생각 안해본건 이제부터 생각해보면 되는거니까,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실수를 봉합해서 만든 현재에 나름 만족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문득 이게 합리화가 아니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애초에 내 전략은 꿈을 크게 가지고 중간이라도 가는게 아니라 진짜 그 꿈을 이루는 것이었는데, 반쪽짜리 목표 달성에 행복해하는게 우매한 우물안 개구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중에 취업을 할 때도, 결혼을 하더라도 최상의 결과를 스스로 물리치고 인생은 원래 달고도 씁쓸한거라며 꼰대같은 말로 위로할까봐 겁이난다. 물론 무한경쟁의 한국사회에 절여진 아주 편협한 생각이지만 20년간 형성한 자아가 그 성과주의 사회에 의탁해 있으니 아예 무관한것 같지도 않다.

 

또, 거듭된 수정끝에 알아볼 수 없게 된 설계도를 따라 집짓는 일을 하고있으니 믿음이 아주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 텃밭 딸린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골라놓은 땅에 난데 없이 아파트를 지으려다가 폭삭 내려앉고 다시 시작해야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말로는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영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다. 굳이 찍어먹어보지 않아도 인생은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욕심을 조금 내려놓는 차원이다. 그리고 만날 기우를 품어봤자 내가 노력100 인간으로 회생하는일은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고 매사에 의연한게 내 삶의 지향점에 더 가깝다.


어릴적 허리를 곧게 펴고 앉는 습관을 들이려고 할때, 찰나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한달 내내 고쳐 앉은 자세가 금새 풀어지곤 했다. 밀도 있는 인생, 요행을 바라지 않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나의 근면성실함은 언제 퓨즈가 끊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왕지사 끊어진거, 원래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나태하면서도 이것저것 가져다 때우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들 이렇게 산다는 거 안다. 난 자의식과잉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칭한 애매한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아득바득 목숨을 건 노력일 수 있고 또 기만일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오늘 이야기의 교훈은 없다. 죽도록 노력하지 않는 내가 밉긴 미운데, 어쩌겠어.

 


[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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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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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insdo
    • 시도를 닥치는 대로 하신다는 게 얼마나 용기있는 것인지 이제 조금 알겠어요. 하지만 이제 알았다고 하더라도 씁쓸함만 남는 걸요.. 차라리 몰랐으면 이 헛헛함이 덜할까요..? 에디터님의 계속될 시도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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