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당신의 삶을 축하드려요 [서간문]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께
글 입력 2024.08.2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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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루를 놓쳐버렸습니다. 고모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하루였을 텐데요. 그 일요일에 우리 가족은 조금 분주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마트에 들러 조금 비싸지만 달콤한 냄새가 진하게 나는 과일을 여러 종류 사왔습니다. 한가득 사온 과일을 깨끗하게 씻고 깎아 손질했습니다. 묵직한 수박은 빨간 속살만 깍둑깍둑 썰어서 한 통 가득 담아놨고요, 물렁물렁하게 잘 익은 복숭아는 껍질을 꼼꼼히 씻고 물기를 털어두었습니다. 과일이 맛있어야 할 텐데. 그 분주했던 아침, 우리의 부엌에 웃음기는 없었고요, 우리가 했던 말은 그게 거의 전부였습니다.

 

과일 손질을 다 마친 다음에야 우리는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외출복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래도 옷은 깔끔한 걸로, 그렇다고 너무 화려하진 않은 걸로. 우리는 어쩐지 드레스코드를 고민하며 옷장을 뒤적였습니다. 아침부터 바지런하게 움직인 덕분에 무사히 모든 준비를 끝낸 우리는 출발 신호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고모 면회는 못 갈 거 같다. 아침부터 상태가 너무 많이 안 좋아져서 의식이 희미하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는 허탈했는데요, 그 허탈했던 마음이 슬픔으로 변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겨우 3초 정도. 괜스레 들떴던 우리의 그 아침은 순식간에 슬픈 침묵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바지런히 움직이던 그 아침에도 고모는 다가온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 실감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 마냥 웃을 수는 없을 테지만 작별의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잠깐의 시간, 죽음은 그 마지막 기회마저 가차 없이 빼앗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그 순간 나는 당신의 눈을 보았습니다. 붉어진 당신의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습니다. 잠깐이라도 깜빡인다면 두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흘러버릴까 봐, 우리 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도저히 멈출 수 없을까 봐, 중력처럼 짓누르는 슬픔의 무게를 얇은 눈꺼풀 한 겹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 애달픈 눈빛은 당신을 한결 늙어 보이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늙음이 우리를 한 번 더 슬프게 했다는 것을 당신은 모를 거예요. 우리도 당신처럼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꾹 참고 있었으니까요.

 

누구를 탓해야 했을까요. 그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고모에게 서운해야 했을까요. 자꾸만 미루다가 너무 늦어버린 우리의 게으름을 원망해야 했을까요. 야무지게 챙겨둔 짐을 다시 풀어놓으면서 우리는 한숨만 내쉬었습니다. 하필 준비했던 과일 모두 달고 맛있어서요. 그래서 괜히 더 속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고모를 보러 갈 수 있었습니다. 고모가 입원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급하게 면회 허가가 떨어진 날이었습니다.


환자의 임종이 가까워졌으니 제한 없이 면회를 허락합니다.


그건 자비였을까요. 아니면 명령이었을까요. 무서울 정도로 평온한 침묵이 흐르는 호스피스 병동.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고모의 곁에서 당신은 시간이 멈춘 듯 침착하게 서있었습니다. 어느덧 늙어버린 오빠와, 늙은 오빠보다 더 빨리 아파버린 여동생의 모습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습니다. 차라리 읽지 않았으면 좋았을 시.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그래서 두 번은 읽고 싶지 않은 시.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 고모의 손과 발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엉엉 울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당신은 고요하게 말했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고모를 위해서 기도하자.


우리는 퉁퉁 부어오른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은 죽어가는 여동생의 손을 꼭 쥐고 기도했습니다. 읊조리듯 오래 계속되던 당신의 기도 속에서 잦은 한숨이, 이따금 가빠지는 호흡이, 차마 막지 못해 새어나온 작은 흐느낌이 느껴졌습니다. 살려달라는 부탁, 낫게 해달라는 절규, 기적을 일으켜달라는 호소는 없었습니다. 다만 이별을 앞둔 여동생의 평안과, 안식과, 고통 없는 마지막을 구하는 간절함만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담담한, 그래서 더 슬프게 느껴지는 기도는,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된다고 해도 저는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며칠 후 고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모의 임종을 지켜본 당신은 말했습니다. 고모가 편안하게, 아주 편안하게 갔다고. 우리는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흘렸던 그 울음의 절반은 고모를 위한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당신을 위한 것이었어요. 또 한 번 형제를 떠나보낸 당신의 슬픔을 감히 헤아릴 수 없어서, 마르지 않을 눈물을 자꾸 속으로만 삼켜서 축축이 잠겨버린 당신의 숨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어서, 우리는 당신을 대신해 마음껏 울었습니다. 후련하게 울어주는 것으로 위로가 됐을까요.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는데요.

 

당신의 마음을 자꾸만 걱정하던 우리에게 당신은 말했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아무리 욕심을 내고,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결국은 순리대로 흐르는 거라고. 아마도 삶과 죽음이 그런 거겠죠. 아무리 붙잡아도 떠날 사람은 떠나가고, 아무리 몰아쳐도 태어날 생명은 태어나는 것. 당신은 잘 알고 계셨을까요. 하나의 슬픔이 가면 언젠가 또 다른 기쁨이 온다는 것을. 슬픔을 거스르지 않고 맞이한 고모의 임종으로부터 며칠 뒤 기쁨으로 충만한 당신의 생일이 돌아온다는 것을. 죽음의 순간과 삶의 시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것이 순리이자, 인생이라는 것을요.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계셔서 그랬을까요. 붉게 물든 당신의 눈에서 끝내 눈물을 쏟아내지 않았던 이유는요.


몸이 늙어간다는 사실이 마음의 무뎌짐을 뜻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살면서 슬픈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 이제는 어떤 일에도 덤덤할 수 있다는 당신에 말에 우리는 또 한 번 슬퍼집니다. 평생 슬픔을 견디며 무너지지 않고 살아온 당신을 위해, 우리는 당신의 곁에서 함께 버티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슬픈 날이 지나고 오늘은 다시 기쁜 날, 당신의 생일입니다. 내색도 표현도 인색한 우리 아버지, 우리가 있어줘서 고맙다는 당신의 말에 고요하지만 거대한 당신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고맙습니다. 위대한 당신의 삶, 슬프고 아팠지만 끝내 기쁨으로 충만할 당신의 삶을, 축하드려요. 사랑합니다.


삶의 어느 면에서부터 문득문득 당신을 닮아감을 느끼는, 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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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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