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소중했던 기억은 한 줌의 모래 같아 - 휴학일기3

해가 지날수록 변해가는 순간의 감정들
글 입력 2024.08.2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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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을 테다. 그 기억은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래면 추억으로 변하고 인사이드 아웃 속 핵심 기억들처럼 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가끔은 그 당시 정말 소중했던 기억들이 시간이 흐르면 평범했던 하루로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마치 한 줌의 모래처럼 말이다.


초등학생 시절,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작은 손에 꼭 쥐고 있는 고운 모래들을 집까지 데려가고 싶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함께 놀던 친구들과 만들었던 작은 모래성이 전부 같았지만, 엄마가 날 부르던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모래들은 다시 바닥에 흩뿌려지곤 했다. 살다 보니 평생 영원할 것 같던 친구들과의 관계도, 정말 잊고 싶지 않아 기록으로 남겨두던 순간들도 한 줌의 모래처럼 사라지는 게 가끔은 쓸쓸하게 느껴진다.


끝날 것 같지 않던 10주간의 영어코스가 마무리되고, 종강했다. 짧다면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는데, 약 한 달 뒤에는 새로운 가을학기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 반은 총 8명의 아시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여기서 영어를 배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는데, 오히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영어를 더 쉽고 빠르게 배웠고, 덩달아 자신감도 많이 생겨났다.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빨라 6주 정도가 되었을 때부터 아쉬움이 밀려와 가끔씩은 마지막 날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 이후부터 더 빠르게 시간은 흘러갔고, 시험까지 다가와 마지막 주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코스가 끝나기 3일 전, 친구들과 선생님께 드릴 짧은 편지를 작성했다. 편지를 작성하며 나의 10주를 천천히 돌아봤다.


친구들과는 매일매일 3시간에서 5시간의 수업시간 동안 영어로 의견을 나누며 서로 영어 실력을 키워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근처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학교에 밤까지 남아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주말에는 맥주를 사들고 공원에 하루 종일 누워 함께 웃고 떠들며 다른 국적이지만 정말 마음을 나누고 진정한 친구가 되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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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향형이지만, 매일 누군가를 만나는 건 조금 힘든 성격이다. 하지만 여기 런던에서만큼은 주저하지 않고 하루를 충실히 보내고 있다. 내가 조금 더 다가갔기에, 더 깊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코스가 끝나도 당연히 만나겠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매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10주간 정이 많이 들어서 더 돈독한 감정이 커졌던 것 같다. 편지를 다 작성하고 나선 절대로 마지막 날 울지 않아야지 다짐했고, 마침내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마지막 날 정말 이상하리만큼 슬프거나 기쁜 감정이 들지 않았고, 정말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마치 평범한 수업 날처럼 말이다. 심지어 종강파티도 일찍 끝나 기숙사에 점심을 먹고 바로 들어왔는데, 우리가 놓치고 싶지 않던 기억들이 가끔씩은 한 줌의 모래처럼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더 크게 다가왔고, 그다음 날도, 이튿날도 평소의 하루처럼 흘러갔다. 며칠 전까지는 이 수업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나도 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마치 나의 감정이 메마른 거 같았다.


우리는 가끔씩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꽂혀 순간 감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수많은 문장들 속 마침표 하나인데, 그 당시에는 느낌표처럼 나를 압도하기도 한다. 나는 종종 ‘마지막’에 미련을 두곤 했는데, 이번 코스가 끝날 때 역시 그랬다. 그 순간을 마주하기 싫었고, 마지막 날을 상상하면 마음이 울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염려와는 다르게 오히려 마지막 날은 더 아무렇지 않았고 그저 좋은 기억만 가득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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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거듭할수록 감정보다는 이성이 조금 더 앞서고, 현실적으로 변하는 걸 몸소 느끼고 있다. 과거엔 내 핵심기억으로 자리 잡았을 소중한 기억들이 이제는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간다는 것에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점점 더 감정의 파동이 크지 않다는 걸 느끼며 하루하루에 더 충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아쉬움과 미련은 그 순간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후회에서 찾아온다. 현재 런던 방문학생 생활은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준비했고, 여기서도 그렇게 생활하고 있다. 그렇기에 아쉬움보다는 만족감이 더 크게 다가와 하나의 큰 산이었던 영어코스가 마무리되어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나 보다.


코스가 마무리되며 나의 새로운 감정적 변화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가끔은 놓치기 싫은,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소중한 순간들일지언정 자연스럽게 마음의 동요에 따라 흘려보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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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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