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반 일리치와 샐러드 한 그릇

글 입력 2024.09.0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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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드 한 그릇


 

요즘은 아침 식사(정확히는 그 날 처음으로 무언가를 먹게 될 때)마다 어째 조금 비장해진다. 최근 들어 가속 노화니 하는 이야기들이 유독 귀에 많이 들어와서 그렇다. 긴 공복 직후 무엇을 섭취하느냐에 따라 혈당이 어떻게 되고 이것이 또 건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예전의 웰빙 트렌드가 더욱 강화되고 섬세해진 상태로 돌아와서 삶의 구석구석을 꽉 붙들어매는 것 같다. 지난 수십 년간,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세상에서 무병장수는 어려워도 유병장수는 쉽다는 것을 직접 목격해왔다.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는 이미지만큼 현대인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없다. 나 역시도 종종 샐러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두려움을 질겅질겅 씹어삼킨다.

 

그렇게 잇새에서 짓이겨지는 풀의 맛을 느끼고 있다 보면 우스갯소리 하나가 종종 떠오른다. 고기와 밀가루를 먹지 않으면 오래 살 수 있지만 그렇게 살면 딱히 살 이유가 없다는 말. 하지만 그 말처럼 사는 낙이 딱히 없다고 해서 손쉽게 죽음을 취사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쉽게 죽기도 어려운 요즘에 살기 위한 강박이라니, 역설적이지만 분명 실존하는 감각이다. 눈 앞의 샐러드 한 그릇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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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먹은 콥 샐러드

 

 

어쩌면 과거(웰빙 열풍이 불었던)보다 초점이 조금 더 비관적인 쪽으로 옮겨갔다는 느낌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의 출발점이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서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을 조금이라도 늦출 것인가,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칙칙한 변화가 실존주의적 물음이나 치열한 자기 탐구로 직결되었느냐고 하면 조금은 의문스럽다. ‘가속노화’라는 단어에서처럼,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죽음이 아닌 노화. 다시 말해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도 죽음 그 자체가 아닌 죽음에 이르기 전 삶의 과정으로서의 노화다.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저 멀리 있다.

 

이 논의에서 우리가 문제시하는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삶이 ‘죽음에 이르고 있는 기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는 ‘느낌’(궁극적으로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을 향해가고 있으니 이는 느낌의 문제라고 칭하고 싶다)이다. 얼핏 보면 필연적인 결말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것 같지만, 오히려 기만이 더욱 기만이 아닌 듯한 모습을 한 채로 잘 포장되어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했다. 이 갑갑스러움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찾게 된 건 어느 소설 하나를 만나고 나서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우연한 사고로 서서히 죽음을 향해가게 된 한 남자, 그리고 그 속에서의 고뇌. 이야기 자체는 복잡하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문장들에 마음 속의 의문들이 관통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번듯한 일자리, 평범한 가정 생활, 조금씩 넓어지는 집, 그럴싸한 인간관계.... 잘 닦인 도로를 달리듯 당연하게 굴려오던 생활을 사고로 인해 한순간에 잃게 된 이반 일리치. 그의 생애 동안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것들을 그는 드디어 묻고 고뇌하기 시작한다. 남일처럼 여겨왔지만 이제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고통과 죽음, 주변의 위선과 텅빈 관습. 그의 삶을 이루던 것들도, 또 그의 삶을 이루던 것들이 곧 진정으로 자신이 원해왔던 것이라는 굳은 믿음도 무력하게 흩어져갔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던가. 하지만 무너짐을 정확히 직시하는 순간 일리치의 삶은 재건의 기회 따위 없이 끝나버린다. 공포스러운 일이다. 짧다면 짧은 분량의 중편 소설이었지만, 그 어떤 호러 영화도 이만한 섬뜩함을 선물해주지는 못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가 알고 있고 이반 일리치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끔찍한 그의 상태를 감추려고만 했다. 게다가 이반 일리치마저 그런 거짓말에 동참하게 하려고 했다. 거짓말, 죽기 직전까지도 멈추지 않을 이런 거짓말, (...)

그 주변의, 그리고 그 자신의 이런 거짓말이 이반 일리치의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소설은 일리치의 삶을 둘러싸고 있던 것들, 어쩌면 연극 같다고도 할 수 있는 삶의 온갖 허례허식과 과업들의 기저에 깔린 기만을 기막히게 들춰낸다. 결국은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공평한 결말을 맞게 되리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기만, ‘열심히’의 감각으로 텅빈 삶을 속여나갈 뿐인 그 기만에 대해 끊임없이 던져지는 날카로운 질문들. 그 날카로움은 그동안 묵직하게 쌓인 답답함을 살살살 긁어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속임수들이 과연 그 자체로 악인가?‘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눈 앞을 가리는 일이,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는 세상의 이치 앞에서 한없이 허무해지지 않기 위한 방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말로 인생이 한바탕 연극에 불과하다면, 이 연극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당위를 찾는 것이 도무지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니까.

 

 

 

자신만의 대본


 

흔히들 내면의 목소리를 쫓으라고, 세상의 가치가 아닌 나만의 가치를 찾아나가라고, 그렇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로 삶을 꽉꽉 채워나가라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겨우 인간인지라 삶의 끝을 감히 가늠할 수가 없고,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면서 일상을 ’정상적으로‘ 유지해나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상성의 틀에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메인 트랙에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을 누리고 싶고, 주류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생겨나는 이점들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매순간이 절충일 수밖에 없다. 깎여나가지 않고서도 삶을 굴려갈 수 있다면 그만한 행운이 없겠지만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모두가 유일무이한 이 세상에서, 절충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만약 그런 삶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반 일리치처럼 무언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일 테다.

 

절충. 다시 말해 나의 일부가 어쩔 수 없이 깎여나간다는 고통을 끝내 견디지 못하면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럼에도 절충해야 한다는 사실을 수긍하거나, 삶에서 비롯하는 이 모든 고통을 죽음으로써 단숨에 없애버리거나! 보통은 전자를 택하게 되지만,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무로 돌아가고 만다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들이민다. 왜 이 고민과 모순들을 고통스럽게 견뎌야 할까, 다 부질없는 것인데, 하고. 그러니 그나마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목표들로 이뤄진 전자를 택하도록 스스로를 자꾸 달래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한 기만의 방식이었다. 모두에게 공평한 결말 앞에서 그저 쭈그러들지만은 않기 위한 발버둥.

 

그러니까 중요한 건 속임수의 여부 그 자체라기보단,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속임수와도 같음을 인지하고 있는가의 여부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니, 한없이 허무한 결론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행하는, 다시 말해 살기 위해 행하는 기만은 눈감아주고 싶어졌다.

 

모든 것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야 사실 여전하다. 내가 인식하는 ’의미‘는 존재하고 있는 나에게서 비롯한 것일 뿐, 본질적으로 유의미한 것을 판가름하는 일 역시 여전히 신의 영역처럼 보인다. 나의 삶도 어김없이 막을 내릴 것이다. 다만, 그 사실에 무력해져서 무대 위에 그저 가만히 서 있기보다는, 이왕이면 열연을 펼쳐보이며 재미있는 서사 하나를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지금 내가 씹고 있는 샐러드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나는 언젠가 죽을 텐데! 하지만 이왕이면 이 각본에서 건강한 내가 등장하는 부분이 좀 더 길었으면 할 뿐이다.

 

자신만의 대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한편으로는 허망한 것임을 알지만 동시에 그 사실에 매몰되어 지나치게 무기력한 채로 자신의 삶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그 허망함을 소화하며 후회를 소급해나갈 것이다. 깨닫지 못한다면 이 연극은 기만이지만 이따금 그 속임수의 존재감을 의식할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어떠한 ‘앎’에 도달한 적이 있다면 그의 연기는 말 그대로 '인생연기' 아니겠는가. 내가 그 앎에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까, 눈 앞에 놓인 양상추 더미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는다는 지문은 순전히 내 손으로 써내린 한 줄이라고.

 

 

 

황수빈.jpg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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